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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과 친일의 시각(內戰)에서 본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9.09.03 18:23

이 책은 한국 전쟁의 기원과 성격에 관한 연구서로서 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헌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저자는 시카고 대학 석좌교수로서 한국 근현대사, 동아시아 국제 관계사 분야의 전문가이다. 커밍스는 한국 전쟁을 승리한 전쟁이 아니라 잊힌 전쟁으로 규정했다.

특히 미국인들에게 있어 기억상실의 역사, 잊고 싶은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남쪽을 지키기는 했으나 북을 차지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은 종료되었으나 한국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종전,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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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보는 커밍스의 시각은 다음 몇 가지 면에서 특별나다. 첫째는 이 전쟁을 내전으로 봤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 이래로 항일한 한국인과 일본에 부역한 한국인들 간의 투쟁으로 본 것이다. 국제전으로의 확산은 이후의 문제였다.

둘째로 그에게서 남침/북침의 구별이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북진(승공)정책이 오히려 문제였다. 수차례의 국지전 끝에 발발했기에 누가 먼저라고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셋째로 한국 전쟁은 태평양 전쟁(1931-45) 당시 일본인 사상자(230만)보다 한국인 사상자 수(민간인)가 훨씬 많았다. 이중 다수가 민간인이었고 남측 잔악행위가 상대적으로 큰 결과였다. 여기에는 미군정의 책임이 컸다.

넷째로 이 전쟁으로 미국이 군산복합체제 국가로 완전 탈바꿈 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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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을 중국과 다른 독자적 문화권으로 인정했다. 역사 오랜 단일 국가를 분단시킨 죄과가 너무 크다고 했다. 스스로 변화될 가능성이 큰 나라였기에 일본 근대화론을 터무니없다 여겼다. 이 전쟁으로 친일 부역자들의 흔적이 말끔히 해소된 것도 아쉬운 일이었다. 이들 중에는 일본, 한국, 만주의 유기적 통일을 주장한 경제인(박흥식)도 있었다.

1930년대 만주국 등장으로 불거진 친/반일 입장차로 남북 간 내전의 양상으로 전쟁이 발발되었다. 남쪽의 부분적 도발을 이유로 북이 침공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불신 탓에 북보다 병력이 10만 명 정도 더 많았음에도 군대는 사기저하 되었다.

사실 이 전쟁에 미국은 국제연합 결정 이전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남한은 동북아와 중동을 연결하는 위치로서 일본의 경제부흥에 필수적 존재라 여긴 것이다(대 초승달 전략). 김일성은 일본 주둔 미군을 염두에 두었을 뿐 미국 본토에서 미군이 파병될 지 생각하지 못했다. 중국 모택동은 항일시기 조선과 중국관계를 생각하여-많은 조선인들이 중국 공산당 당원-참전 결정했고 38선을 넘는 연합군을 북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폈다.

맥아더는 북쪽 전역을 초토화시키는 명령을 하달했다. 북에 핵무기 투하까지 거론하면서-아이젠하워 당시(53년 5월)네바다 주에서 핵실험했다-북의 전 지역을 공중전으로 초토화시켰다. 도시의 70%까지 파괴된 지역도 있었고 최소한 30% 정도는 모든 도시가 망가졌다.

중국군의 대거 참여로 대략 38선에서 휴전협정을 맺고자 했으나 이승만의 반발이 컸다. 미국조차 이승만을 제거할 생각을 가질 정도로 이승만의 승공의식은 집요했다. 1953년 7월 27일 남한이 거부한 상태로 중국, 미국 그리고 북한 3자가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당시 소련은 자신들 지원이 공식적으로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휴전협정에도 관여치 않았다. 발발 당시 한국 전쟁이 3차 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두려워했고 소련 자체가 미국처럼 핵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전쟁 참여에 소극적이었다.

