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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교회와 함께 투쟁전선에 나서다장의균 간첩조작사건으로 고문을 받았다
김정택 목사 | 승인 2019.08.24 17:41

1986년, 나는 산업선교총무직을 박일성 후배에게 이임하고 송현산마루 민중교회를 세웠다. 기독교 민중선교에 변화가 오고 있었다. 현장선교만 추구하던 방향이 현장의 기지, 현장활동의 결과물로서의 민중교회를 건설하자는 운동이 탄생했다.

민중교회들의 탄생

나를 YWCA 사건 주동자로 몰아넣은 종렬이 형은 85년에 인천에 왔다. 여기저기 탐색해보고는 송림동 판자촌을 맘에 들어했다.

“정택아! 그래도 인천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영역인데 내가 송림동에 교회를 세우면 안되겠냐” 하신다. “허허, 형님도 뭐 그런걸 동의까지 받으려고 합니까? 그냥, 하시면 되지.”

형은 송림동에 사랑방 민중교회를 세웠다. 그 다음에 조인영 목사는 송현샘 민중교회를 송현동 산동네에 세웠다. 송현산동네에 꼭대기에는 내가 세운 송현산마루교회, 살짝 밑으로는 송현샘교회, 한동네에 2개 교회가 들어섰다.

인천에서는 상당수의 민중교회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학도로서 노동현장을 체험한 자들이 친분을 맺은 노동자, 지역주민들과 함께 노동과 지역현장과 밀착된 기지로서의 교회를 만들어 간 것이다.

여기저기 교회 모습들이 나타나더니 이제는 연합체로서 지역마다 연합체들이 건설되었다. 인천에서는 인천지역민중교회운동연합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천은 이원돈 목사의 예장민중교회, 윤인성목사의 감리교민중교회 2개 뿐이어서 인천에 합류하였다.

교회활용론과 교회세력화론

민중교회 숫자들이 많아지고 각기 나름대로 열심히 하다보니 나름대로 견해가 생기고 다른 입장들이 노정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교회활용론과 교회세력화론이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이 견해와 입장은 보통의 견해와 입장 형성과는 달랐다.

보통의 견해와 입장은 개인이나 조직이 성숙하고 성장하면서 꼴을 갖추어 간다고 하면 민중교회 경우는 상대에 대한 문제제기를 끝까지 하다보니 갖추어진 모습이다. 개별교회들을 살펴보면 교회활용론에 서 있는 교회나 교회세력화론에 서 있는 교회는 없다. 약간씩의 차이들은 다 있겠지만 모든 민중교회들이 엄혹한 현실속에서 현장활동가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그러면서도 교회도 책임있게 관리되고 운영되기를 바랬다.

그러다보니 현장활동 지원에 보다 방점을 찍게되면 현장활용론으로 기울었다고 하고 교회운영에 방점을 찍게 되면 교회세력화론 으로 기울었다고 평가되어진 것뿐이다. 참 균형이라는 것, 중용이라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민중교회들은  87년 6월민주항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드디어 87년

87년 1월에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조사중,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이후로 2월은 박종철군 범국민 추모식, 3월에는 고문추방 대행진 등으로 많은 도시에서 시민들의 대규모 거리시위가 이어졌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더욱 강력한 탄압을 예고하는 조치로 4월13일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 1987년 5월 인천항쟁 모습.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전두환 살인정권은 평화적인 정부이양과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소모적인 개헌논의를 중단시키고 기존의 헌법을 지키겠다고 하였다. 호헌의 입장을 강력하게 천명한 것이다. 여당 민주정의당은 대회를 통하여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그러자 민주진영은 5월27일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마침내 6월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 집회는 전국 22개 지역에서 개최되었고 50만명의 시민이 참여하였다. 서울에서는 대회가 하루집회로 끝나지 않고 명동성당에서의 농성으로 이어졌다.

농성장에 시민들이 모여들면서 농성은 한층 강력해졌고  전국적으로 시위열기를 고양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인천에서는 10일 오후 부평역으로  모든 민주화세력들이 집결하기로 하였다. 인천민중교회운동연합을 중심으로한 개신교는 부평시장에서부터 부평역까지 나무로 만든 대형십자가를 민중교회목회자들이 들러 메고 앞장서서 행진하였다.

길거리의 일반 시민들이 박수를 친다. 이 얼마나 기다렸던 박수인가! 운동진영과 일반시민의 구분이 사라지는 순간을 목도하는 이 기쁨! 경찰이 막으면 어떻고 곤봉세례를 받으면 어떠하냐! 다들 의기충천하여 걸었다.

