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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규 목사님은 시대의 멋쟁이박형규 목사님 추모일에 즈음하여
이해학 원로목사(주민교회) | 승인 2019.08.31 18:07

멋쟁이 목사님을 여위고 해를 거듭합니다. 목사님의 춤사위가 눈에 선합니다. 권번에서까지 배운 춤사위가 아닌 흥에 겨워 추는 자연스런 춤이기에 멋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멋은 큰 웃음이셨습니다. 히쭉 웃으시는 웃음 때문에 조사받을 때마다 왜 비웃냐고 실갱이도 하셨다지만 목사님은 낄낄낄 비실비실 하하하 웃으시는 모습은 감옥을 들고 나면서도 웃음을 꽃피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것은 목사님을 두고 하신 말씀 같습니다. 웃음도 잃고 멋도 상실한 사람들이 더 아귀다툼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며 더 목사님의 멋이 그립습니다.

저는 수유리 화계사 밑 한신대 앞에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두 어린 딸과 식품점을 하고 있을 때 권호경 목사 명에 의해 김동완을 보내 “박형규 목사님이 너를 부르신다.” 한마디가 나의 운명을 가름하였습니다. 71년 대통령 위수령으로 인해 한신대에서 데모 주동자로 강제제적 된 사이에 저를 나꾸어 채서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 실무자로 불러주셨습니다. 저를 민중항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광주단지에 파송해 주시고 <지역사회의학 병원을 만들어라> 미션을 주셨으나 저는 그 미션을 이룰 상항이 아니기에  교회에 대한 희망과 열정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박 목사님은 75년 3월 1일 성남주민교회 설립예배설교를 출발로 마지막 2012년 헌당 예배까지 축복해 주셨습니다. 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가 발동되었을 때 서울제일교회 사무실에 모인 스텝 미팅에서 “수도권선교위는  긴급조치하에서 더 이상 빈민조직을 할 수 없으니 독재정권과 투쟁하는 방향으로 선교방향을 돌린다.”고 결정하였습니다.

문제는 저에게 긴급조치 투쟁의 임무를 맡겨 주시었기에 내가 김진홍·인명진·김경락·이규상·박윤수를 끌고 감옥문을 열었던 것은 긴급조치 발표후 최초의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몇 번의 수형생활이나 모든 사회활동은 거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도 아니신 목사님은 제 운명의 대부분의 문을 결정해주셨습니다. 마지막 분당에서 저에게 국선도를 지도해주셨으니 목사님은 알파와 오메가로 제게 선생님 이십니다.

박 목사님께서 서울제일교회에 계실 때 끌림의 자력이 있는 듯 목마른 청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창식·황인성·이미경·황인하·박세현·김경남·박기상·주창환·정광서·정인숙·강영원·정창균·주재서·최규덕·한승호·장경우·임상태·이창호·김왕태·김지윤·김희연·박명희·백승연·조중래·차옥숭·원정연·정인숙·윤후덕·윤관덕·박원표·우진애·나병식·김순진·지혜원·유일상·한광희·이미자·오정균·조규호·송미석·정태호·정계순·구창환·양주서·신철용·김은헤·손학규·이윤영 등 어찌 다 열거하리오.

그중에는 서로 짝을지어 가정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지금 우리 시대의 변화의 지도자로 전문가로 곳곳에서 사회를 개혁하는 소금으로 살고 있으며 목사님의 『길 위의 신앙』은 큰 호수를 넘쳐 세계로 뻗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한적이 있습니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학생들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이런 분위기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뭔가 몸부림치겠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누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학생들 꽁무니를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서대문구치소에 앉아 있게 되더군요. 나를 두고 배후 조종이라 운운하지만, 사실 나는 순진하게도 학생들 꾐에 빠진 꼴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님의 여섯 번의 구속이 목사님의 직접·기획하고 주동한 것이 있습니까? 거의 모든 것이 몰려온 젊은이들이 “지금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주장하면 거기에 공감하고 지원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목사님의 리더십의 성격이 나옵니다. 약자와 젊은이에게 공감하는 리더쉽, 정의로운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바보짓이 목사님 이십니다. 주변에서 계산좀하라고 말려도 다시 같은 사건이 반복되는 분이 목사님이었습다.

▲ 주민교회 설립예배에 참석해 말씀을 전하시는 박형규 목사 ⓒ주민교회 제공

‘국가내란예비음모’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이 붙은 73년 첫 번째 구속사건은 무엇입니까? 남산야외음악당에서 부활절에 박정희와 군사 쿠데타 주역인 보안사령관 윤필용 장군이 구속되었다고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철옹성같은 군부체제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을 희망의 메시지로 알리자는 대학생들의 제안에 준비를 지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들통 나지 않았지만 불교 초파일 행진에서도 삐라를 뿌렸고 실패하였지만 빌리 그래함 여의도 집회도 철조망을 끊는 작전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 시대에 박형규 목사님은 모든 사건의 중심이셨습니다. 매일 경찰서와 정보부의 첫 번째 보고 대책 거리이고 늘 정보원이 따르고 감시의 대상이 된 것은 우리시대의 독립군이며 한국변혁운동사의 축이였습니다. 신문 방송을 도배 하는 긴장에 긴장이 이어지는 태풍의 눈 복판에서 웃으시는 웃음은 시대를 가르는 큰 웃음입니다.

