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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을 때”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8.29 03:40
¹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²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³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⁴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⁵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⁶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⁷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⁸ 그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마태복음 17:1~8/새번역)

모세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 세 명을 데리고 시내산에 오른 장면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을 오르십니다. 그곳에서 성서학자들이 율법과 예언의 대표로 해석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십니다. 베드로는 그 황홀한 신비 속에서 살고 싶다며, 초막 셋을 지어 모시겠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할 길은 까맣게 잊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신비를 경험하게 하셨을까요? 자기를 버리고/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두려운 부르심 이후에 주신 위로였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의도를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기적도, 환상도, 치유도 그러므로 하나의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의 방향을 분명하게 가리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표지판 옆에 집을 짓겠다는 것입니다. 그 표지판과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초막입니다.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 집입니까. 교리, 예배 형식, 영성 프로그램, 설교와 찬양…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황홀한 감격을 붙잡고 그것에만 안주하려는 또 다른 초막들은 아닙니까. 자기를 부인하고/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미루려는 초막이 아닙니까.

▲ 작자미상, 「Francesco」

토마스 키팅 신부님이 기도 중에 신비한 체험을 하면 어떻게 할지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대략 이런 식의 대화로 기억합니다. “향심기도 중에 주님께서 안아주시는 체험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 답하길, “그 체험을 붙잡지 말고 다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세요.” 거룩한 단어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향하겠다는 지향성의 표시입니다. 기도 중에 어떤 황홀한 체험을 해도 그것에 매달리지 않으려는 뜻입니다. 어떤 신비한 체험도 하나님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그 무엇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는 중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평안, 기쁨, 황홀, 감격… 하나님으로 인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 자체에 집착하여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을 원하기보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평안, 기쁨, 황홀, 감격이 없어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특별한 체험에 붙들리면, 불안, 슬픔, 역겨움, 메마름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깊이를 상실하게 됩니다.

심리학자들,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무엇을 경험하든 결국 일상적 감정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큰 행복을 느껴도, 큰 슬픔을 느껴도 결국 자신이 일상에서 경험하던 마음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일상이 불평과 불안으로 가득했다면, 큰 행복도 결국 그리로 돌아가고, 일상이 평온과 사랑이었다면, 큰 슬픔도 결국 그리로 돌아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의 마음자리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도, 큰 황홀경을 경험하고 그곳에 머물렀으면 합니다. 그러나 빛나는 구름에 뒤덮이고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감격과 신비였다고 해도 결국은 사라집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곤 합니다. 바로 그때가 중요합니다. 바로 그때 주님 밖에 아무도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주님 아닌 다른 무엇, 주님으로 인한 감격을 더 바랐다면, 낙심과 허무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가장 바랐다면, 아쉬워도 안심하며 함께 나아갈 것입니다.

사실 절박하고 결정적인 순간들마다 결국 주님밖에 없지 않습니까. 바로 그때 안심하며 함께 나아갈 중심이 필요하다면, 지금입니다. 바로 지금 주님을 향한 마음의 길을 내고 또 내야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내고 또 내야합니다. 걷고 또 걷는 곳으로 길이 납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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