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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정신은 어디갔지?종교개혁 정신과 한국교회의 문제 (1)
박충구 교수 | 승인 2019.08.18 03:15
본 칼럼은 평화교회연구소(소장 황인근 목사)가 발행한 글입니다. 게재를 허락해 주신 박충구 교수님과 평화교회연구소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평화연구소에 따르면 향후 12회에 걸쳐 종교개혁 정신과 한국교회의 문제를 살펴보는 글을 게재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난 시점에서 쓰는 이 글의 목적은 한국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저 단순한 신앙인”이 아니라 생각하는 “지성적 신앙인“으로 진화하기를 권하는 데 있습니다.

“신은 어디 있지?” 라고 그가 외쳤다.
“내가 너희에게 말해주지!”
우리가 그를 죽인 거야 – 너희와 내가!
우리가 신의 살해자야!
그런데 우리는 그 일을 어떻게 해냈을까?
우리는 어떻게 저 바다를 모두 들여 마시려 들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저 바다의 수평선까지 지워버릴 지우개를 준 것일까
- 니체, 즐거운 학문

1. 종교개혁과 개신교

근대성(Kueng, 1991: 3-4)(1)은 이성의 합리성을 존중하고 앞세우는 지평에서 형성, 확산되어 왔다. 이성을 경시해왔던 종교에게 있어서 근대성은 매우 쓴물이다.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는 합리적 근거가 없었던 절대 권력이 해체되었고, 사실적 진리를 왜곡하던 허위와 편견들을 과학의 이름으로 극복했으며, 신비의 영역에서 무시간적인 절대 진리를 담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던 종교의 허세를 들추어냈다.

그 결과 지구상 많은 지역에서 전근대적 억압으로부터 일반의 해방이 상대적으로 이루어졌고, 놀라운 과학의 발전은 일면 안전과 효율적인 삶의 새로운 방식을 가져왔다.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허세를 부리며 사회를 재판하고 지배하던 종교는 자기 사회 주류에서 밀려났다. 소위 비이성의 세계에서 이성적인 세계로 그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는 전근대적 세계에서 골조가 형성된 종교의 세계관, 가치, 질서이론, 그리고 자기이해에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 이 도전 앞에서 한국교회는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이 이 글의 주제다.

100년전 종교 개혁 400주년을 기념할 즈음 독일에서는 루터에 대한 상당한 연구와 재평가가 있었다. 이런 연구 분위기를 일러 “루터 르네상스“(Kupisch, 1967)(2)라고 불렀다. 당시 종교 개혁 사상에 힘입은 개신교인들은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개신교가 독일에서 거룩한 독일 개신교 제국(The Holy German Evangelical Empire, 1957-1871)을 형성함으로써 유럽의 근대성을 불러들인 계기를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앞서 트뢸취는 루터의 여러 논제들의 사회학적 결과들을 점검하면서 루터의 사상은 소종파들의 급진적 사상에 비하여 가톨릭 교회의 사상에 보다 가깝다고 평가했다.(Troeltsch, 1960: 513)(3) 루터의 사상에는 전근대적 과거로부터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새로운 점들이 많이 있지만 여전히 중세적인 요소들이 담겨 있다고 본 것이다.

사실 루터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절대권을 부정하면서도 세습된 세속 권력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왼손이라고 지칭하며 그 신적 근원을 정당화했다. 그는 또한 신앙의 근거를 ‘오직 성서로만‘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보다 더욱 성서적인 입장을 가진 소종파 교도들을 억압하고 진멸하려 들었다.

심지어 그는 이교도 터키인들을 개처럼 패 죽이라고 병사들에게 이르며 증오를 부추겼다. 절대 진리 체계를 자랑하던 가톨릭적 구원론을 비판하면서 또 하나의 절대 구원론을 주장하는 모순이 개신교 안에서 유통되었던 것은 진리 그 자체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문제보다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교회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종교 정치적인 동기가 더 깊이 작동했다고 생각된다.

2.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두 관점

하여 종교개혁을 평가하는 데에는 두 가지 관점이 요구된다. 첫째는 중세 교회의 주술적 은총과 제의, 절대적 교권과 성직자 주의, 그리고 타세계적 구원론에 대한 루터의 비판에서 새로운 근대성의 씨앗을 보려는 입장이다. 둘째는 루터의 삶과 사상에서 16세기 이전의 사회이론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다는 관점이다.

