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봉오동전투와 영화 “봉오동전투”봉오동전투는 어떻게 준비되었는가 (1)
이이소 | 승인 2019.09.02 17:24

아베의 망언으로 인해서 식민지 청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친일파 후손내지는 그 수혜자들의 반동이 유튜브를 타고 거짓 선동을 일삼고 있어서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만주국”시대에 만주에 사는 조선인의 절반은 친일파요, 밀정이었다고 하니 그 후손들의 나라인 한국이 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일이 다행스런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 “봉오동전투”는 뭔가 다르다

영화 “봉오동전투”는 “암살”이나 “밀정”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 못 하고 있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나온 재미있는 영화들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암살”은 역사적인 인물인 “김구”, “김원봉”이 등장하지만 스토리는 식민지 백성의 희구,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이 실패로 돌아간 나라의 국민의 좌절과 분노를 시원하게 카타르시스 시키는 스토리가 탄탄하고 긴장과 감동, 스릴과 쾌감의 픽션의 시대극 영화였다.

“밀정”은 “김원봉과 의열단” 그리고 고등계 형사인 “황욱”이 함께 폭탄을 서울로 밀반입하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살을 입힌 영화였다. 하지만 깊이 음미하면 밀정이 의열단과 협력해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었다. 송강호의 뛰어난 연기에 눈이 멀어 그냥 놓쳐버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영화 속에서 ‘투사의 각오로 의열단이라는 비밀결사에 가담하였지만 사람인지라 변절할 수도 있고, 비록 먹고 살기위해서 식민지 주구인 고등계 형사가 된 공인된 밀정이라 할지라도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 독립운동가와 협력해서 일을 할 수 있었던 어둠과 혼란의 시대에 대하여 쉽게 논하지 말자’는 참으로 위험한 메시지를 들었다.

때문에 “봉오동전투”가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감독의 의도와 스토리가 무척 궁금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봉오동전투”는 민초들의 나라를 잃은 한과 고통, 저항과 승리의 역사를 스크린으로 잘 담아낸 영화였다. 봉오동전투는 “암살”, “밀정”과 달랐다.

첫째는 주인공들이 명문거족 출신이 아닌 평범한 농민이나 소작농 출신이다. 둘째는 내용이 주인공의 영웅담이 아닌 민초들의 투쟁을 소재로 삼았다. 셋째는 펙트와 거의 같은 스토리 전개로 봉오동전투에 대한 산 역사 교육을 시도하였다. 넷째는 던지는 메시지가 뜨겁다. 일제국주의 폭력과 살상으로 파괴된 가정, 사회, 나라를 위하여 육탄을 던지는 순수한 민초들의 애국애족의 사랑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를 묻고 있다. 

“봉오동전투”는 우리에게 무명의 독립군을 기억하며 우리도 국가적 위기를 그렇게 극복하라고 요청한다.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친일파 토착왜구들의 감언이설과 거짓에 휘둘리는 얄팍한 이해타산과 한심한 매국의식을 바로 잡을 왕도는 없다. 끊임없이 식민지 억압과 고통,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과 학살의 현장을 보여주며 가르치는 길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봉오동전투”를 적극 추천하고 싶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고문당하고 감옥에서 또는 독립투쟁의 현장에서 순국한 모든 투사들을 대신하여 지금도 일본에게 충성을 받치는 친일파, 토착왜구와 일본인들에게 우리를 더 이상 간 치지마라고 경고한다. 우리를 모욕하며 경제제재를 통해서 항복하게 만들려고 하는 야비한 음모와 간교한 술수에 더 이상 넘어가서는 안 된다. 1910년 8월 29일 같은 수치와 치욕을 두 번 다시 당할 수 없다. 친일파는 물론이고 한국인들을 각성시켜 국익을 위하여 초당적으로, 초이념적으로, 초지역적으로, 초종교적으로 하나가 되도록 만들 수 있는 독립운동에 대한 더 좋은 영화가 나오길 바라면서 “봉오동전투”를 더듬어 본다.

봉오동전투는

실제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4일에 일어난 강양동 초소 습격사건에서 시작되어 6월 7일 봉오동 상촌 전투를 끝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봉오동전투는 하루아침에 우연히 이루어진 전투가 아니다.

간도 조선인들에 의해서 20년 이상 준비된 전투였다. 20년 동안의 준비는 학교 설립, 교회 및 간 종교단체의 활동,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활동 등을 통해서 서서히 이루어졌으며 일본과 중국이 맺은 조약과 세계정세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기폭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봉오동전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1919년 용정 3∙13만세 시위였다.