이 지점에서 커닝스는 다시 묻는다. 과연 민간인 포함 남북 합하여 300만 중국군까지 포함한 연합군 100만 사상자를 낸 한국 전쟁이 과연 내전(內戰)이었는가?를. 만약 그렇다면 식민주의, 민족분단, 외세개입으로 초래된 갈등, 긴장을 해결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다시 휴전상태로 머물고 만 것이다. 커닝스는 이지점에서 본래 내전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 국제전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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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듯이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1930년데 만주에서부터 찾았다. 일본이 동북 3성을 침공하여 꼭두각시 만주국(1931-20)을 세웠다. 만주국은 옛 고구려의 영토였다. 일본이 세운 만주국에 최초 위안부가 세워졌다. 5만 명 규모의 위안소에 3만 명 이상이 한국 여성들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대를 이어 만주국에 가장 적대적인 저항세력이었다. 당시 그 지역 중국 공산당원 80% 정도가 한국인이었다. 일본은 자신과 협력하여 저항세력을 분쇄할 한국인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2만 5천 여 명의 항일 투사들, 사회(공산)주의자를 도운 이들이 학살당했다. 김일성 역시 수차례 살해 위기를 겪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북족 인민 공화국에서 일본보다 부역한 한국인들이 배척의 대상이었다. 북은 한국전쟁을 통해 남의 부역자들을 무너트리고자 했다. 항일담론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알지 못했다. 천황제를 존속시켰고 아베의 조부인 기시 노브스케(만주국을 세운 인물), 1급 전범을 정권에 복귀시켰으며 이들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한편 남쪽에서는 김일성을 거짓 인물로 속해했다. 김일성이 실제 항일담론의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김일성에 대한 신화도 만들어졌다.

이런 두 개의 한국이 이미 1930년대에 역사 속에 등장했다. 만주국에서의 항일은 북쪽 사람들 마음속에 각인되어졌다. 북쪽 영혼이 이곳에서 탄생되어진 것이다. 한국인 5% 친일 부역자였는데 이들은 남쪽에서 출세 길이 열렸다. 이후 남쪽 엘리트 90%정도가 친일부역과 연관된 사람들이다.

미국은 친일 부역에서 자유로운 이승만을 다른 국외 지도자들 보다 앞서 귀국시켜 남한의 반공 장권을 준비시켰다. 반면 김일성은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여 자주독립국가의 길을 닦아 갔다. 김일성은 처음부터 소련의 눈에 든 사람은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커밍스는 니체의 말을 빌어 ‘기억’을 논한다.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고통은 기억능력을 돕는 가장 큰 조력자이다. 한국인들은 이 전쟁을 기억하는데 미국인들은 잊고 있다. 자신들 고통이 아니었던 탓이다. 한국전쟁이 그들에게 ‘잊힌 전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잊힐수도 잊혀서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겪은 역사(한국전쟁)는 기억 속에서 다시 소생시킬 일이다. 결코 ‘완료시제가 될 수 없다. 1945년 38도선 분할, 두 집단으로 한국인을 분리시킨 것이 한국전쟁의 출발이 되었다. 본래 내전이었으나 이제는 상반되는 두 개의 사회적, 경제적 체제간의 전쟁, 국제전이 된 것이다.

한국전쟁은 1932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립된 두 한국인들 간의 내전으로 시작되었으나 세계 냉전체제와 연루되었기에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전쟁의 내전 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지워 버리려고 했다. 일본과 미국의 깊은 연대성 때문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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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저자는 공산당의 악 그리고 자유세계의 미덕이란 이분법을 말하지 않는다. 목격자의 진실을 더 소중히 여길 뿐이다. 서구는 남북 양쪽을 ’이름 없는 찌꺼기‘라 불렀고 신뢰할 수 없는 종족이라 여기는 등 인종차별적이었다.

뉴욕 타임즈 기사에는 남한 경찰이 양민을 공산주의자로 둔갑시켜 처형한 이승만의 경우를 비교적 상세히 언급했다. 우익에 의한 학살이야기가 많았다. 이런 기사로 미국은 동맹국들에 대한 비판 기사 금지안을 발표하여 기자들을 옥죄었다.

소위 ’메카시주의‘’가 발동된 것이다. 미국 정치 스펙트럼을 오른쪽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소련도 급기야 핵무기를 개발했고 중국혁명 여파로 공산주의를 막는 무기가 된 것이다. 동성애자, 외국에 나가있는 중국 연구자, 미국 심장에 어울리지 않는 내부 외국인들 이들 모두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메카시는 한국을 작은 중국으로 보았고 이승만을 다른 장계석으로 여겼다. 장개석, 이승만과 함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 이기자고 추동한 것이다. 한국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내줄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한국전쟁을 본 싸움에 있어 중요한 도구로 활용하였다.