▲ 교황 앞에서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마틴 루터 ⓒGetty Image

따라서 종교 개혁 이전에는 가톨릭교회의 타락과 그것을 뒷받침 하고 있었던 전근대성을 비판하고 수정하여 했던 루터, 그리고 루터의 종교 비판과 그의 대안적 사고가 과연 전근대성을 해체하고 근대성을 수용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가 검토되어야 한다. 그리고 종교 개혁을 요구했던 그 논리가 루터로 비롯된 개신교 안에서 실천적으로, 철저하게 상속되었는가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루터의 개혁사상은 우선 그의 인간론에 그 핵심을 두고 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적극적 칭의론(justification)에서 수동적 칭의 사상에로의 전환을 요구했다.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을 교회 안까지 적용했던 그의 인간론은 가톨릭교회의 은총 독점론, 성직자주의, 성례론의 빛을 잃게 만들었다(박충구, 2003: 197-221).(4)

또한 루터는 인간의 하나님과의 교제 가능성을 가톨릭 성직자를 통한 간접적 접근성에서 성직자의 매개가 필요하지 않는, 개인의 직접적 접근성으로 바꾸어 이해했다. 여기서 만인사제직 이론이 나온 셈이다. 만인 사제론은 가톨릭 교회가 모든 신학적 지식과 그 적용의 기준을 성직자의 교도권에 두던 전통을 개신교에서는 성직자 절대우위의 교도권에서 성직자를 포함한 평신도의 합리적 토론능력으로 전환 적용한다는 것은 의미한다. 그러므로 개신교 신앙의 아름다움은 성직자 중심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유에서 빛난다.

루터의 인간론과 은총론은 가톨릭교회의 거룩한 교회론의 근저를 흔들어 놓았다. 루터는 비성서적인 신학적 근거를 비판하기 위하여 성서의 권위와 성서적 근거를 제시했다. 이 점에서 비성서적 신학 논거들을 파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동시에 지나친 성서주의적 권위를 강조하게 되어 종교개혁 이후 정통주의 논쟁과 근본주의 신앙의 모판이 되었다. 합리성을 결여한 문자주의의 유혹에 비지성적으로 빠질 우려가 커진 것이다. 지성적 노력이 병행되지 않을 경우 성서문자주의는 우매한 우신예찬에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은 지상권을 가진 교회의 절대 우위의 사회이론을 버리고, 새로운 관점, 곧 루터의 사회이론이라 할 수 있는 두 왕국설의 기초를 놓았다. 루터의 두왕국설은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오른 손, 정치세력을 하나님의 왼손이라고 치켜세움으로써 사실상 과거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질서신학을 옹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결과는 한편으로는 가톨릭교회의 성직주의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권력을 신의 의지와 섭리의 산물로 지위상승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루터는 타(他)세계 지향적 신앙을 현세적 신앙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성직자에게만 부여하던 소명적 삶을 일반에게도 적용함으로써 세속적 삶의 가치를 승인해주는 한 편, 聖/俗의 이중구조를 타파하고 세속적인 것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기독자의 책임적인 삶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에 이어 그는 정치공동체, 교회공동체, 가족공동체를 가부장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중세 교회가 지향했던바 기독교 사회 공동체를 가부장주의의 틀 안에서 형성하려는 이상을 존속시켰다. 그 결과 개신교는 절대주권을 가진 귀족이 지배하는 지역 국가의 틀 속에서 교회와 국가가 세상을 이중적으로 지배 관할하는 형태의 사회이론을 결과했다.

3. 제후의 노예 종교

이러한 어정쩡한 개혁을 주장한 루터는 급진적인 종말론자였던 토마스 뮨쳐에게 “제후들의 노예”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은 루터가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위로부터의 개혁’을 선택하고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주도한 이들을 진압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데 크게 기인한다(Abusch, 1951: 19; Mueller, 1990: 226).(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윤리를, 그리고 그의 후예인 칼빈은 하나님 주권에 대한 복종의 윤리를 전체주의적인 신학적 사고를 적용하며 가르쳤다(박충구, 2003: 209, 240-242). 가톨릭 교회를 비판할 때의 합리적 이성은 고도의 지성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나, 무지렁이 신도들을 향해서는 종교 권력을 가지고 위압적이고 위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성경공부에서 예정과 정죄의 하나님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졌던 의사 제롬을 모욕적 평가와 더불어 추방한 사건도 있었다.

근대적인 합리적 사유를 운용하는 진보와 발전의 관점에서 본다면 현존하는 질서 속에서 강요되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대한 감사와 고백은 역사 한 가운데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 종교 내•외적인 구조적 악의 현실을 비판하거나 저항할 의지를 약화시키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루터의 사회정치 사상은 민주적이거나 근대적인 것이라 평가받기 어렵다. 정치 경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정당한 평가 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와 복종을 강요하는 종교는 사회 비판적 시야를 제거하고 개인을 향한 은총과 축복의 교설을 베품으로써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은총과 축복을 베푸는 요술방망이(deus ex machina)의 하나님으로 인식되곤 했다. 에른스트 트뢸취의 세 가지 유형론(교회유형, 신비주의 유형, 소종파 유형)의 관점을 적용한다면 루터의 종교 개혁 사상은 여전히 중세 교회를 닮은 교회 타입 유형의 논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힘을 가진 자 편에선 종교,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눈에는 제후들의, 제후들을 위한 종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4. 근대세계 속에서의 종교개혁 사상

