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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보여주는 숲”운학 박경동의 「大象無形」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9.06 16:01

땅바닥에 놓인 거대한 한지에 붓이 스치는 소리만 침묵을 갈랐다. 한지에 써내려가는 글자들은 붓 잡은 이의 몸짓과 함께 율동했다. 붓으로 쓰지만 써내려가는 붓에 이끌리는 듯, 작가의 어깻짓은 붓과 춤추는 듯했다. “대상무형大象無形” 도덕경의 유명한 구절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형形’자를 시작하는 힘찬 몸짓에 먹이 화선지 밖에까지 튀었다. 글이 태어나고 있었다.

▲ 운학 박경동「대상무형 大象無形」1.2 × 3m 2019 한지에 먹

팝아트 작가 Billy The Artist를 초대한 자리에서 운학 박경동 작가(云鶴 朴慶東)가 써내려간 작품이다. 화가, 무용가 등이 함께 모인 만남에서 갑작스런 제안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당시를 묘사하고 다시 읽어보니 조금 과장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만큼 강렬한 기억인 탓이다. 저 글자들이 내겐 그저 대상무형이라는 문자일 수가 없다. 출산의 장면을 함께 맞이한 것처럼 살아있는 의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마지막 글자에서 붓을 떼고 잠시의 침묵에 이어 입을 열었다. 대상무형을 상형문자 형식으로 묘사하고 그 옆에 다시 한자로 풀어쓴 이유를 전해주었다. ‘큰 모양에는 형상이 없다.’ ‘큰 코끼리에는 모양이 없다.’ 너무나 크면 그 모양을 다 볼 수 없듯이, 서로를 섬겨주고 사랑해주는 마음도 그렇다는 뜻이었다. 사랑의 마음도 보이지 않지만 크기와 깊이를 다 알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아직 표구도 하지 않은 화선지 그대로를 갤러리 바닥에 펼쳐 두고 날 것 그대로를 음미한다. 모양 상象을 코끼리 모습으로 표현했다. 큰 대大는 사람이 팔과 다리를 마음껏 펼친 모습이다. 붓글씨가 지닌 매력이다. 상형문자에 뿌리를 둔 한자는 글자를 쓰지만 동시에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 같은 글자도 그 그림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그런데 없을 무無가 이상해보였다. 없을 무도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없을 무無도 큰 대大처럼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다만 한쪽 다리를 들고 고개도 기울었다. 두 손도 굽힌 모습이다. 없을 무 자를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물었다. 없을 無가 춤출 무舞와 깊이 관련된다고 박경동 작가가 답했다. 신 앞에 춤을 출 때, 그 사람에게 신이 깃들어 자기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춤출 무는 곧 없을 무와 깊이 연관된다. 그 뜻을 알고 다시 보니, 없을 무 자에서 춤사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저 글귀를 쓴 그 날, 함께 한 어느 무용가가 즉흥공연을 했다. 마음을 비우고 음악에 따라 몸이 흘러가는 대로 춤을 추었다. 춤출 무가 없을 무가 되는 장면이었다. 없을 무로 춤출 무를 표현한 즉흥공연인 셈이다.

대상무형大象無形은 도덕경 41장에 나온다. 익히 알려진 대기만성大器晩成에 뒤이어 나오는 구절이다.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善貸且成” 오강남의 도덕경에서는 이렇게 풀이한다. “큰 모퉁이에는 모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더디 이루어지고, 큰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큰 모양에는 형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도는 숨어 있어서 이름도 없는 것, 그러나 도만이 온갖 것을 훌륭히 가꾸고 완성시켜 눕니다.”(오강남 저 『도덕경』180쪽)

도덕경의 맥락 안에서 대상무형大象無形은 도道에 대한 묘사다. 어리석은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비웃는 도道, 그러나 오히려 어리석은 이들의 비웃음이 도가 진리임을 반증한다. 죄악으로 뒤틀린 세상은 주님을 신성모독자로 능멸하고 죽였다. 실은 그것이 주님께서 진정 진리이심을 반증한 것과 닮았다. 그런 도道를 왜 알아보지 못하고 비웃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너무 커서 그 모퉁이도, 크기도 보이지 않고,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고. 대상무형大象無形을 도덕경의 맥락 안에서 이렇게 이해하며 머리를 끄덕일 수 있다. 그러나 붓글씨로 펼쳐내고 그 작품을 마주할 때는 다른 차원이 열린다.

박경동 작가가 대상무형大象無形을 써내려가는 모습은 춤으로 다가왔다. 붓과 함께 하는 춤으로 보였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악보이기도 하다. 글귀를 써나가던 몸짓의 리듬을 먹빛의 농담에 따라 보여주기 때문이다. 화선지 위에 묵향을 머금은 글씨들은 이미 글씨가 아니라 그림이다. 글로 다 풀어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의미들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지를 힘껏 벌려 보이지 않는 도를 온몸으로 끌어안는 몸짓이 보인다. 거대한 코끼리의 보여지 않는 뒷면을 그려보게 한다. 무엇보다 한 다리를 들고 팔을 굽혀 춤추는 사람의 텅 빈 마음, 없이 있는 마음이 보인다. 붓글씨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 끊임없이 변주된다.