한국 전쟁 배경에 소련의 음모가 있음을 공공연히 한 것이다. 이런 메카시즘 영향 하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주의보다는 좌파와의 차별성에 더 열중했다. 이로써 한국 전쟁에서 북한과 중국이 악의 축(軸)이 되어버렸다. 누구도 이들을 지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김일성의 항일 혈통을 거짓이라 매도했다.

메카시즘의 폐해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동양(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동양전체주의, 아시아(인)의 무능, 게으른 동양/진보적 서구,을 비롯하여 마르크스의 역사관도 이와 동종이다. 특별히 북한을 동양 전체주의와 스탈린주의와의 잡종이라 보았다.

이런 오리엔탈리즘의 편협성이 북한 이해를 방해했다. 이후 북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증오가 생겼고 그것이 서구인들 속의 콤플렉스, 그들 속의 그림자가 되었다. 북한 군주제는 민족주의와 유교적 한국 문화를 알아야 이해 가능한 것이다. 이들의 사회 통일체론은 지극히 종교적이며 낙관론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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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아는 대로 해방 후 미소 양국의 수용으로 38도선이 분할되었다(딘 러스크).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에 어떤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일본에 의한 한국 근대화론자였다.

미군은 한국을 다스릴 보수주의자들을 찾았다. 이승만은 맥아더가 제시한 미국적 반공주의를 수용한다는 조건으로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그리고 그 주위에 일본 제국주의 부역자들을 몰려들었다.

신설된 중앙정보국은 당시 남한 정치를 좌익 인민 잔여세력과 우익사회간의 경쟁체제로 읽었다. 일제하의 경무부 정치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말이다. 이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 크게 책임 나쁜 짓이었다.

하지 사령관은 남노당을 비롯하여 항일운동자, 인민주의자(여운형), 토지개혁 우호 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보았고 이들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맞선 저항이 남쪽에서 극렬했고 백성들이 고통이 가중되었다.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등이 대표적 경우이겠다.

오로지 미국 관심은 남한에 반공정부를 세우고 일본경제와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남한을 미국은 물론 일본 경제에 편입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조지 마셜). 한국전쟁을 미국이 주도한 이유도 사실 여기에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민)의 실상에 눈감았다. 36년 지배통치를 끝내고 자생적 통치기구를 갖고자 했으나 일제 부역자들에게 다시 통치를 받게 된 기막힌 현실 말이다. 이승만 정권이 좌익의 전향을 위해 보도연맹을 만들어 이에 편입시켰으나 한국 전쟁 발발 후 이들을 이승만 정부가 학살했다.

제주 4.3사건을 통해 도민 30만 명 중, 8만 명이 죽었고 4만 명이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보도연맹에 속해 학살당한 사람 수가 거의 3만 명에 이르렀다. 반공을 국시로 한 미국 부역자들이 친일 부역자들을 앞세워 저지른 일이었다. 저자가 이 점을 부각하는 것은 한국전쟁을 1930년대로 소급하려는 취지, 곧 내전인 것을 말할 목적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명령에 순응하느라 이웃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던 거짓증언자들이 수없이 많이 생겼다. 이들 속에서 진실은 여전히 간직되어 있을 터, 자신들의 죄를 묻는 혼령(트라우마)탓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당시 미국은 여순반란 사건을 대처하는 이승만의 능력 여하를 지지여부를 가늠하는 척도로 여겼다.

한국이 공산주의를 어찌 생각하며 치리하는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으로 삼았으니 기막힌 일이다. 미국 신문에는 여순사건이 소련의 지원 하에 북한이 외부에서 유도한 것이라 보도 되었다. 여순사건의 핵심이 토지관계의 사회적 불평등, 극소수 부자와 다수의 빈민 간의 불화, 항일 운동가들의 부역문제가 원인이었음에도.

