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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하나가 되는 지혜『다석 강의』 6강 풀이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9.08.13 18:57

본 글은 <다석일지> 1956년 11월 2일 자에 수록되어 있다. 유교 전통에서 강조해왔던 대동정의(大同正義), 즉 모두가 크게 하나가 되는 세상에 대한 열망을 多夕 나름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를 순수 우리말로 다시 풀어 대동정의를 유교를 넘어 인류보편의 길, 다석 고유한 귀일(歸一) 사상의 틀로 확대시켰다. 이를 위해 흥미롭게도 한자어 ‘大同正義’를 양분, 파지시켜 그 뜻을 깊게 파헤쳤다.

이런 표현들을 활자로 담을 수 없어 유감이나 할 수 있는 대로 언어화 시켜보겠다. 그에게 大同正義는 ‘별의친정’(別義親正)이란 말과 동의어였고 이를 다시 그가 만든 우리말 ‘닳옳핞밣’로 풀어냈음을 글 전개에 앞서 밝혀둔다. 글 말미에 이들의 관련성이 재차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6강은 다른 글들에 비해 비교적 내용이 많으나 축약했다.

▲ 『다석 강의』 6강

다석은 ‘대동정의’란 말을 대단히 좋아했고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말했듯이 ‘대동’(大同)은 ‘큰 하나’, 즉 ‘크게 같아지다’란 뜻이고 ‘정의’(正義)는 ‘곧이곧게 옳게 산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이 말을 언제든 가슴에 품고 살 것을 종용했다.

얼마 전 까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양적 견해였을 뿐이다. 다석이 묻고 답하는 정의에 대해서도 귀 기울일 일이다.

주지하듯 기독교는 정의의 최후 승리를 믿는 종교이다. 정의가 최후에 승리하는 것이기에 일상 현실, 세상에서 그것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세상 속에서 정의는 늘 상 부재상태에 있다.

이점에서 다석은 정의는 하느님의 것이고 그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 말한다. 정의의 승리란 하늘의 승리와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다석은 정의를 알려면 하느님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했다.

무슨 ‘주의’에 속한 정의 말고 大同 정의를 말하려면 하느님 편 될 것을 역설한 것이다. 대동은 의당 ‘하나’이기에 그것은 옳고 바를 수 있다. 하늘로 들어가야만 네/내편 편 가름을 그칠 수 있다.

상대방을 이단으로 여기며 부정하는 것은 모두 ‘이 하나를 모른데서 기인한다.’ 우리들 인간 속에는 이 ‘하나’로부터 온 귀중한 것이 내재해 있다. 이것을 찾아 싹트게 하는 것이 인간이 가야할 길이다.

하지만 세상 속에서 이 하나를 싹틔워 키운 삶을 찾기 어렵다. 이런 사람은 언제든 된(옳은) 말만 하고 산다. 다석 역시 그렇게 살고 있는 지를 거듭 성찰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大同은 큰 하나, 전체로서의 하나를 일컫는다. 이 하나로부터 수천 수백의 것이 나올 수 있다. 전체로서의 ‘하나’는 개체인 하나보다 언제든 우선한다. 개체가 이 하나로부터 나왔다는 말이겠다. 개체는 하나로부터 나왔고 이 하나로 돌아 갈 뿐이다.

사람들은 조, 경에 이르기까지 숫자를 세며 살지만 이제는 전체인 ‘하나’를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다석은 숫자를 세며 사는 인생을 어린아이들의 ‘딱지치기’로 비유했다.

지난 장에서 우리는 증자(曾子)의 말, ‘속 곧이 믿븨’란 말을 공부했다. ‘하나’를 받은 자신 속 깊은 곳을 곧(굳)게 믿음으로 자기를 비우는 일에 더욱 힘쓰라는 것이다. 이런 삶을 머리로만 알지 말고 어린 새가 양날개짓 하듯이 몸으로 익히라(習)했다.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는 자신의 속곳, 바로 이곳에 전체로서의 하나가 내주한다. 익히 알듯 다석은 하느님을 ‘빈탕’, 곧 없이 계신 이로 풀었고 이런 빈탕에 맞혀 노는 일을 인간의 사명으로 여겼다. 이 때 ‘빈탕’은 ‘하나’의 다른 이름이겠고 이것의 인간 속 내주가 속곳(바탈)인 것이다.

이것을 찾아 익히는 과정이 ‘빈탕한데 맞혀 노는’ 인간의 삶이겠다. 이로 인해 인간은 불편부당(不偏不黨)한 ‘하나’와 짝할 수 있다. 덜 없던 인간이 ‘없이 계신 이’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석은 믿븨(信)를 자기가 깨친 자신 속 ‘하나’를 싹 틔우고자 지속적으로 밀고나가는 행위라고 풀었다.

다석은 大同正義를 파지하여 앞선 내용을 재차 강조, 설명한다. 우선 큰 大를 반으로 쪼개서 사람 人자 둘로 만들었다. 사람이 만나 일을 만들기도 하고 그르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할 목적으로 한자어를 흥미롭게 푼 것이다. 예컨대 북(北)을 두 사람이 서로 등져 갈등하는 모습으로, 비(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어 상호 비교하는 형상이라했다.