만세시위가 무력으로 진압을 당하자 조선 간민들은 무력투쟁을 결심하였고 무장투쟁 단체를 만들어 일본의 군사시설, 공관과 시설을 파괴하는 국내진공작전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를 발판 삼아서 중국 침략을 하고 아시아제국을 세우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간도의 조선 독립군을 섬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용정의 3∙13만세 시위는 준비된 시위

첫째, 고난과 시련 속에서 자치에 대한 의지와 독립에의 욕구가 충만해졌다. 대부분의 조선 이주민들은 1885년 청의 이민실변 정책으로 귀화를 하여 합법적인 중국인이 되었으며 20년 세월동안 피땀 흘려서 명실 공히 만주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1907년에 일제가 간도를 조선의 연장으로 주장하며 조선 교민 보호를 핑계 삼아 용정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세움으로서 새 땅을 찾아서 만주로 나온 그들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1909년 일제는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으며 남만주철도부설권과 무순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국토로 인정하였지만 “두만강북쪽의 잡거구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중국의 법권에 복종하며 중국 지방관리의 관할과 재판을 받아야한다.”고 했지만 통상도시에 사는 조선인에 대해서는 일본이 영사재판권을 가진다고 하여 대다수의 조선인들을 자신들의 관리 하에 두었다.

1910년 한일늑탈 후 일제는 조선이 망했으니 조선인들은 일률적으로 “일본신민”이라고 주장하면서 동북삼성내의 조선인을 통치하려 하였다. 1915년 일제가 원세개정부와 ❰21개 조약❱을 체결한 후에는 동북의 조선인에 대하여 중국 귀화여부를 막론하고 일본인으로서 “치외법권”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중화민국 정부는 일제가 조선인들을 통하여 침략의 마수를 뻗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동북의 조선인들에게 귀화입적을 강제하였으며 귀화입적하지 않으면 조선인으로 취급하여 토지소유권을 주지 않았다.

민국의 귀화입적정책은 민족동화정책이었으며 일제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귀화입적한 자에 대하여 아무런 보호조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동북의 조선인들은 중국정부에 의거하여 일제의 통치를 벗어나려고 간민교육회, 간민회 등을 조직하여 조선인의 자치를 실시하려 하였으나 민국정부는 조선인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일제의 종용으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망국민으로서 조선 이주민은 10여 년 동안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침략과 방어의 도구로 이용당하며 고통과 고난, 차별과 학대에 치를 떨며 자치와 독립에의 염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둘째,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이 고조되었다. 조선인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고 생계가 펴지자 마을마다 서당(서숙) 꾸리기 시작하였다. 서당은 <삼강오륜> 등 봉건유교사상과 윤리도덕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1905년 이후부터 조선의 애국문화 계몽운동의 영향으로 조선 이주민들 사이에서도 민족계몽운동과 항일교육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사립학교들이 흥기하였다. 이에 따라 구식서당은 민족사립학교나 개량식 서당으로 바뀌어서 대중과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주었다. 1928년 통계에 의하면 민족교육을 한 개량식서당이 328개나 된다.

1906년에 문을 연 <서전서숙>이 근대민족교육을 시작한 이래로 훈춘의 신풍학교, 와룡동의 창동학교, 명동촌의 명동학교, 광개사 후저동의 정동학교가 속속 들어서면서 항일민족의식에 근거한 교육을 통하여 조선 이주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1910년 3월, 간민교육회는 학교교육을 주도하여 학생들에게 근대교육과 항일교육을 실시하여 간도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건설할 것을 목적하여 세워졌다. <월보>를 발행하며 회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간민교육회 취지를 홍보하였으며 기금을 모아서 학교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힘썼으며 역사 교과서 등을 집필하여 편찬하였다. 간민교육회의 활동으로 소영자의 길동기독학당. 길신여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길동학당 중학부가 속성사범으로 개칭되어 교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간민교육회 뒤를 이은 간민회도 사립학교설립운동을 계속 추진하였다. 회원들은 교육비로 회비 30전씩 납부하였으며 학교들이 근대교육과 항일교육을 하도록 지도, 격려하였으며, 구식서당을 개량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간민회가 중국정부에 의해 해산된 이후에도 간민회 회원들은 <간민교육연구회> 이름으로 사립학교 운동을 추진시켜 근대문화와 항일교육을 견지하였다.

1916년 통계에 따르면 연변 4개현의 사립학교총수는 156개, 학생수는 3,700명이나 되었다. 대부분의 학교들이 근대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1919년에 이르렀을 때, 연변은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청년들의 가슴이 용광로처럼 끓고 있었다.