붓글씨를 통해 만나는, 멈추지 않는 변주는 도덕경에서 말하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의미도 다르게 보여준다. 큰 그룻은 더디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푸는 대기만성, 그러나 여배림, 이이가 쓴 『도덕경에 대한 두 개의 강의』에서는 다르게 푼다. “큰 그룻은 완성형이 없고.”(『도덕경에 대한 두 개의 강의』199)라고 풀이한다. 그 이유는 문맥이다. 앞뒤에 흘러가는 문맥은 ‘없다’는 이야기의 연속이다. 모퉁이가 없고, 소리를 들을 수 없고, 형태가 없다. 그래서 만晩도 없을 무의 의미로 읽는 것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은 바로 ‘대기무성大器無成’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그릇은 고정된 형태가 없고, 또한 고정된 용도가 없음을 이른다. ‘대기大器’는 ‘도道’를 비유한다.”(『도덕경에 대한 두 개의 강의』, 202)

대기만성이 대기무성이듯 대상무형大象無形의 의미 역시 완결(이룸)이 없다. 도道만 이룸이 없는 것이 아니다. 도道를 담으려는 예술도, 마음도 이룸이 없다. 끊임없이 변주되어 살아나고 춤춘다. 춤으로, 글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마주한 사람의 마음마다 새롭게 살아난다.

물론 모든 예술에서 다 이런 변주가 가능하다. 경전을 읽고 묵상할 때도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와 깨달음이 깃들 수 있다. 그럼에도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붓글씨를 너무 몰랐던 탓이 크다. 사실 책을 펼쳐 대상무형大象無形을 읽는 것과 화선지 위에서 읽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하얀 종이 위에 글자가 적혀 있고, 경전을 읽듯 그 뜻을 풀이하여 이해하는 정도 이상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춤과 음악과 그림이 뜻을 살려내고 있었다. 뜻밖에 만난 아름다움이라 더 매력적이리라.

무엇보다 깊게 울려오는 지점은 붓글씨를 써나가는 마음이다. 유화 중심의 서양 미술을 감상할 때는 심리학적 해석이나 사회학적 해석이 물론 있지만 주로 작품에 표현된 의미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붓글씨 작품은 그 글을 쓴 작가의 마음과 몸짓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어떤 글씨는 참 멋있는데, 마음이 가지 않는다. 반면 어떤 글씨는 상대적으로 어설퍼 보이는데 마음이 끌린다. 글귀를 멋지게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글씨에는 삶과 진심이 담기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글씨에서 삶과 진심을 읽어낼 수도 있을까?

박경동 작가에게 물었다. 붓글씨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지. 글자만으로 거짓인지, 진실인지 볼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우선 작가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먹빛의 농담, 선의 굵기 등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속도로, 또 어떤 몸짓으로 써나갔는지 알아볼 수 있다. 물론 서예를 오래 동안 해온 안목에서다. 이상해 보이는 삐침 하나를 물어보니, 직접 그 글자를 쓰면서 삐침을 보여준다. 그 순간 작가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인다. 그렇게 한 글자 한 글자가 어떤 몸짓으로 썼는지를 보여주었다. 기쁨과 설렘인지, 굳은 결의인지, 재주를 자랑하려는 치기인지.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면, 진심인지도 읽어낼 수 있을까? 작가가 서예書藝와 서노書奴를 구분해주었다. 서노書奴는 말 그대로 글씨의 노예다. 누구보다 뛰어나고 멋진 글씨를 써서 세상에 보여주려는 욕망에 붙들린 사람을 이른다. 그러나 서예는 다르다고 한다. 참된 붓글씨는 진심을, 삶을 담는 예술이라는 뜻이다. 그는 예술藝術이 예술禮術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재주를 갈고 닦는 기술의 차원을 넘어서서 마음 속 예禮를 닦는 길이라는 뜻으로 다가왔다.

박경동 작가는 붓글씨에서 글 쓴 사람의 진심도 읽어낼 수 있다고 한다. 누군가가 작가에게 정직이라는 두 글자를 써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다. 꽤 오랜 기간 정직을 쓰고 또 썼지만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단 두 글자이지만 쓸 수 없었다. 친누님의 부탁으로 주기도문을 써주려 한 일도 있다. 주기도문을 쓰기 위해 몇 달을 준비했다. 성서를 읽고 기독교 신앙을 공부하고 쓰고 또 쓰고 몇 달을 써봤지만, 결국 쓸 수 없었다. 불교에 가까운 신심을 지닌 탓에 진심이, 삶이 아닌 글을 쓸 수 없었던 탓이다.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로 보일 수도 있다. 정직하지 않아도 정직해지려는 뜻으로, 정직하게 살자는 뜻으로 쓸 수 있지 않은가, 주기도문도 그렇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해가 간다. 자신이 평생을 서예에 몰두했고 글씨에서 작가의 진심이, 삶이 보인다면 어떨까? 자기 글에서 거짓이, 치기가, 위선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처럼 읽어낼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다. 혹시 알아볼 사람이 드물어도, 자기 자신은 안다. 그런 작가에게 붓글씨는 알몸을 드러내는 일과 같다. 자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니 어찌 그대로 전시하거나 누군가에게 줄 수 있겠는가.