에큐메니칼한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신학적 사유의 근대화란 전근대적 사회구조와 맞물려 있었던 신학적 사유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근대적 세계관을 담아낼 수 있는 신학 형성에 그 과제가 있었다. 이러한 과제는 계시 독점주의보다는 이성의 승인, 교회의 권위보다는 세속화, 주술적 신앙보다는 도덕적 신앙을 강조한 신학적 사유를 동원했다. 니체의 신죽음의 사유(Nietsch, 1959: 166)(6), 신죽음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물었던 알타이저의 신죽음의 신학(Gutierrez, 2014: 12)(7),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해하던 신죽음의 시대정신을 극복해 나가기 위하여 전개된 본훼퍼의 세속화신학(8)(Mueller, 1982: 12), 그리고 1960년 대 이후 전개된 문화정치신학, 해방신학은 상당부분 이런 개혁적 과제를 수행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근대성의 요구와 개혁을 수용하려는 노력을 받아들인 실제 기독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기독교는 성서주의적인 종교개혁 사상을 무기삼아 시대를 초월하며 불변하는 기독교 진리의 옹호자를 자처하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수적 성향은 신앙적 실천, 믿음, 확신, 교리, 공동성 등으로 형성된 종교의 굳어진 껍질, 오랜 전통의 하부구조와 맞물린 채 새로운 변화와 개혁의 요구를 적반하장 이단적인 것으로 매도하거나 거부함으로써 근대성의 문맹상태를 초래하고 있다.

그 결과 보수적 신앙을 가진 이들은 종교와 과학, 종교와 정치, 종교와 경제, 종교와 타종교 등과 연관된 주제들을 토론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심지어 두려워한다. 이런 소극적 태도는 두려움과 자신 없음, 혹은 전근대적 종교의 유산에 광신적으로 집착하는 등 여러 부정적인 성향과 맞물려 있다. 가톨릭교회는 1차 바티칸 공의회(1869-70)까지 보수적인 교리체제를 옹호하며 근대성의 요구를 정죄했으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화(Vatican II, 1962-65)을 기점으로 정죄의 태도에서 책임적 대화를 통한 자기 갱신의 길을 열었다. 반면 개신교는 교파의 전통과 속성에 따라, 신학자의 신학적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의 형태를 보이고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보수적 입장이 지배하고 있는 형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시에도 충분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그 근본정신이 비개혁적인 성서주의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다음 글은 하나의 사례로 한국교회의 성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미주

(미주 1) 이 글에서는 근대성이란 전근대성과 근대후기성에 비견할 수 있는 바, 비록 명료한 구분선은 긋기 어려우나 17세기 데카르트 철학과 갈릴레오의 우주론 이전은 전근대, 그 이후를 근대라 구분하고, 근대 정신의 합리성이 그 한계를 드러낸 세계 제 1차 대전(1914-18) 이후를 근대 후기라고 보는 관점을 따라서 한 시대정신의 총화를 의미하거나, 일종의 방법론적 사유 유형을 의미한다. Hans Kueng, Global Responsibility: In Search of a New World Ethic(New York: Cross Road, 1991), 3-4.
(미주 2)  Karl Kupisch, “The Luther Renaissance,”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 No. 4(Oct., 1967): 39-49.
(미주 3)  Ernst Troeltsch, 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Chicago: Chicago UP., 1960), 513.
(미주 4)  박충구, 기독교 윤리사 II(대한기독교서회, 2003).
(미주 5) 아부쉬(Alexander Abusch)는 20세기 나치의 뿌리를 1525년 독일 농민전쟁의 비극적 패배에서 찾았다고 주장하며 뮌쳐를 당대 가장 강력한 혁명가로 사회주의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만들었다. 반면 루터는 독일 농민들을 제후들에게 팔아넘긴 제후들의 하인이었으며 그의 종교는 노예제도를 영구화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비난했다.(Alexander Abusch, Der Irrweg einer Nation: Ein Beitrag zum Verstaendnis deutscher Geschichte (Berlin, 1951), 19이하. Johann Baptist Mueller, “Martin Luther Als Anwalt der Liberalismus?”, Zeitschrift fuer Religions und Geistes Geschichte, Vol. 42, No. 3(1990): 217-228.
(미주 6) Friedrich Nietzsche, Die fröhliche Wissenschaft(München 1959), 166.
(미주 7) Jose L. Gutierrez OSB, “Thomas J.J. Altizer: On the Death of God Theology” Obsculta, Vol.  7(June 2014): 11-27. 
(미주 8) Gerhard Ludwig Mueller, “Tod und Auferstehung Gottes Heute: Zur Ueberwindung des neuzeitlichen Atheistismus in Bonhoeffers Theologie Crucis, Zeitschrift fuer katholosche Theologie, Vol. 14, No. 2(1982): 172-190.

박충구 교수  peacechurch20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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