부평역에서 집회를 끝내고 행진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저녁시간, 퇴근시간이라 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노동자들은 박수도 치고 행진대열에도 합류하였다.

이미 경찰이 막을 수 있는 한계는 멀지감치 벗어나 버렸다. 전국이 다 같았을 것이다. 이 엄청난 열기를 모아 26일에는 국민평화대행진이 전국  모든 도시·농촌에서 140여만명이 참여하는 엄청난 폭발력이 있는 국민대행진으로 나아갔다.

정의균 간접조작사건으로 체포되다

▲ 2016년 말 전남 진도군 진도읍에 ‘옥주서당’을 낸 장의균(61)씨. 1987년 7월 ‘간첩 혐의’로 체포돼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장씨는 2000년 재조사를 받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는 이유로 정부가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바로 이 국민대행진 다음날인가? 송현산마루교회 근처에 시커먼 세단차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떡대가 좋으면서도 그럴싸하게 생긴 3사람이 나를 좀 보자고 한다. 아이를 밴 아내가 충격을 받지않도록 나는 “그러면 저 밑에 다방에 가서 얘기합시다.” 하고는 재빨리 데리고 나왔다.

나와서 차있는 데로 오자 그들은 나를 태우고 어디론가 가는데 나의 눈을 가리기 위해 검은 천으로 눈을 동여 메었다. 차가 1시간은 달렸을까? 그들은 나를 끌어내리더니 어떤 건물 안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검은 천을 풀었다. 풀자마자 그들은 “이 간첩 새끼가 어디서 까불어 하며” 주먹질, 발길질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 니들 때려봐라, 그런 정도의 고문으로는 겁먹을 내가 아니다.”고 그 즉시 나를 무장시켰다. 역시 김정택은 경험자였다.

그들은 그리고나서는 “장의균이가 다불었어, 너를 포섭했다고.” 나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너희들이 고분고분해지기까지는 나는 말안 한다. 어디한번 죽여봐라.” 하는 심정으로 담대하게 버텼다. 그들은 고문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이번에는 거부하기 힘든 사실들을 털어 놓는다.

“우리가 장의균과 너가 만나는 걸 얼마나 미행했는지 알어? 부평역앞 포장마차에서 의균이랑 술 마시면서 한 얘기도 다 알어. 그러니 버텨봐야 소용없어. 좋게 말할 때 다 불어. 너가 준 성명서들이 북에 다 전달됐단 말이야.”

쪼금은 찔끔했다. “이 녀석들이 오래 전부터 의균이를 간첩단으로 써 먹으려고 준비했구나. 제정구도 잡혀왔다고 그러고. 완전 장의균 간첩단 사건으로 얽어 국민운동본부를 와해시키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기는 내가 불안해지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의균이 하고는 같이 인천에 살게 되어서 자주 만났고 전철도 자주 탔다. 전철에서도 의균이는 일본 유학가서 겪은 이야기들을 내게 해주곤 했다.

의균이는 일본 친구들에게 김일성은 가짜라고 했다. 친구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김일성이 진짜라고 의균이에게 가르쳐 준 모양이다. 의균이는 그래서 조총련학교도 가봤다.

원래 잠실에서 넝마주이, 구두딱이 대빵을 해서 깡다구는 인정해 줄만 했다. 나는 전철에서 조그마하게 말하라고도 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아슬아슬함을 느꼈다. 간첩같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지만 우리나라 폭압정치상황 인식에는 둔감하구나하는 느낌은 받았다. 그러니 그들이 미행한 결과나 여러가지 그럴듯한 정보들을 내어놓았을 때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배짱을 부릴 때는 확실하게 부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의균이를 대면시켜달라. 그 녀석이 고문으로 거짓말을 하는 모양인데 직접 대면시키면 되지 않겠느냐”고 막무가네로 나아갔다. 그들은 결국은 대질을 못시킨 것인지, 안 시킨 것인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그곳에서 의균이를 만나지는 못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그들은 나를 풀어주었다. 나는 거기가 송파라는 것은 알았다. TV에서는 노태우의 6.29선언이 발표되고 있었다.

아하, 전두환정권이 강경책을 버리고 유화정책으로 돌아섰구나 깨달아졌다. 그래서 내가 간첩단사건으로 연루되어 구속되지 않고 풀려났구나. 대중의 힘이 나를 살렸구나. 고마웠다. 그래서 국민운동본부 간부들을 일망타진할, 모든 일간지에 대서특필될 장의균간첩단 사건은 장의균 혼자만의 간첩사건으로 그냥 뭉게져서 조용히 지나갔다.

김정택 목사  kjt94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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