박형규 목사님께서 책임 맡으신 기독학생운동 기독교방송 등 많은 일들이 있지만 본격적 무게를 실은 변혁운동은 72년 서울제일교회 목회시절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Korea Metroporitan Community Organization; KMCO)를 조직하고 훈련하고 파송하여 우리나라 사회개혁의 전위대 역할을 한 것 입니다.

전위대란 소수여도 훈련되고 방어와 공격의 달인들이고 필수무기로 무장하고 목표가 뚜렷한 행동대여야 합니다. 그러나 나 이해학을 포함해서 권호경·이규상·모갑경·김혜경·전용환·김동완·최종진·허병섭·이철용·신동국·오용식 등 초기 멤버는 후에 김경남이나 수배되어 피신 차 들어온 손학규를 제외하면 모범생과는 먼 제자들이었습니다. 훈련 매뉴얼도 없었습니다. 청계천을 거닐며 오재식 선생의 미국에서 소외된 흑인빈민을 조직한 알렌스키(Saul D. Alinsky) 이야기는 빈민선교를 하는 우리에게 감동적 영감과 실천의 방향타를 제시해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로 19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부적같이 품고 “민중을 두발 앞서가지 말라” 하는 지침밖에 받은 것이 없습니다.

제도권에 이용당하고 자기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들과 함께하는 <현장성> 만이 강조되었습니다. 민중을 조직하여 의식화시켜 자기가 세상의 중심임을 깨닫게 하고 자신의 주변을 변화시키는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민중혁명을 꿈꾸었습니다. 공산주의 기초도 터득하지 못한 우리는 후에 정보부 조사를 받으며 이것이 공산주의 이론이라고 강요받고 우리는 에수님의 핵심 메시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청계천에 아지트를 틀고 늘 모여 스텝 미팅도하고 스터디도 하였습니다. 주요활동으로 천계천 어린이 조사 활동을 통해서 부모들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불안은 언제 이 청계천 복음자리가 뜯길지 모르는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실제 다른데 불량주택 철거방법으로 불을 지르는 경향이 자주 있어 이들과 화제 대책방안을 토론하였습니다. 밤중에 화재발생시 줄을 흔들어 서로를 깨우기 위해 모든 집들에 줄을 연결하고 깡통을 달았습니다. 집집마다 양동이에 물을 담아놓고 우선 가까운 데서부터 손쉽게 진압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 자를 정해서 소방연습을 합니다. 온 청계천에 깡통 흔드는 소리가 메아리치고 이들은 축제같이 재미있어 했습니다.

제도권에 이용당하고 자기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들과 함께하는 <현장성> 만이 강조되었습니다. 혼자의 개체로는 할 수 없기에 민중을 조직하여 의식화시키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나는 사랑받는 자녀이다. 내가 운명을 선택하는 주인이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 나는 나 자신의 주변을 정의로운 세상으로 변화시켜 축복을 체험한다. 이것이 땅에서 맛보는 우리의 하나님 나라이다.

수도권은 무모하게도 이런 깨달음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민중혁명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갈릴리의 예수 패거리 같은 청계천 아지트가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을 변화시키는 둥지 역할을 할줄을 아는사람은 자신들도 몰랐습니다. 다윗의 <아둘람> 같은 곳입니다.

▲ 이해학 에큐메니안 대표 ⓒ이정훈

73년에 성남에 파송된 내게 주어진 첫 미션은 지역사회의학(COMMUNITY MEDICINE)을 실현할 병원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권호경 목사님이 이미 받아놓은 병원설림 주민요청을 기반으로 성남지역사회의학병원설립위원회가 설립되고 장기려·박형규·김일손·시빌리 교수 등으로 구성하여 병원 건축비 모금을 하였으며 WCC책임자가 현장조사하고 병원 기자재를 지원키로 약속을 받은 상태에서 내가 병원부지확보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변 병원들의 반대와 저에대한 경찰들의 음해 속에서 독재의 구조가 우리에게 병원부지를 허락할 리가 없습니다. 저는 이일을 해내지 못한 자괴감을 안고 삽니다.

문동환 박사는 청계천 우리 아지트에 와서 함께 밤길을 걷고 포장마차에서 간식도 먹으며 브라질의 억눌린 자의 교육을 제창한 파울로 프리에리(Paulo Preire)의 『페다고지(Pedagogy)』를 최초로 소개하며 민중교육론을 강조할 때 우리의 충격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운동사적으로 볼 때에 한국교회는 불행 중 다행으로 7, 80년대에 중심을 잡는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당시 기독교회협의회 총무인 김관석 목사이고, 다른 하나는 수도권선교위를 끌어가는 박형규 목사인데 김관석 목사 참모 역을 당시 기장총무인 김상근 목사이고 박형규 목사 참모는 권호경 목사입니다. 박 목사님은 권호경이라는 책사를 훈련시키는데  무리해서  필리핀 조토지역 훈련을 하는등 공에 공을 들였습니다.