이어 동(同)을 쪼개서 두 개의 사(司)자를 만들었다. 이 때 司는 맡을 ‘사’, 특별히 법을 주관하는 이들을 적시한다. 이들은 자기 의견을 갖고서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이/저런 판단이 공존하니 하나가 되기 어렵다.

이제 바를 정(正)을 하(下)와 지(止)로 나뉘어 이해했다. 위로부터 말이 떨어지면(下) 그 말을 지켜 실행하는(止) 것이 바로 正인 것이다. 한번 정했으면 요지부동하라는 뜻이다. 이렇듯 大同正義를 두 개의 ‘人司下止’로 파지했다.

그 뜻을 다시 말하면 사람들끼리 자기 말로 판단하는 것을 그치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말을 받아 지키라는 것이다. 이런 하늘의 말씀은 조건 없이 지켜 수행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의(義)는 양(羊)과 자기(我)의 복합어로서 양처럼 자기소리 없이 묵묵히 하늘 뜻 따른다는 의미라 하겠다. 下止(正)과 羊我(義)과 결국은 같은 말인 셈이다.

이런 대동정의의 실현을 위해 다석은 ‘경신중정’(敬愼中正)이 필요하다 여겼다. 대동정의에 이르는 방법이자 수단을 언급한 것이다. ‘속 곧이 믿븨’(忠信)의 길을 가기위한 방편을 일컫는 것이겠다.

따라서 ‘경신중정’은 ‘습’(習)에 해당되는 것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 불리는 경(敬)을 다석은 궤짝 속에 말(口)이 들어있는 형상이라 했다. 그 옆에 붙은 ‘복’(攵)은 분명하게 살피다란 뜻을 지녔다.

따라서 ‘경’은 늘 깨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라 할 것이다. 상자 속의 말(언어)를 늘 상 살핀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리학자들은 경을 주일무적, 곧 하나에 집중하는 일이라 했고 특히 퇴계(退溪)는 이를 대월상제(對越上帝), 하느님께로 나가는 길로 여겼다.

신(愼)은 참, 진실을 뜻한다. ‘속 곧이 믿뷔의 상태’라 할 것이다. 경망, 경솔치 않고 묵직하게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홀로 있을 때를 조심하라는 ‘신독(愼獨)’이란 말을 떠올려도 좋겠다. 하느님이 내 곁에 계신 듯이 자신을 성찰하며 사는 태도를 일컫는다. 하늘 뜻을 받들어 언제, 어느 곳에서든 묵직하게 묵묵하게 그 일을 수행하는 삶이다.

중(重)은 동녘 동(東)에 흙 토(土)를 더한 것으로서 무겁다는 뜻을 담았다. 묵직하나 진취적으로 살라는 말이다. 정(正)은 앞서 말했듯이 한 번 뜻을 받아 지녔으면 그것을 요지부동하게 지키라는 의미이다. 다석이 正을 下와 止로 파지한 것을 기억할 일이다. 이처럼 경신중정하면 삶은 조변석개(朝變夕改)하듯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이런 사람의 말이 법이 되고 이런 이들이 정치가가 되어야 세상이 바르게 된다. 학자들은 의당 경신중정해야 옳다. 선비 사(士)밑에 말을 뜻하는 입 ‘口’자를 놓으면 길할 길(吉)가 된다. 선비의 말이 길(吉)하려면 언제든 정(正), 즉 받은 것(下)을 지켜야(止)만 한다.

이런 배경적 지식을 토대로 다석인 본격적으로 대동(大同)을 설명한다. 한마디로 ‘크게 같다’는 이 말은 오직 참말을 하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 경신중정한 정신을 견지한 사람에게서만 비롯할 수 있다.

다석은 大同正義를 앞 두 글자를 위에서 아래로 정의를 횡적으로 붙여 쓰면서 ‘ㄴ’자 형상을 만들었다. 우리 한글을 하늘이 준 글(天文)이라 여겼던 다석은 한글 역시 뜻글자로 보았다. 그래서 ‘ㄴ’을 하늘로부터 받는 형상이라 했다.

‘ㄱ’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적 특성을 지닌 것과 정확히 대별된다. 즉 대동정의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그것을 오직 ‘속 곧이 믿뷔’의 상태를 이룬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다석은 인간 삶에서 ‘ㄴ’자를 가장 중하게 생각했다.

하늘로부터 받아 할 것, ‘받할’(바탈)을 지닌 존재가 바로 우리들 인간인 까닭이다. 이에 잇대어 다석은 예(禮)를 설명한다. 제기(祭器)에 음식을 담은 형상을 한 이 禮자의 우측글자 ‘豊’에 주목했다.

이것은 꼭대기에 무엇인가를 이고 있는 모습이다. 사람의 이마도 임(하늘)을 마중하는 이마라 했으니 그 뜻이 상통될 수 있겠다. 여하튼 하늘에 머리를 두고 무엇인가 보이기를 기다리는(示) 것을 禮라 하였다.

