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시대를 뛰어넘는 천국의 원리모두 한 데나리온씩(마 20:9-1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9.01 17:15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천국은 마치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20장 1절은 마태복음에 자주 나타나는 ‘천국은 마치’로 시작합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

저희는 이미 뒤의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큰 효과를 주지 못합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신경이 ‘집주인’에 맞춰지도록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집주인의 행동이 천국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처음 나간 시간은 나와 있지 않지만, 뒤에 나오는 시간의 배열로 보아, 아침 6시에 처음으로 일꾼들을 들여오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어쩌면 전날 미리 일꾼들을 모아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은 오전 6시에 일하러 온 사람들 다음으로 9시에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렀고, 12시, 오후 3시에도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일을 마치기 한 시간 전인 오후 5시에 불러들인 사람들입니다.

주인은 총 다섯 번에 걸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모든 사람들, 9시간 일한 사람이나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줍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의 평균적인 일당이었다고 합니다. 바꿔 말하면 한 데나리온이 있으면 일한 사람과 그의 가족이 그 날 하루는 굶주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 포도원 품꾼들 ⓒGetty Image

주인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먼저 온 사람들은 반발합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아마도 아침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불려온 사람들 전체를 뜻한다고 봅니다. 오후 3시에 온 사람들도 세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후 5시에 온 사람들보다는 길게 일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주인에게 따집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봐도 이들의 반발은 당연합니다. 많게는 8시간, 적게는 2시간을 더 일한 사람이 적게 일한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는 점은 자본주의 시장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상식에 어긋난, 거의 갑질에 가까운 폭언을 해버립니다.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우리의 계약 사항에서 일당은 한 데나리온으로 정해져 있었다. 너희들은 왜 계약 사항에 불만을 가지고 따지는거냐? 나는 계약을 어긴 바도 없고 내 돈으로 내 맘대로 주겠다는데 너희가 왜 나한테 뭐라고 하는거냐?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고 소작농에 대한 지주의 갑질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문을 가져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의 마지막 말입니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은 자신이 선하다고 말합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천국을 의미한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천국을 의미하기에 악할 수가 없습니다. 주인의 행동은 분명 선한 행동입니다. 이는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도 의아할 수밖에 없는 말씀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악한 세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 이상, 주인의 태도는 선한 행동이라는 기본 전제를 가지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이 뒤에 붙여진 16절의 말씀,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교회가 예수님의 많은 말씀들 중에서 앞의 비유와 연관성 있어 보이는 말씀을 해설처럼 덧붙여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연결시켜서 생각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16절 말씀이 붙어버리면 오늘의 비유 자체가 가진 의미가 완전히 바뀌어 버리기 때문에 마태복음을 기록한 교회의 생각은 우선 뒤로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자체만 생각했으면 합니다.

현실적 천국

많은 주석서들을 보면, ‘천국’이라는 개념을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 ‘죽어서 갈 나라’ 라는 의미로 해석했기에 오늘의 비유를 ‘은혜’와 연결시켜서 해석합니다. 주석서들이 16절의 말씀을 떼고 예수님의 비유만 해석하는 경우에도 대부분 은혜에 관련된 이야기로 결론을 맺습니다. 나중에 온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천국은 정말로 그런 천국이었을까요? 이 땅에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시진 않았을까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했을 때, 오늘의 비유는 모두가 똑같은 일당을 받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신체 건강하고 빠질게 없어서 처음부터 농사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던 사람이나, 뭔가 부족해서 다른 지주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나 하루가 다 가도록 어떤 사람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동일한 임금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은 임금은 그들의 가족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만큼의 임금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은 출애굽기 16장에 나타난 만나 이야기가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이들이 만나를 수확하는 데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당 한 오멜, 약 2리터씩만을 수확할 수 있었고, 다음 날까지 만나를 남겨둘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17-18절을 보면, 사람들이 거둔 것이 적기도 하고 많기도 했으나 각 사람이 먹을 만큼 거두었다고 합니다. 즉 식구가 많은 사람은 식구 수에 따라 많이 거두었고 수가 적은 사람은 적게 거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음 날까지 만나를 남겨두었습니다. ‘내일은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 때문인지, 만나를 쌓아 사유 재산을 늘리려고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이들은 남들보다 더 수고를 들여서 가정에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만나를 모았고 이를 아침까지 남겨둡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만나가 썩어버려 벌레가 꼬이고 냄새가 났다는 이야기로 맺어집니다.

만나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이건 하루 풍족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려는 모습, 더 많이 얻으려고 하는 모습을 경계하십니다.

민수기 26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두 번째 인구조사가 나오는데, 이 인구조사의 이유는 땅을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람 수에 따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강한 지파, 더 많이 활약한 지파 순서가 아니라 사람 수에 따라 땅을 분배했습니다. 한 가정에 필요한 만큼의, 자신이 경작하며 살아갈 만큼의 땅을 허용하셨고, 레위기에서는 이 땅에 대한 매매를 금지하십니다. 땅은 희년에는 모두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임대의 개념으로만 거래가 가능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은 땅에서 하루하루 먹으며 불안함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구약이 말하는 천국입니다. 물론 구약에는 천국이라는 개념 자체도 없지만, 연결시켜보자면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세상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오늘 비유는 구약의 이런 사상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땅을 받았어도 일할 수 없는 사람들, 만나가 떨어져 있어도 가정을 대표해서 수확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런 사람들이 오후 5시까지 일하지 못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임금이 허락된 곳이 천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과 지금의 사회

왜 교회는 오늘의 비유를 현실의 문제가 아닌 현실 밖에 있는 세상, 이상적인 세상에서 이루어질 은혜의 사건으로 설명해왔을까요? 농경사회 이래로 굳어져 있는 체계에 반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들도 머리 한 켠으로는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세상’이 나쁘지 않은 이상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바라는 바는 ‘남들보다는 우선 내가 행복한 세상’, ‘나와 내 가족이 우선 행복하고, 이 행복이 깨지지 않는 세상’을 바랍니다.

이 지점에서 성경과 우리 삶 사이의 괴리가 생겨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는 은혜롭게만 내가 원하는 복을 주신다고만 해석해야만 하고, 이 현실을 바꾸어 가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불편한 이야기가 되어 갑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이 본래 전하고자 했던 말씀들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제대로 된 해석 방법도, 해석학적 관점도 없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성경 해석을 합니다.

저는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천국이 이루어지기를 정말로 바라고 있습니다만, 성경의 글자 그대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일한 만큼의 대가가 아니라 동일한 대가를 얻으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봅니다. 구약은 분명 농경사회 시스템 자체를 부정합니다.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 자체가 사라진 세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는 이미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가 상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미 굳어져 있는 사회 체계에 대한 전복 명령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회 체계 속에서, 모든 사람이 하루하루 굶주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가능성의 제시입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복지 정책에 대해서 우리가 고민하자는 얘기는 안 하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은 나만 행복한 세상, 내 가정만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남보다 잘 살아야만 행복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이 행복하면’ 그 속에는 나도 포함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과 일치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야기, 은혜롭게 해석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 그 자체로 은혜로운 말씀이 될 줄 믿습니다. 또 우리로 인해 이 땅이 천국, 하나님 나라가 되어갈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