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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통한 노동의 구원”존 데이비드 헤이워드의 「노동자 그리스도(Christ The Worker)」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8.16 20:05

휴가는 가지 못하고 휴가의 추억만 만지작거린다. 군대시절 그리도 기다리던 휴가, 하지만 기쁨은 나오는 그날뿐, 바로 다음날부터 복귀날까지의 카운트다운으로 조여 온다. 참으로 즐겁고 여유로운 쉼이기보다는 잠시라도 잊으려는 도망에 가까웠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복귀를 잊으려는 도망.

뜨겁게 끓어오르는 휴가시즌이다. 이 역시 휴가날만 기다리며 뼈 빠지게 일한 것이라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휴가가 단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로부터의 탈출이라면, 참된 쉼을 맛보기 힘들다.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가야 하는 카운트다운이기 쉬우니까. 다음 휴가를 기다리다가도 문득 깨닫는다. 긴 지옥으로 돌아오는 악순환 속에 갇혔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쉼은 어떨까. 하나님의 쉼은 6일간의 행복한 사랑을 완성하는 안식이 아니었을까? 창조 역시 노동이다. 흑암과 공허에 갇힌 모든 존재들에게 생명의 질서를 선사하는 노동이 창조였다. 사랑과 창조의 기쁨이 바로 노동이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안식일은 그 사랑과 창조의 여운을 음미하는 여백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온 존재의 행복한 회복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여백으로 쉼을 만끽하셨으리라. 우리도 다 그리 쉬라고 안식일을 구별하여 축복하시지 않았을지.

축복받은 안식은, 참된 쉼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존재하기는 할까? 안식과 쉼을 강탈당하고, 그저 잠시의 도피로 내몰리는 시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강렬한 소비의 쾌락으로 노동의 고됨을 잠시라도 잊으려는 시대로 보인다. 강탈당한 안식과 쉼, 그것은 우리 시대가 행복한 노동을 빼앗긴 탓으로 보인다. 사랑과 창조의 노동을 빼앗겼기 때문에 축복받은 안식도 지켜내기 어려워졌다. 쉴 줄 모르는 시대는, 행복한 일을 빼앗긴 시대의 결과다. 참 노동이 참 쉼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주일성수,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들 강조한다. 덕분에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이들은 이중고를 겪는다. 노동의 피로에 죄책감까지 짊어진다.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고 말씀하신 주님, 안식일을 범하시며 약자를 옹호해주신 주님의 가르침에는 재갈이 물렸다. 어떤 방법으로든 일요일에 마음껏 쉬어도 되는 이들만 복 받은 이로 칭송한다. 일요일도 쉴 수 없는 구조적 문제는 면죄부를 받는다.

교회가 복된 쉼을 지키라고 선포하려면, 주일성수만 강요해서야 되겠는가. 주일성수를 선포한다면, 우리 사회의 행복한 노동을 회복하기 위해 노동해야 한다. 흑암과 공허에 생명의 질서를 만든 창조가 바로 그런 행복한 노동이 아닌가. 우리 이웃의 행복한 노동이 가능하도록 섬기는 노동! 노동을 구원하고 노동자를 구원하는 노동, 참 쉼의 위로를 전하려면 피할 수 없는 참 노동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노동의 원형이고, 주님의 십자가는 노동의 구원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존 데이비드 헤이워드의 「노동자 그리스도 Christ The Worker」는 노동의 구원, 노동자의 구원을 깊이 묵상하게 하는 작품이다.

▲ 존 데이비드 헤이워드 「Christ The Worker」(1965), 목판에 유화

손과 발에 붉은 상처는 십자가에 달린 못자국을 보여준다. 그가 누구인지, 못자국이 보여준다. 도마가 예수님을 알아본 증거, 못자국이다. 기적이나 환상, 소원성취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증명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도마에게서 배워야할 깊은 통찰이다. 그리스도는 기적이나 환상이 아니라 사랑의 상흔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공이나 부요함이 아니라 사랑의 상처를 통해서 드러난다.

못자국이 아니었다면 알아볼 수 있었을까? 낯설기 그지없다. 검은 색에 가까운 잿빛 옷에 흰 앞치마를 두른 청년이라. 수많은 작품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모습인가? 보통 빛나는 흰색 옷을 입고 있다. 노동자의 삶과 거리가 먼 옷이다. 게다가 슬픔과 온유함이 풍겨나는 여리고 가냘픈 모습, 그 전형적인 예수님과는 거리가 멀다. 존 데이비드 헤이워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렸다. 팔뚝에는 근육질의 선이 분명하고, 굵은 목선과 치켜선 눈썹 선은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턱수염도 없다. 권위를 상징하는 수염 대신에 노동으로 다져진 근육을 보여준다. 강인한 노동자의 체취가 풍긴다. 목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모습에서도 노동자의 모습 그대로다.