이는 결국 제사를 뜻한다. 하지만 이것이 제도가 되면서 본뜻이 여러 각도로 달리 해석되기 시작했다. 이런 연유로 큰 하나의 길이 단절되고 만 것이다. 다석이 대동정의란 한자어를 둘로 쪼개서(나누어) 설명한 것도 이런 다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큰 하나에서 나오는 그 순간부터 삶이 나뉠 수밖에 없다고 본 탓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동야자이야’(同也者異也), 즉 ‘같다는 것은 곧 다르다’란 말이다. 이런 다른 것을 일컬어 사람들은 종종 이단(異端)이란 정죄했으나 실상 그 안에도 같은 것(同)이 없지 않다. 실상 다른 것도 같은 것이라 해야 옳다.

이런 이유로 다석은 대동정의를 위해 인간이 할 일은 ‘신종추원(愼終追遠)’이라 하였다. 생각과 삶이 나뉘어졌으나 다시 ‘큰 하나’를 찾아 그곳으로 歸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종추원에 보본반시(報本反始)란 말이 더해져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귀일의 뜻이겠다. 본래 하나에서 나왔기에 하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신종추원 보본반시의 의미인 것이다.

먼저 신종추원을 말해야겠다. 흔히 제삿날 우리는 죽은 이가 생전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는 듯이 밥상 차려놓고 그를 추원했으며 옛적에는 3년간이나 신종(愼終)했다. 3년간 어미 젖 먹고 자랐듯이 죽은 부모 무덤 근처에서 3년을 제사했고 묘지를 지켰던 것이다.

그러나 증자는 이를 달리 생각했다. 본래 신종이란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갈고 닦아 자기 삶을 잘 마무리 하는 일’이라 한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命(바탈)을 이루는 것이 신종의 본뜻이라 봐도 좋겠다.

추원(追願)은 멀리 떠난 이를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일이다. 조상을 넘어 하느님을 좆아 가는 것이 추원이다. 다석은 기독교가 조상을 잊은 것도 잘못이지만 유교가 하느님을 잊은 것을 더 큰 죄로 여겼다. 하느님을 좆아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 갈 길이다. 기독교의 추도예배란 것도 실상 이런 뜻을 담아야 옳다.

이제 報本反始를 말할 차례가 되었다. 본디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사람과 자연은 모두 자신의 시작 처로 반듯이 되돌아오고 만다. 보본반시의 이치가 삶을 지배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식이  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고 나뭇잎이 떨어져 거름되어 새로운 잎을 내는 것, 모두가 보본반시를 적시한다.

보천반원(報天返元)이란 말도 이와 동일하다. 시작(元)을 다시 찾는 일, 이것이 바로 이 말뜻이다. 이 경우 시작은 하늘, 하느님이자 큰 하나일 것이다. 한정이 없는 전체, 맨 처음, 참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귀일을 일컫는다.

이렇게 되어야 세상은 정의롭고 문제없게 된다. 불편부당한 세상이 여기서 비롯한다. 보본반시는 마땅히 보천반원에로까지 확대되어야 옳다. 이점에서 다석은 유교가 보본반천에 이르지 못했다고 아쉬워 했다. 한정된 조상에 이르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대동정의를 이룰 수 없다. 같으나 다른 것이 세상 속에 함께 존재하는 탓이다. 다른 것을 분별하여 밝히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같으나 다른 것이 공존하는 세상은 상대적이다. 그렇기에 저마다 같아지기 어렵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세상이다. 다른 것은 다른 것대로 놓아둘 일이다. 하지만 다르면서 서로 닮게 되는 것이 삶의 이치이다. 부부가 닮고 자식이 부모를 닮게 되는 것이다.

세상 학문은 생각을 닮아가도록 역할 한다. 다르면서 같게 되는 일이 바로 세상 속 우리들 과제일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들 스스로가 바른 사람(正義)이 되는 일이다. 바르게 되어야 큰 하나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까닭이다.

끝으로 다석은 ‘별(別)의(義)친(親)정(正)’이란 말로 6강 내용을 종합하고 마무리 한다. 앞의 내용을 이 단어로 다시 설명코자 한 것이다. 여기서 ‘別’은 차이, 다름을 말한다. 義란 다름을 인정하는 일이다. 차이가 차별이 아니란 말이다. 각자의 역할대로 살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서로가 닮아갈 수 있다. 이것이 親의 의미일 것이다.

서로 닮아 가는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큰 하나’(大同)을 말할 수 있다. 이를 일컬어 다석은 ‘正’, 곧 정의라 했다. ‘온통 하나가 되는 지혜’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위 네 말을 다시 ‘닳, 옳, 핞, 밣’이라 달리 표현했는데 이 말뜻이 본 책에 상세히 설명되지 않았다. 가늠해보자면 ‘닳’은 다르다를, ‘옳’은 옳다를, ‘핞’은 하나가 되어간다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밣’은 궁극적인 하나를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각 말에 ‘ㅎ’받침을 붙이는 이유가 많이 궁금하다.

결과적으로 다석은 본 강의를 통해 이 네 단어가 ‘대동정의’, ‘경신중정’, ‘별의친정’과 내용적으로 같은 순수 우리말인 것을 보여주었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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