김관석과 박형규, 김상근과 권호경 성격적으로나 삶의 자세가 너무 달랐습니다. 김상근은 기장과 NCCK라는 제도권 안에서 조직적인 힘으로 밖을 향해 뻗어가려 했다면 권호경은 교회 밖에서 기독교를 향해 공격하는 노마드적 역동성이 있어 달랐습니다. 때로는 김상근의 <합리성과> 권호경의 <역동성>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지만 협력하게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인 것은 네 분 다 김재준의 영적맥락 안에서 전환기의 사명을 공유하였기에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서 만일 이분들이 갈등하고 경쟁하였더라면 한국기독운동은 한국변혁운동사의 축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이외에 서남동 한태동 현영학 김찬국 이우재 박현채 송건호 등 많은 선생들을 새벽부터 뫼시고 섭렵할 수 있었습니다.

권호경 목사는 마피아 두목 같이 다양한 관계망을 전방위로 활용하였습니다. 나는 권호경 총무의 심부름으로 당시 초동교회 조향록 목사에게 일본 아사히신문 보따리를 여러 차레 전달 한 적이 있습니다. 전주 남문교회 은명기 목사를 감옥으로 뫼신 것도 우연은 아니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천주교정의평화사제단 김승훈 신부와 만남을 주선하는데 전화가 도청을 피하는 방법으로 내가 직접 메신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해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1982년 3월 18일 일어나고 문부식·김은숙의 구속재판에 따른 교회사회선교협의회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에 대한 우리의 견해” 성명서에 천주교사제단이 함께 동참하였습니다.(1983년 4월15일) 아마도 1975년 3월1일 민주구국선언문 사건 이후 처음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벌컥 뒤집어진 듯 난리가 났습니다.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을 계기로 한미불평등관계를 재평가해야한다는 성명서의 파장은 너무도 컸습니다. 나도 이름석자 올린 것 때문에 밤중에 오는 살벌한 협박전화, 군인들이 보낸 온 가족을 도륙하겠노라는 편지를 수 없이 받았습니다. 내가 사는 성남시에서는 “빈미주의자 이해학을 성남시에서 추방하여라”는 문구가 적힌 어깨띠를 한 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등 우익보수들이 행진하고 등교시간에 전단을 살포하였습니다.

권호경은 가끔 정권이 바뀌고 통일이 되어도 다 이해될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하였고 실제 비밀스러운 서류뭉텅이를 자기 집 부근 땅에 깊이 묻고 오랜 후에 가보았더니 이미 집터가 되어버렸다고 아쉬워 하였습니다. 그만큼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인 하나님나라의 일은 상식의 경계를 넘어서 오는 것 인가?

목사님 재판준비 때문에 만들어진 목요기도회가 반체제 인사들의 집합장소요 언로의 진원지로 발전된 것입니다. 기독교회관 목요기도회. 70년대 모든 구속자 가족들의 마른 목을 축이고 국가폭력의 횡포에 짓눌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숨을 쉬고 민주주의의 공감대를 확산하였습니다. 김윤 어머니 김한림 여사를 비롯하여 조정하 사모, 김지하 어머니, 서경석 어머니, 공덕귀 여사, 이해학 색씨 김영자, 인혁당 부인들은 이곳이 유일한 위로의 장소요 힐링센터였습니다.

때로는 문정현 신부를 비롯하여 외국에서 온 손님들도 꼭 들려야하는 명물이 되었습니다. 서남동 목사님은 철거민의 투쟁현장을 포함하여 이곳을 본회퍼가 말한 제 3의 성령현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실제 우리는 여기에서 국가폭력으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뜨거운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회복하는 힐링을 체험하였습니다.

종로5가는 해직교수들의 일자리 창출 센터역과 해직기자들의 아지트로, 아예 성유보는 책상을 우리 사무실에 넣고 살았습니다. 환경운동의 모태가 되고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지원하면서 빈민들의 투쟁현장을 여전히 지원하였습니다.

박 목사님은 정보기관의 공작으로 교인을 분열시키고 교회당을 빼앗기고 거리에서 예배를 드리기를 7년. 덕분에 우리는 여름에 햇빛과 겨울에 찬바람의 맛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의 행진을 우리는 슬프고 비참하게 견디는 것이 아니고 길위에서 춤추며 행진하시는 목사님 모습에서 새로운 힘까지 느끼며 걸었습니다. 어둠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목사님의 멋진 삶이 우리 모두를 멋진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멋진 박형규 목사님 춤추며 평화통일의 길을 우리 앞에서 가십시오.

이해학 원로목사(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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