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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나그네로 우리에게 온다예레미야 2:4-8; 히브리서 13:1-8, 15-16; 누가복음 14:1, 7-14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19.09.0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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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 칸느 영화제에서 걸작으로 평가받고, 그 영화로 감독상을 받은 독일 출신의 빔 벤더스(Wim Wenders, 1945-)가 만든,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ueber Berlin)는 1980년대 10년 동안의 모든 영화 베스트 10 가운데 1위를 차지하여, 영화사에 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관객모독’(1971년)이라는 연극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극작가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1942-)와 공동으로 각본을 쓴, 이 영화는 ‘인간이 된 천사 다미엘’ 이야기입니다.

전후, 분단된 베를린 하늘을 배회하는 천사 다미엘은 친구 천사 카시엘과 함께 베를린 거리를 순회하면서, 병들고 가난에 찌든 노인이나 상념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뻗칩니다. 지체장애 소녀, 출산을 앞둔 엄마, 터키 이주 노동자 가족, 빌딩에서 투신자살하는 남자, 베를린 하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온갖 일상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천사 다미엘은 공중 곡예를 하는 마리온을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인간은 천사를 볼 수 없고, 천사는 인간이 아니기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질 수 없는 것이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사였다가 인간이 된 피터 포크를 우연히 만난 그는 천사이기를 포기하고 인간이 되려고 합니다.

‘영원함 속에서 정신적 존재로 사는 것은 멋진 일이야. 매일매일 사람들에게 순수하고 정신적인 것을 증언하면서..... 하지만 더 이상 영원한 시간 위를 떠도는 게 아니라, 매순간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지금, 지금, 지금이라고 말하고 싶어.’

그러자 친구 천사 카시엘은 말합니다.

‘그냥 일어나게 내버려둬. 바라보고, 모으고, 증언하고, 확인하고, 보전하는 것 이상을 하지마. 정신적 존재로 남아. 거리를 둔 채로 떨어져, 그저 말로 남아 있어.’

그러나 천사 다미엘은 영원 대신에 지금을, 불멸 대신에 사멸을, 정신 대신에 육신을 선택합니다. 다만 한 여인을 사랑하기 위하여! 영원을 버리고 시간 안으로 들어와 서커스 공중 곡예사 마리온과 첫 밤을 보낸 뒤 다미엘은 말합니다: ‘이제 나는 안다. 그 어떤 천사도 알지 못하는 것을.’ 마침내 다미엘은 한 여인의 남자로 지상에 남아있게 되고, 친구 카시엘은 천사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모든 전직 천사에게 바침. 특히 야스지로, 프랑수아, 안드레이에게’입니다.

불멸의 천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천사이기를 포기하고 사멸의 인간이 된 천사 이야기, 이 영화로 빔 벤더스는 인간의 삶이 비록 상처받고 찢어지고, 고통스럽고, 마침내 사라지는 것일지라도, 천사의 삶을 포기할 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천사도 흠모(欽慕)할만한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요?

무겁고, 깊게 생각하게 해서, 전형적으로 독일적인 영화이지만, 이 영화는 천사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 몇 가지를 확인해줍니다. 시대마다 천사상이 다르게 묘사되었지만, 천사는 날개 달린 어른 혹은 어린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직 이야기의 현실성을 믿는 순진한 어린이들은 볼 수 있는 존재이지요.

< 2 >

성경에도 수많은 천사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천사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말라크’(malak)는 헬라어로 ‘앙겔로스’(angelos)로 번역되었는데. 본래의 뜻은 ‘심부름꾼’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 역할을 하는 영이라는 것이지요.

▲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한장면 ⓒGetty Image

구약성경에서 천사들은 하나님을 에워싸고 있는 유일한 천상군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시편 29,1), 또는 거룩한 종들(욥 5,1)이라고도 불립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위치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홍해를 건널 때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기도 합니다(출 48,16). 그러나 불길한 사명을 가지고 사람들을 전멸시키는 역할도 수행합니다(출 12,29; 왕하 19,35). 천사들은 그들의 사명과 관련된 이름으로 지칭되는데, ‘하나님은 치유하신다’는 뜻의 라파엘은 토비아의 눈을 낫게 하고(토 3,17; 12,15), ‘하나님은 강하시다’는 뜻의 가브리엘 천사는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합니다(단 8). ‘하나님과 같은’ 미카엘 천사는 모든 천사들의 왕으로 이스라엘을 수호합니다(단 10,13-21).

신약성경에서도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 유혹 이야기, 번민, 승천(행 1,10) 등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인간을 보호하고(마 18,10; 행 12,15),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전달하며 의인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눅 16,22). 누가복음은 부활한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운명이 더 이상 죽지도 않는 천사같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눅 20,36).