결국 이 일로 한국 전쟁 전 이미 10만 명 이상이 죽었다. 커밍스는 이를 미국인들에 의해 자주(결)와 정의를 위해 싸운 토착민들을 공산주의자라 몰아 죽였던 무제한적인 폭력사건이라 규정했다. 이에 편승하여 이승만은 그가 1945년 이후부터 지녔던 신념, ‘38선을 깨트려 잃은 국경 되찾자‘는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국전쟁 이전에도 크고 작은 소규모 전투들이 남/북쪽에 의해 도발된 경우가 있었다. 3차 대전을 우려해 전면전을 먼저 시작하는 쪽이 국제 여론에서 불리했기에 서로들 삼가고 있다. 김일성은 남의 도발을 기대했고 이승만은 미국 지원받아 북을 치고자 했으나 미국도 북의 남침을 먼저 기대했다. 중국 모택동이 소련보다 적극적으로 북을 도왔고 소련은 막후에서 군사전술적인 지원을 했다.

여기서 커밍스는 북/남침의 분별이 의미 없다고 판단했다. 저마다 기회를 엿봤고 앞서 상호 도발이 있었기에 말이다. 저자의 말 한마디를 그대로 인용하겠다.

“6월의 침공은 내부싸움을 외부로 확장시킨 결정적 싸움이었다. 내부적으로 끝날 수 있는 싸움이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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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정 이후 북(공산주의)을 완전 점령코자 민간인 희생을 고려하지 않은 채 미국은 비행기로 융단 폭격을 하였다. 도시 자체를 소이탄으로 불살라 버리기도 했다. 북한 댐 20여개를 붕괴시켰고 이후 추풍령 댐까지 파괴시키려 했으나 중국 눈치 탓에 계획을 수정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보다 북의 피해가 컸는데 주로 도시들을 폭격했던 탓이다. 지금까지 북은 이때의 경험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핵무기를 보유 발전시킨 것도 당시의 경험 탓이다.

말했듯이 미국은 북에 핵무기 사용을 수차례 고려했고 이 뜻을 이루고자 맥아더를 사령관 직에서 해고했다. 핵폭탄이 부품 상태로 한국에 도착하여 조립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 트루먼은 소련이 공군기를 활용할 시-김일성이 이를 강령하게 요구했다-핵폭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승인한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도시파괴 정도가 2차 대전 중 독일 파괴 정도보다 훨씬 심했다고 평가된다.

▲ 브루스 커밍스 ⓒGetty Image

1999년 미국 타임지에는 추풍령 인근 노근리 사건이 소개되었다. 50년 7월 미군들이 민간인 수백 명을 사살한 사건이다. 미국인들 집단 기억에서 잊혀 졌으나 전춘자에 의해 다시 소환되었다. 민간인임이 확인되었음에도 미군들에게 한국인은 죽여도 좋을 하찮은 존재로 각인 된 결과였다. 전쟁 시라도 군인은 무장하지 않은 자를 피아 막론하고 보호할 책임이 있다.

사실 이곳은 토착 좌익 세력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해방되었을 때 한국인들이 품었던 공동체 희망이 싹튼 곳이다. 하지만 미군은 끈질기게 식민지 경찰로 봉사하던 한국인을 앞세워 이들을 색출, 토벌했다. 이미 여순사건을 경험했기에 이들 학살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미군은 이들 학살의 책임을 공산주의자 소행으로 돌렸다. 진실규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희생자들의 증언만큼 정확한 것은 없을 것이다.

커밍스는 이를 예로 들면서 미국이 죽인 사람들 숫자가 북에서 살해한 사람들 수보다 훨씬 많았다(대략 6배로 상정한다)고 기록했다. 남쪽 이승만 정부 역시 공산주의자와 그 부역자들을 모조리 청산코자 한 결과였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은 이 상황을 배경한 작품이다.

