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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과 함께 선 믿음반전,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욥기 23장)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19.09.04 18:40

성서 말씀을 단편적인 구절로만 읽어서는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욥기의 말씀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한 편의 희곡과 같은 문학적 구조 안에 두 가지 세계관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논쟁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구절이 말 자체로는 정말 솔깃하고 그럴 듯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헤아리지 않으면 그 말이 의도하는 것과는 전혀 달리 곡해될 수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7) 이 말씀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듣기 좋은 축복의 선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욥이 겪고 있는 재난에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저주의 선언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거늘, 말년이 좋지 않은 욥 자네를 보니, 자네는 인생을 헛 산 것이네.’ 하는 말에 해당합니다.

오늘 우리는 욥기 23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도무지 이 본문만 뚝 떼어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호소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어쩌면 독백에 더 가까운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욥의 아리아’라고 이름붙일 만한 대목입니다. 그 맥락이 어떤 것일까요?

다 아시는 대로, 욥기는 의인 욥이 느닷없는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사태를 보고 위로해주겠다고 친구들이 달려오지만, 결과적으로 위로는커녕 논쟁을 벌이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제1차 논쟁은 죄의 혐의를 주장하는 친구들의 공격과 그 혐의를 부정하는 욥의 응수로 특징지어지고, 제2차 논쟁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지혜가 격돌하는 양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제3차 논쟁의 한 대목으로, 이 세 번째 논쟁은 앞선 두 차례의 논쟁과는 달리 혼전의 양상을 띱니다. 내용만으로는 과연 누구의 주장인지 헛갈릴 정도로 유사합니다. 욥이 구체적으로 처해 있는 고통의 상황을 새삼 환기하지 않는다면 모두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혼선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23장) 바로 앞에는 친구 엘리바스의 멋진 설교가 나옵니다(22장). 엘리바스는 감히 하나님에게 도전하며 악행을 범한 욥을 질책하며 훈계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욥에게 장엄한 축복의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기만 하면 은총을 베풀 것이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돌이키기만 한다면 만사형통한다는 말씀에 그 누가 솔깃해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엘리바스가 말하는 의미에서, 돌이켜야 할 그 무엇이 없는 욥으로서는 얼마나 난감할까요? 남에게 못살게 굴지도 않고 선하게 살아 왔는데도 가난하게 고생만 하는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많아 고생하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고 한다면 얼마나 난감할까요?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들은 대부분 그런 류가 아닐까요? 그런데도 난감해하기보다는 다들 “아멘!”을 외친다면, 그 사연은 무엇 때문일까요? 인간의 근원적 한계에 대한 자각이라면 다행일 것입니다.

▲ 물음없이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Getty Image

하지만 그보다는 그저 복 받고 싶은 마음에 우선 회개부터 하는 것은 아닐까요? 도대체 무엇을 돌이켜야 할지도 모르면서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 경우 설교는 청중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현실의 부조리를 깨닫게 하기보다는 사고를 정지시키고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엘리바스의 아름다운 설교는 그처럼 부질없습니다.

엘리바스의 감동적인 설교(?)가 끝난 후 욥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말씀입니다(23장). 이제부터 이어지는 욥의 이야기는 그 누구를 직접 대면하고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마치 오페라의 아리아와 같습니다. 그 말투도 이제까지의 격정적인 어조와 달리 절제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욥은 탄식합니다. 여전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이제 절망하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대답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자신의 믿음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입이 닳도록 자신의 정당함을 변론하고 싶어 하고 자신에게 무죄를 선언해 줄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동서남북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는 그의 순례의 길은 지칠 줄 모릅니다(23:1~9).

욥은 자기 삶의 정당성에 자신하는 만큼 하나님에 대한 신뢰 또한 큽니다. 이제까지 거의 항변으로 일관했던 욥은 아직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성실하게 따른 만큼 하나님은 명백히 자신에게 무죄를 선포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기쁨과 고통, 행복과 불행을 넘어선 모종의 뜻이 있지 않은지 궁금해집니다.

“그분이 한번 뜻을 정하시면 누가 그것을 돌이킬 수 있으랴?”(13절)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 도대체 어떤 뜻이 있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욥기의 첫 대목을 환기해 볼까요? 하나님과 사탄의 논쟁 결과 욥을 시험하게 된 것이 욥이 고통을 겪게 된 사연입니다. 그 시험은 인간은 과연 이기적인 동기 없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롭게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욥기의 독자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욥은 아직 그 사실을 깨닫는 데 이르지 못했습니다.그러나 이 대목에서, 뭔가 뜻이 있지 않을까 하는 물음에 이르고 있습니다(23:10~17).