그런데 오늘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는 것은 천사의 실재 여부, 혹은 천사의 모습이나 그 역할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천사가 우리에게 낯선 사람, 혹은 나그네로 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흘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히 13,1)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의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세 명의 천사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 곁, 자기 장막 어귀에 앉아있던 아브라함이 세 명의 낯선 사람들을 대접하고, 아들을 약속받은 것이 그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두 낯선 남자들을 접대하고 보호한 덕분에 소돔이 멸망당할 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창 19,1-26). 천사들은 낯선 나그네로 아브라함과 롯에게 다가와 후손을 약속하고, 또 그들을 파멸로부터 보호한 것이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천사와 동일시한 ‘나그네’는 우리를 돕는 천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천사라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천사’를 우리를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능력의 수호신으로 인식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일종의 역전이 일어난 것이지요. 천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낯선 나그네로 우리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낯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멸시당하는 자나 박해받는 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같은 위험에 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가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나그네를 대접한 것은 ‘멸시당하고 박해받는 사람들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곧 그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마 10,40)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함과 가진 것을 나눠주기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히 13,16)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 3 >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이 곧 천사를 맞이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더 급진적이 됩니다.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 모으신 주님께서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마 25:31-40).

마지막 심판이 형제사랑과 낯선 나그네 환대를 기준으로 전개되는 것도 놀랍지만,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한 사람과 동일시하신다는 것은 더욱 놀랍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평등사상, 모든 사람은 인종과 피부색, 종교와 국적, 계급과 신분, 성 차이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신념은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에게 주는 교훈(눅 14,7-11)과 잔치에 초청하는 사람에게 주는 교훈(눅 14,12-14)에 의해서도 뒷받침됩니다.

잔치 자리의 상좌를 누구에게 배정하느냐 하는 문제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주 까다로운 문제였습니다. 나중에는 권세나 부귀 대신에 나이를 기준으로 삼아 누구도 시비를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잔치 자리의 상석에 앉는 것은 그의 사회적 신분과 위상을 드러내는 일이었기에 존경받는 바리새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높은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눅 14,11)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라는 것은 자칫 창피를 당할 것이 두려우니 겸손을 꾸미라는 세속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높여줄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사람의 위치, 곧 사람을 높이고 낮추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인간의 자기 추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두 번째 교훈은 잔치에 초대하는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 대신에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되갚을 수 있는 사람들보다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면,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눅 14,12-14). 가난한 사람은 갚을 경제적 능력이 없고, 나머지 사람들은 갚을 경제적 능력은 물론, 신체적 능력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 당시 쿰란 공동체에서는 ‘장애인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은 전쟁에 소집되는 것도 면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동식사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갚을 수 없는 이런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라는 것은, ‘의인들이 부활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선한 행동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눅 14,14), 예수님은 이로써 급진적인 평등을 구현하는 식탁 공동체를 지상에서 선취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으로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를 더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떠돌아다니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 4 >

만일 천사가 오늘 우리에게 낯선 사람으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그네로 온다면, 우리는 천사를 만나기 위해 하늘로 여행할 필요가 없겠지요. 천사는, 아니 심판자이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낯선 사람으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그네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탈북 모자가 굶어죽은 채로 발견되어 우리를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남한에 있는 32,000여명의 탈북민들, 2017년 현재 난민신청을 한 1만 3,295명의 난민들, 차별과 폭행, 장시간 노동, 저임금으로 고통 받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 이들이 나그네로 우리에게 온 천사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웃을지 모릅니다. 우리 경제문제도 심각하고, 우리나라 청년실업자도 많은데, 무슨 탈북민이나 난민,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 걱정까지 하느냐고 철없는 소리 말라고 할지 모릅니다.

게다가 탈북민, 난민,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이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1992년에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 가입했습니다. 2013년부터는 아시아 국가 최초로 별도의 난민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난민신청자들이 거주할 수 있는 보호시설은 인천 영종도에 있는 난민지원센터가 유일합니다. 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거나 종교적 편견을 가지고 판단하여 혐오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가입한 국제협약에도 어긋납니다.

난민 문제는 이제 세계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수적 규모와 지구적 이동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난민 문제는 단지 경제적, 정치적 문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는 ‘신앙고백의 문제’(status confessionis)입니다. 나그네 환대가 단지 ‘교회봉사활동’이나 ‘자선사업’이 아니라, ‘신앙고백의 문제’인 것은, 천사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낯선 사람으로, 나그네로 오기 때문입니다. 아니, 최후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굶주리고, 헐벗고,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를 만날 수 있는 곳,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곳은 하늘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우리에게 오는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는 곳이고, 그래서 나그네 환대는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신앙고백(status confessionis)의 문제인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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