특히 황해도 선천 지역에서 3만 5천명이 학살당한 사건을 배경 삼았다. 북쪽에서는 아직도 기억, 회자되는 생생한 사건이다. 역사 무게에 눌린 자는 잊지 못하는 법이다. 물론 남의 사람들 역시 북에 의해 당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북의 사람들의 이런 경험도 헤아릴 줄 알아야 화해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과거와 현재는 조상을 통해서 연결된다. 제사를 통한 개인적 기억이 사회적 기억으로 확장되었다. 신성한 장소에 매장되지 못한 망자는 제사를 받을 수 없어 망령으로 떠돈다. 양분된 이데올로기는 이런 인간 진실 앞에서 무너져 내릴 것이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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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 남을 공격한 것은 일본의 산업경제와 과거 일본이 한국에서 누렸던 그 지위가 되살아날까 걱정한 결과였다. 실제로 마셜은 남한을 일본경제와 밀점하게 연결시킬 플랜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 대만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대 초승달정책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일제에 부역한 남의 토착세력이 이런 전략을 갖고 권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북의 지위가 날로 약화될 것이라 생각했다. 북으로선 남이 다시 일본과 근접되는 것이 크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김일성이 몰랐던 것은 미국이 이런 냉천체제를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켜 놓았던 사실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이후 실로 전혀 다른 나라가 된 것이다. 해외에 수백 개 군사기지를 둔 안보, 경찰국가가 된 것이다. 군산복합체의 나라(아이젠하워)가 되었다. 이것이 이후 베트남 전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두 적대세력의 공존, 냉천체제하에서 미국은 전쟁을 억제시켰고 일본을 강력한 선업국가로 만들어 자신들 군산복합체를 뒷받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 경제들이 통합되면서 냉전장애물이 치워졌다. 지금 미국과 일본이 다시금 냉전체제를 만들고 있지만.... 

지금껏 남/북간, 한/미간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 차(差)가 크다. 맥아더 보수파에게 한국전쟁은 실패한 전쟁이었고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 남한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북을 점령치 못했기 때문이다.

북한 점령 실패로 트루먼 정권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전쟁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은 맥아더에게 돌아갔다. 워싱턴 한국 전쟁 기념비에는 참전 용사들의 얼굴이 조각되어 잇다. 그런데 이들 얼굴에는 해결되지 못한 전쟁의 초조함과 긴장이 새겨져 있다. 베트남 참전비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다는 평가도 받는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미국은 한국전쟁 경험을 이라크 점령을 위해서 사용했다. 위대한 문명발원지인 이라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오로지 석유 때문에 이곳을 초토화시킨 것이다. 한 나라의 주권을 맘껏 유린했다. 한국전 당시 미국은 한국을 오로지 일본의 안전을 위한 방패막이로 이용하였다.

평화헌법을 부정하는 아베정권으로 인해 다시금 정세가 불안해졌고 전쟁 개연성도 불거진 상태이다. 여기서 저자는 니체의 글 “역사가 인간에게 주는 이익과 손해에 관하여”를 인용했다. 기억의 반대는 망각일터, 망각은 모든 행동에 내재한다. 이 망각을 어찌 벗을 수 있을까?

이점에서 저자는 김대중을 주목했다. 과거 적을 오늘 이해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탓이다. 이것이 니체가 말한 기억이 주는 이익이었다. 비록 용납하기 어렵더라도 김대중은 적의 행동원칙을 이해했던 것이다. 역사를 적의 시각에서 볼 수 있다면 적의 세계관에서도 우리들 이야기가 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역사를 이용할 때 인간은 소가 아니라 비로소 인간인 것을 주지시켰다.

진실의 칼을 사용하여 정의와 화해를 위한 처벌도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 일본과 함께했던 자들의 처벌이 급선무이다. 수백만을 죽인 한국 전쟁의 기원이 여기에 있는 탓이다.

남과 일본의 상태가 최소한 김대중 정권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북과는 전혀 이야기도 시작되지 않았다. 기억을 묻고자 하는 일본이 사람으로 살지 않고 ‘소’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을 주적삼은 친일 부역자들 역시 사람이 아닐 듯싶다.

여하튼 한국 전쟁이 준 상흔이 너무 깊고 크다. 300만 명 사망자 중 민간인이 절반 이상이다. 미국을 군산 복합체 국가로 만든 출발이 한국전쟁이었음을 기억할 일이다. 그럴수록 이 전쟁이 휴전이 아니라 종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종전을 통해 미국의 위상도 달라져야 하는 까닭이다.

미국은 이 전쟁의 기원이 1930년대 친/반일 민족적 경험에 뿌리를 둔 것임을 크게 자각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전쟁을 잊지 않고 다시 자신들 기억으로 소환하는 길이다. 일본과의 관계를 미국 스스로 달리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겠다.

그러나 일본이 거듭 이 일을 방해했고 미국이 여전히 그들 편에 서있다. 미국은 이 전쟁을 지속적으로 잊고 싶은 것이다. 그럴수록 4.27 선언이 중요하다.