욥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물음입니다. 친구들에게는 그 물음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반면에 욥이 친구들과 다른 점은 그 물음을 집요하게 던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음이 없는 믿음은 닫힌 세계관으로 귀결됩니다. 보수주의의 특징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압니다. 그 세계에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하여도 그 세계를 돌파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세계에서는 그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경험하고 알고 있는 세계에 대한 물음은 전혀 새로운 세계로 인도합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으로,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면 물음을 던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욥은 그렇게 물음을 던지며 신앙의 세계를 넓혀나가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이제껏 항변으로 일관해왔던 욥이 비로소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항변으로 일관했을 때 욥은 일종의 자기연민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내가 왜?’ ‘억울하다’는 것이 그 정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짐으로써 반전의 기회를 맞이합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의미에서 자신이 징벌로서 고통을 겪어야 할 까닭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겪고 있는 고통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으로 묻습니다. ‘하나님! 속시원하게 이야기해봅시다!’ 욥은 지금 이렇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물음의 결과 욥이 깨닫게 되는 진실은 이어지는 24장에 나옵니다.

그 진솔한 물음의 결과일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 때문에 몸서리치고 그 고통이 더욱 가중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욥은 시선을 이제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깁니다(24:1~17).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미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이 대목에 이르러 욥은 더더욱 확실하게 그 사실을 체감합니다. 선과 악을 한 순간에 판별할 수 있도록 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는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선과 악이라고 믿는 것이 하나님이 재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욥은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부자와 재상은 하늘이 낸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결국 권세도 재산도 가지지 못해 가난하고 비루하게 사는 사람은 하늘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 믿음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소상히 밝힙니다. 욥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가난하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서술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자연적인 질서요 신적인 질서로 간주하는 것이 결코 자연적이지도 신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악행을 범하는 사람이 있기에 그로부터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따라서 가난과 고통은 운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관계를 바꿈으로써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과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때에는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고통스러운 현실일 뿐입니다.

고통스러운 현실 때문에 절규하는 사람들 앞에서 침묵하는 하나님의 속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고통을 당신이 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를 스스로 생각해보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고통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고 그것이 뭔가 잘못된 현실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따라서 변화할 수 있다고 보게 되면 그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줍니다.

예수께서는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두고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나 그의 부모 잘못 탓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려는 것뿐이라고 말하며 그의 눈을 뜨게 해줍니다(요한 9:1~12). 눈먼 사람의 눈을 뜨이게 하는 일,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내 곁에 고통을 겪는 타인을 바라보게 하고 함께 하도록 하는 일,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주어진’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데 있습니다.

욥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지금 현실에서 그것은 마치 운명과도 같지만,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은사가 됩니다. 욥은 그와 같은 깨달음에 이른 것입니다.

결국 욥이 깨달은 하나님의 뜻은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세계 안에서 그 세계를 정당화해주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한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욥은 그 경험의 법칙 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대해 항변하고 물음을 던짐으로써 그 세계를 넘어선 가능성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자기가 경험한 세계 안에 하나님을 가둬둔 친구들의 믿음과 달리 욥은 자기가 경험한 세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추구한 것입니다.

욥의 그 깨달음의 반전, 그것은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똑같이 고통을 겪고 있는 타인들을 발견하고 그들과 공감하는 데서 이뤄졌습니다.

그 반전, 그 전환은 삶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자신이 겪는 어떤 불행한 사태나 고통을 자기연민의 상태에서만 바라본다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그것을 타인의 불행과 고통에 공감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사람의 삶을 훨씬 폭넓고 깊게 받아들일 수 있고,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더 의미있는 삶을 예비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2차세계 대전후 그 전후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우리는 독일과 일본의 대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단순 비교할 수 없는 지정학적 요인 등 여러 차이나는 요인이 있겠지만, 각기 하나의 국가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두 국가의 태도는 전적으로 대비됩니다.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타인의 고통의 현실을 직시한 독일은 이웃나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을 뿐 아니라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자신들도 피해자라는 시각에 매여 이웃나라 사람들이 겪은 고통의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일본은 얼마나 심각한 민폐를 끼치고 있습니까?

이 두 국가의 사례는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막연한 형이상학적인 물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 그 안에서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고,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 물음으로 우리가 저마다 겪고 있는 난관과 고통을 극복할 뿐 아니라 진정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깨닫고, 그 뜻을 삶 속에서 체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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