존 데이비드 헤이워드(John David Hayward, 1929~2007)는 영국 런던 남부 투팅 출신의 스테인드글라스 작가다. 그는 유리공예뿐만 아니라 벽화, 조각, 회화 작품도 남겼다. ‘노동자 그리스도’(Christ The Worker)는 랭카셔의 노동자를 기리는 뜻을 담고 있는데, 랭카셔의 블랙번대성당(Blackburn Cathedral) 서쪽 문 위에 있는 조각과 이 회화작품, 두 작품이 있다. 이 그림은 목판 십자가에 유화로 그려 사우스워크(Southwark)의 교구수련센터 채플 안쪽에 걸었다(최정선,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산책 (23) 존 데이비드 헤이워드와 ‘노동자 그리스도’] 참고).

▲ 사우스워크 서품수련센터 채플 ⓒ최정선,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산책』 (23) “존 데이비드 헤이워드와 ‘노동자 그리스도’”

‘노동자 그리스도’의 첫 인상은 낯섦이다. 그리스도를 노동자로 표현한 작품은 접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미술사 지식이 부족한 탓일 뿐인가? 교회가 그간 노동자인 그리스도에 관심이 적었던 탓이 더 크지 않을까? 왜 노동자 그리스도에 관심이 적었을까? 노동에 대한 편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네 교회에서 노동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받은 징벌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일반적이다. 천국에 가면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징벌로 본다. 그러니 이 땅에서도 적게 할수록 더 큰 축복이고, 천국은 일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노동의 구원은 노동의 제거이고, 부활하신 주님은 노동자의 모습일 리가 없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 말씀하시는 장면에서는 그렇게 보이기 쉽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_창세기3:17~19/새번역

이 말씀에서 노동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징벌처럼 보인다. 저주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죽는 날까지 감당해야 하는 수고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저주는 땅에 대한 표현이지 노동은 아니다. 게다가 노동은 범죄 이전에도 에덴 동산에 존재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_창세기 2:15/개역개정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어 에덴 동산에 살게 하실 때, 경작하며 지키는 노동을 선사해 주신다. 새번역에서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고 옮기듯이 이 때 경작은 단순히 생산을 위한 노동은 아니다. 보살피고 돌보는 노동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여 조화로운 생명을 누리게 하신 노동에 인간을 참여하게 하신 초대다. 그러므로 노동에 징벌의 무게가 더해졌을 수는 있지만, 노동 자체는 창조 세계 안에 이미 존재한 축복이다.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 구원하시고 치유하고 회복하신다면, 노동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하나님 완성해 나가고 계시다면, 노동이 어찌 제외되겠는가. 노동은 일상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노동을 뺀 구원, 노동을 뺀 하나님 나라라면, 구원의 삶 속에 구멍이 너무 크다. 노동의 구원이 없다면, 구원의 삶은 너무나 무기력하다.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예배하고, 어떻게 전도할지는 그리도 강조하건만, 어떻게 일할지는 교회에서 얼마나 가르치던가? 노동이 없는 구원에 경도되어 노동의 구원을 상실했다. 노동을 통한 구원, 노동을 통한 기도와 예배와 사랑을 잃어버렸다. 교회의 복음이, 가르침이, 신앙의 삶이 너무 무기력한 이유가 아닐까.

존 데이비드 헤이워드의 「노동자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한다고 상상해본다. 노동자로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노동의 삶 속에 함께 일하시는 주님을 만난다. 기도와 예배가 끝나면, 일터로 함께 가시는 주님을 만난다. 노동을 통한 구원, 그 길을 참구하고 궁리하며 실천하지 않겠는가. 노동의 기회, 노동의 가치, 노동의 행복을 빼앗긴 이들과 함께 못 박히시는 주님을 잊을 수 없다. 손과 발에 박히는 굳은 살, 마디마디에 박힌 못이 십자가의 못으로 보일 것이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하는 노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고 살리는 사랑이 담긴 노동으로 구원받기 때문이다.

노동자 그리스도를 바라보노라면, 피할 수 없는 화두를 만난다. 어떻게 해야 노동을, 노동자를 구원할까? 노동을 통한 노동의 구원은 어떻게 일하는 삶인가? 이 물음이 일상 속 깊이 스며든다. 수많은 길이 다양한 차원에서 열려야 하는 화두임에 틀림없다. 사회구조, 경제구조에서부터 개인 내면의 차원까지 복합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렇게만 보면, 자칫 너무 난해하고 거대한 과제로 보여 부담스러울 수 있다. 개인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당장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월터 취제크 신부(Walter J. Ciszek, 1904~1984)의 경험과 삶은 이 물음에 하나의 길을 보여준다. 깊은 통찰을 담은 길을.

예수회 신부인 월터 취제크는 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40년에 러시아 선교를 위해 소련에 들어갔다가 체포된다. 루비안카 독방 감옥에서 5년간 취조를 받고, 소련 강제노동수용소에서 15년간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석방된 뒤에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제한된 지역에 갇혀 감시를 받는다.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 생활은 말 그대로 지옥 같은 삶이다. 극지방에 가까운 추위 속에서 위험천만한 일에 굶주림까지 살아남는 것 자체가 기적인 곳이다. 그곳에서 월터 취제크 신부는 처절한 강제노동을 예배로 기도로 삼는 길을 전했다.