지난 봄, 그 1주기 행사로 시도된 민이 주도한 ’DMZ 민(民)+ 평화 손잡기 운동‘은 지속되어야 마땅하다. 4.27 선언 첫 조항이 말하듯 자주성이 통일의 기본임을 천명하고 실천했기에 말이다. 누구도 함부로 ‘흔들지 못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독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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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커밍스의 책 『한국전쟁』을 읽고 나름 요약/정리해 보았다. 한국서 출판된 같은 주제의 책들이 커밍스의 시각을 비판하든, 찬성했든 아니면 보완했든 지간에 이것을 활용하며 자신들 논지를 펼쳤다. 커밍스는 종래의 남/북침설의 실상에 집착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맥락에서 그 전쟁이 일어났는지를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불온사상을 전파하는 이단자 취급을 받았으나 방대한 사료에 기초한 덕분에 지금까지 그는 한국 전쟁에 관한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커밍스에게 ‘수정주의자’란 비판이 따라 다녔고 80년대 미국 대학가에서 금서가 되었다. 베트남 파병을 거부/회피할 목적으로 평화봉사단에 지원하여 한국에 온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 전쟁 연구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분단 상황에서 한국정부로부터 연구기금을 한 푼도 받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커밍스에 대한 비판자로서 한국전쟁 연구자로 명성을 떨친 박명림 교수는 나름 자료를 분석하여 ‘남침설’을 밝히며 커밍스의 수정주의를 비판했다. 대부분 한국 역사학계 또한 사회적 분위에 편승하여 남침설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커밍스 자신은 북침을 주장한 적이 없었다. 한국 전쟁에 앞서 개성과 옹진반도 등지에서 남북 교전이 수차례 벌어졌던 상황에서 누가 먼저 쐈는지를 밝히는 것이 어리석고 어려운 일이라 말했을 뿐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커밍스의 수정주의에 대해 크게 비판했으나 당시 그는 멋진 말을 남겼다.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 역사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수정되지 못한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긴 것이다.

실제로 그는 미국 정보부 기밀 자료를 분석하여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기원』 1, 2권도 앞서 출판되었으니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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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에게 흥미를 끈 것은 그가 한국전쟁의 기원을 1930년대의 항일/반일의 틀에서 봤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전쟁의 내전적 성격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북쪽의 항일 세력과 남쪽의 친일 부역 세력들 간의 갈등이 결국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남의 부역세력들이 미국 지원 하에 일본과 하나 되는 추세(경제/군사연합체)를 거부하려는 몸짓이었다는 시각도 보탰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이 냉전체제하에서 국제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 커밍스의 입장이다. 이점을 박명림 교수도 부정하지 않았다. 커밍스교수가 상대적으로 덜 강조했던 국제전쟁의 성격에 좀 더 무게를 실어 한국 전쟁의 성격을 ‘내전화된 세계전쟁’이라 불렀을 뿐이다. 커밍스의 책에서 국제전으로서의 한국전쟁 성격이 상대적으로 약술된 것이 유감이나 혹시 그의 다른 책에서는 어떻게 서술되었는지 아직 살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전으로 이해한 한국전쟁은 오늘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반공의 뿌리가 친일에 있다는 것이 요즘 벌어지는 한일 간의 경제전을 통해 여실히 밝혀지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껏 한국전쟁은 반공차원에서 이해/연구되었으나 ‘친일’의 시각에서 다시 살필 수 있는 계기를 주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성격상 사회과학 저서이나 저자는 니체를 비롯하여 많은 인문학자, 심지어 한국의 종교학자들 견해까지 인용해가며 한국 전쟁의 성격을 규명했고 그 치유를 위한 길도 나름 제시했다. 애도적 기억(回憶)를 중시하는 유교문화, 그리고 망자의 영혼에 관심하는 무속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한국 전쟁에 관해서 지금껏 기독교는 피해자 의식만 키웠고 반공 적대감을 부추겨왔다. 정작 자신이 한국전쟁 이래로 가해자였던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간접적으로 미국의 악행, 이 땅 우익들의 악행 그리고 이승만 기독교 정권의 무모한 도발을 고발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우리들 이야기는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옳을 듯싶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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