붓글씨는 그러므로 바람을 보여주는 숲과 같다. 창밖, 혹은 저 먼 허공에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숲은 춤을 추며 바람을 그대로 보여준다. 붓글씨 역시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준다. 춤으로, 그림으로, 글로 자기 마음을 비추고 또 보여주는 예술이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진심을 드러내는 고백과 같다. 그래서 글자 한 자 한 자를 쓰면서 진심을 확인하고 진심을 닦는 수행이다. 선물하거나 전시할 수는 없어도 그 글귀가 자기 내면에 새겨져 삶이 되도록 쓰고 또 쓸 수 있다.

서노書奴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설노舌奴(혀의 노예)가 아닌가 하고. 설교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설노說奴도 있겠지만, 그저 혀에 붙들려 말재간으로 사는 혀의 노예도 있지 않은가. 사실 십 수 년 설교를 하면서 다른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 진심인지 아닌지, 진실인지 아닌지. 설교의 달인이 아니어도 함께 살아온 성도 중에도 알아볼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혀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서예의 아름다움이 자화상을 비춰준다.

마음을 닦는 길로서 붓글씨는 기도를 비춰주기도 한다. 서양화와 달리 검은 먹빛 한 가지로 표현하는 붓글씨는 지극히 단순하고 심심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먹빛은 검은 색 하나가 아니다. 어느 서예에게 들었다. 요즘이야 먹물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작품을 할 때는 역시 먹을 간다고 한다. 이때 누가 어떻게 먹을 갈았느냐에 따라 먹빛은 다 다르다고 한다. 함께 고인 먹물도 위치에 따라 빛깔이 다르다. 먹빛 한 가지에서 찾아내는 무수한 빛깔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묘미가 있는 것이다. 화선지에 위에서 번지는 먹빛에도 최소한 검정(玄), 보라, 청색이 있고, 그 사이에 무한한 색이 있다니.

누가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먹빛이 다르다면, 반대도 가능하다. 갈아놓은 먹빛만 봐도, 간 사람의 성품, 태도, 먹을 간 순간의 마음이 드러날 수 있다. 먹을 가는 순간이 단순한 준비가 아닌 이유다. 먹을 갈면서, 마음도, 태도도 갈고 또 가는 것이다. 먹이 깊고 고은 빛이 되는 만큼 마음도 깊고 고와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스승인 여초 김응현 선생이 운학 박경동 작가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매일 30분씩 정성껏 먹만 갈아도, 붓글씨가 깊어지고 성숙해진다고.

하루의 시작과 끝에 매일 드리는 기도가 먹을 가는 과정이면 어떨까? 예수기도나, 향심기도는 그저 가만히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드리는 태도를 수없이 반복한다. 잡념이, 망상이 끼어들면, 그저 다시 주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런다고 특별한 일이나 신비한 체험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욕망과 두려움의 잡념들을 갈고 또 갈아 주님을 향하는 고운 결을 만들 뿐이다.

먹을 가는 순간에는 한 글자도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깊은 먹빛으로 모든 글자를 잉태한다. 주님을 향해 마음을 드리고 또 드리는 기도 역시 그 순간에는 무미건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곱게 다듬어진 마음에서 나오는 눈빛, 말, 태도는 주님을 향하지 않겠는가. 주님을 향한 마음이 곱고 깊게 우러난 몸짓이 태어나지 않겠는가.

화선지에 수놓은 글씨만 봐도, 그 빛깔과 선만으로 글쓴이의 마음, 감정, 태도를 읽어내는 작가들을 마주한다. 삐침 하나, 꺾음 하나하나에서 어떻게 그리 읽어낼 수 있는지 곁에서 지켜본다. 참으로 신기하고 매력적인 예술이다. 동시에 경종이 울린다. ‘내 눈빛, 음색, 말… 그 하나하나에도 저렇게 마음이 베어나겠구나.’

‘먹을 곱게 갈고 또 갈듯, 마음을 갈고 또 갈아야겠구나.’ 가슴속에 바람이 일어난다.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갈고 또 가는 기도, 먹을 갈듯 그 기도로 마음을 갈아야겠구나.’ 감히 마음먹어 본다. 먹을 가는 단순한 몸짓이 기도라면, 앉은 기도만 기도일까. 일상 속 수많은 몸짓이 다 먹을 갈듯, 마음을 가는 기도와 둘이 아니리라. 묵향 그윽하듯, 주님 향기 그윽한 몸짓을 향해 삶을 가는 기도가 온 삶에 스며들리라. 붓글씨가 마음의 바람을 보여주는 숲이라면, 신앙의 삶도 하나님 영의 바람을 보여주는 은유이니.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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