강제노동을 예배로, 기도로 삼는 길은 본인뿐 아니라 동료 수감자들에게도 특별한 일이자 절박한 일이었다. 강제수용소의 수감자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보람도, 기쁨도 없었다. 공산주의 국가, 적국의 사업에 도움이 되는 강제노동이다. 때문에 방해를 하면 했지, 열심히 할 이유가 없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그들이 이뤄낸 사업은 극한의 고통을 이겨낸 놀라운 성취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무의미한 일일 뿐이다. 그저 죽지 않고 살아남으려 했을 뿐이다. 그 상황을 취제크 신부는 이렇게 전한다.

“사람은 무엇인가가 주어지고 거기에 대해 어느 정도 성취감이 있어야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체로서의 자신의 가치와 진가를 감지해 나갈 수 있다. 또 제아무리 딱딱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반복 작업 속에서도 자신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감각을 지켜 나가기 위해 무엇인가를 추구하게 마련이다. 강제수용소의 극심한 체제와 상황 속에서 수인이 만족감을 느끼는 때는 하루를 더 살아냈음을 깨달을 때뿐이다.”_ 월터 취제크, 「나를 이끄시는 분」, 226, 227.

취제크 신부는 이런 무의미의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음식이나 정신력보다 더 필요한 것이 영적 힘이라 믿었다. 그래서 수용소 단위로 피정운동을 조직한다. 피정/retreat은 고요함으로 피한다는 말 뜻 그대로 일상의 분주함에서 물러나 조용히 주님을 향하는 영성훈련이다. 취제크 신부는 묵상할 내용을 준비해서 작업을 위해 수용소를 떠나는 아침 6시에 피정자에게 전했다. 또한 저녁때도 함께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피정에 참여하는 수감자는 일을 하면서 묵상하고 하나님을 봤을 것이다. 그 무의미한 노동을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붙잡았을 것이다. 그렇게 무의미한 노동에 의미가 깃들고, 기도가 되고 예배가 된다.

취제크 신부는 비록 강제노동수용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의 눈을 뜨고 강제노동을 기도와 예배로 삼는다. 구원역사에 동참하는 십자가로 받아들인다. 믿음의 눈을 뜨면 강제노동 속에도 함께 계신 주님이 보인다. 그 일을 자신에게 주신 십자가로 받아들인다. 동료를 사랑하는 십자가로 삼아 주님과 함께 구원의 역사를 이뤄간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전장, 곧 그리스도께서 당신 섭리 안에서 우리를 배치할 가장 적합한 곳은 바로 이곳이다. 우리가 일하고 고난 받다 숨을 거둘 곳도 바로 이곳이다. … 우리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곳, 단지 오늘 죽지 않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하루를 살게 되었다는 데서 자부심과 위안을 느껴야 하는 이곳, 아무 희망도 없어 보이는 이곳, 바로 수용소다. … 실상 평범한 것들과 외관상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도전이다. 예수님의 승리가 완성되려면 바로 그런 것들이 변화되고 구원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암흑의 세력에 대항해 칼을 휘두르는 대전투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피땀 흘리시고 고난당하신 예수님처럼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날마다 그렇게 고난을 겪음으로써 모든 것이 변화되도록 할 때 실현된다.”(「나를 이끄시는 분」, 235,237)

물론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적국의 일을 돕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는가, 주어진 일이 불의하고 부조리해도 하나님 주신 사명으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 반문이 가능하다. 분별이 필요한 측면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노동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준다. 노동을 통해 노동을 구원하는 가능성, 노동을 통해 노동자를 구원하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고통에서 의미를 빼앗길 때가 아닌가. 노동이 그저 생존의 차원으로 짓눌릴 때, 에덴의 행복, 노동의 기쁨은 강탈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노동과 노동자에게 구원이 절실하다. 저주와 징벌인 노동을 에덴의 노동으로 회복해야 한다. 돌보고 사랑하는 에덴의 노동으로. 이는 개인의 내적 저항에 국한되지 않는다. 피정운동처럼 함께 이뤄가는 노동의 구원은 이미 내면의 한계를 벗어난다. 내면과 외면의 선후관계를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어느 쪽이 먼저가 아니라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고, 상황에 따라 우선 요구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함께 노동의 구원을 이뤄가는 내적 저항이라면, 어찌 내면에 갇히겠는가. 경제사회구조의 해방에도 분명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할 때, 무엇을 하느냐는 핑계일 때가 있다. 그 일이 잘 되든 못 되든,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때론 잘 풀리지 않아서 오히려 더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속으로 미소 짓기도 한다. 노동을 통해 기도하고 묵상하고 예배하는 일이 그런 핑계라면 어떨까? 얼마나 결실이 많고 성공적이냐에 갇히지 않는다. 제자리를 맴돌아도 견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반복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그 일이 혹시 무의미해보여도, 그 일을 통해 누군가를 어떻게 사랑할지 궁리한다면 어떨까? 그 일이 “노동을 통해 노동을 구원하는 길”과 이어진다면, 주님과 함께 일할 수 있다. 그러면 무의미한 일, 억지로 떠밀린 일, 생존의 일이 사랑으로 살리는 노동으로 물들 것이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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