1920년 일제의<경신대학살>때 이른바 <불령선인들의 소굴>로 지목되어 토벌대상이 된 사립학교만 하여도 41개나 되었다. 사립학교의 발전은 연변 조선인들이 민족의식으로 하나가 되어 항일운동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적, 조직적인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셋째, 기독교를 통하여 간민들의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이 고양되었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1898년에 연변을 선교구로 정하였고, 1903년에 조선의 이민을 따라서 연변에 들어 왔다. 1912년에는 용정에 기독교선교부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캐나다장로교회 선교사들은 조선 간민들의 반일감정과 독립운동을 지지하며 격려하였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며 교육과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황병길, 오병묵, 남공선, 박무림, 정재면, 강백규, 김약연 등이 있다.

캐나다장로회는 1906년에 용정교회, 양목정자교회, 광제욕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하여 1921년에는 63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대부분의 교회 설립자들이 독립정신으로 무장된 독립투사들이었으며 그들은 선교사들의 협조와 지지를 받아 교회 가까이에 사립학교를 세웠다.

1928년 통계에 의하면 캐나다장로회 소속의 신도들이 세운 학교가 44개, 1926년 통계에 보면 외국인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19개였다. 용정 3∙13 만세 시위에 앞장선 정동학교, 창동학교, 명동학교, 광성학교(길동기독학교) 들이 다 크리스천들이 세운 미션스쿨이었음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3∙13 만세 시위 준비모임이 2월 18일과 20일에 연길 박동원의 집에서 열렸는데 대부분의 참석자가 크리스천이었다. 구춘선, 김영학, 고평, 박동원, 이홍준, 이성근, 박경철, 김순문, 강룡헌, 이성호, 백유정, 최봉렬, 박정훈, 김동식 등을 비롯한 33명이 비밀 회합을 통해서 합의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북간도내 각 교회와 모든 단체는 단결, 협력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힘을 다 바칠 것, ▲ 모든 간도 내의 단체는 멀지 않아 연해주에서 협의, 반포할 조선민족독립선언서의 공포와 동시에 시위할 것, ▲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 간도 내 각 단체의 유력자는 용정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을 하여 기세를 올릴 것 등이었다.

준비위원들의 면면과 결의사항 첫 번째에 의하면 기독교가 3∙13만세시위에 끼친 영향이 지대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 뿐 만 아니라 대종교 또한 민족교육과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려진 청산리전투의 주력부대 중의 하나인 북로군정서 부대가 바로 대종교의 지도자 서일이 10년 세월을 쏟아 부어 만든 독립군 부대였으니 당시 대종교의 종지가 조선의 독립이 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천주교의 일부와 원종교, 청림교도 교육과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3∙13만세 시위에 참여를 하였다.

넷째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외교독립론”에 고무되었다. 1919년 1월 파리 강화회의가 열리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쟁 후 처리의 원칙으로 <14개조 조목>의 내용을 선포하였는데 제5조는 <민족 자결주의>문제였다. 이는 약소민족의 해방에 관련되어 있으므로 독립투사들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11월 중순에 윌슨은 크레인을 특사로 중국에 파견하여 전승국인 중국도 파리강화회의 참석하여 빼앗긴 산동교주만조차지와 산동 등의 이권을 되찾게 함으로써 일본의 중국 침략을 견제하려 하였다. 크레인이 상해에 도착하였을 때 환영회에 참석했던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에 중국대표로 참석할 왕정정, 육미상을 통하여 크레인을 회견하고 조선독립을 요청하는 문건을 전달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도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압박에서 벗어나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우리 대표를 파견하겠다며 중국 대표들이 미국 대표로 하여금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인들은 미국과 중국의 도움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실현하려는 환상과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무드 속에서 연변대표들이 러시아로 떠난 후, 2월 18일, 20일 양일에 국자가 동쪽에 있는 박동원의 집에서 항일지사 33명이 모여서 항일운동방침을 논의하며 <독립운동의사부>를 결성하고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상항을 합의하였다. <독립운동의사부>는 니꼴라스크로 간 연변대표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간도 각지의 예수교, 천주교, 대종교 및 공교회 유력자들과 서로 연락하며 신도들과 모든 이웃들을 권고, 동원하며<독립선언서> 발표대회에서는 윌슨의 <14개 조목>의 내용인 <정의, 인도>, <민족자결>과 민족 독립을 주장하며 민족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반도와 동북의 조선인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우리의 해방과 독립을 지원한다고 확신을 가졌다.

참고문헌

심영숙, 『중국조선족력사독본』, 민족출판사, 2016.
룡정3∙13기념사업회, 『룡정 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도문시정협문사자료위원회 편, 『홍범도 장군』, 연변인민출판사, 1991.
김춘선·안화춘·허영길 저, 『최진동 장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북경대학조선문화연구소, 『종교사』, 민족출판사, 2006.
중국조선족교육사편집부, 『중국족교육사』, 중국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1년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개척』, 민족출판사,1999.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편,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연변인민출판사, 1997.
<연변조선족사>집필소조편, 『연변조선족사상』, 연변인민출판사, 2011.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이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