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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후보 전술에 뛰어들다양김 단일화 실패와 민중독자후보 백기완
김정택 목사 | 승인 2019.09.07 19:36

텔레비전에서 노태우가 직접 나타나 직선제 개헌의 수용, 구속자 석방, 김대중 씨의 사면과 복권을 주요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국민들은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얼떨떨 하다가 곧 이를 승리로 받아들이고 환호하였다. 허기야 그럴만 하기는 했다.

노태우 6.29선언이 가져 온 폭풍

6.29직전만 하더래도 6월 18일을 기해 계엄령이 발포된다. 서울, 부산, 광주, 대구 등에 공수부대가 파견되었다는 소문이 난무하였다. 이게 소문이 아니라 실제임을 뒷받침하는 19일 저녁 이한기 총리의  긴급담화문 발표도 있었다.

끝내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법과 질서의 회복이 불가능해진다면 정부로서는 불가피하게 비상한 각오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군투입을 각오하고 더욱 가열차게 투쟁해 나가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6.29선언이 발표되자 재야정치인들은 재빠르게 정당간의 민주헌법 개정작업에 착수하였다. 민족민주진영도 보다 진전된 민주헌법만들기에 주력하려고 하는데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면서 노동자대투쟁에 합류하거나 협력하는 일로 빠져들어갔다.

▲ 노태우 씨가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를 발표한 6.29선언 ⓒGoogle Image

울산의 남성노동자들, 투쟁에 나서다

7월3일, 우리나라 최대 중공업도시인 울산의 현대엔진에서 노동조합(위원장 권용목)이 결성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동조합 하나 만들어지는것이야 별 사건도 아닌데 현대왕국에서는 처음 만들어졌기에 미래에 일어날 큰 사건의 불씨로 여겨졌다. 7월15일에는 현대미포조선노동조합이 결성됬고 노조결성 움직임이 현대그룹 전체 계열사로 번졌다.

이들은 단결만이 힘이 있음을 몸으로 체득해 왔기에 바로 현대그룹노조협의회(의장은 현대엔진 권용목위원장)를 조직하고 임금인상과 처우개선을 위한 공동교섭, 공동투쟁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사업장 안의 농성에 머물지 않고 시내로 나가 가두 시위를 할 때는 전에는 남편들이 투쟁에 나서는 것을 그토록 막던 가족들도 합류하였다. 지역주민들과 상인들도 열렬하게 호응하였다.

울산 전역은 노동자 투쟁의 불길에 완전히 휩싸였다. 이 불길은 들불이 번지듯이 대단한 기운으로 부산, 거제, 마산, 창원으로 번지더니 드디어 서울, 인천, 부천, 안양, 군포, 성남 등 수도권으로 옮겨 붙었다. 대규모 남성사업장들이 대거 진출함으로써 노동자 대투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폭발적이고 격렬하고 끈질겼다.

나는 79년 EYC전국회장으로 YH사업장 여성노동자집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15-17세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머리에 빨간띠를 동이고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고 노동가요를 부르는 모습이 너무나 강열하게 다가와 몸이 짜릿짜릿함을 느꼈다.

여성사업장이 이러할진데 남성사업장은 어떠할까 군사독재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능히 노동자에게서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산업선교.노동운동에 투신했는데 바로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그 힘을 직접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뜻하지 않은 가슴아픈 죽음들

7월 중순이 지나면서는 날씨도 지독히 더웠다. 인천에서는 인천기독노동자연맹을 중심으로 하여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인천민중교회연합, 노동운동조직들 대표들이 모였다. 더운 여름 물놀이도 하면서 몸도 식히고 하반기 노동자투쟁도 준비하는 대회도 하기로 하였다. 장소는 금강 상류에 위치한 메포수양관으로 정했고 제목은 제2회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라고 하였다.

360여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는데 첫 프로그램으로 물놀이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 모래 채취로 웅덩이가 파져있는 것을 비가 와서 물로 덮혔기에 몰랐다. 몇 동지가 빠지는 것 같더니 구하러 또 몇 동지가 뛰어들고 그러다가 몇동지는 헤어나오지 못했다.

참으로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결국 인간띠를 잇고 인근의 배도 띄워 봤지만 허사였다. 김현욱, 박용선, 이대용, 유인식 노동형제들은 먼저 빠진 동료들을 구해내고 힘이 빠져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밤새 시신을 찾아 헤메고 다음날에는 유가족들이 다 왔는데 유가족들의 슬픔과 원통함을 어떻게 풀어줄 수가 없었다.

종렬이 형이 제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위로도 하고 같이 슬퍼하고 유가족들을 만났으나 부모들의 분노를 누구러뜨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분노는 위로하고 사과하고 어떻게라도 책임을 질려고 노력하는 종렬이 형한테로 퍼부어졌다. 종렬이형이 주먹질을 당했다. 때린 아버지가 유인식의 아버지였다.

인식이는 학출이다. 그러니 그 아버지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겠는가! 공장생활 하는 것도 못봐줄 일이었는데 또 노동자 수련회라고 와 물에 빠져 죽어! 그 분노가 종렬이 형한테 쏟아졌다. 인식이 누나가 노동자수련회에 처음부터 같이 참여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를 모시고 왔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바로 그 자리에 있어 아버지를 달래고 사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유은하는 인천감리교 청년운동출신이다. 동생 죽음에 마냥  서러워할 수만은 없었다. 장례는 치러야 하고 사태 해결에 나섰다. 기독노동자연맹이나 인천도시산업선교회나, 민중교회나 무슨 보상할 능력이 어디 있는가? 그냥 유가족 처분만 바랄 뿐이었지.

의외로 노동자 부모들은 순했다. 다 그냥 용서를 해줬다. 또 자식의 죽음을 운명이거니 속으로는 타들어가는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덤덤하게 잘 넘겨 주었다. 인식이 부모는 지독한 사랑이라고 할까, 가족의 희망으로서 거는 기대가 컸었던 것일까 좌절감이 극으로 치달았다.

하여튼 일체의 보상도 없이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4인의 죽음으로 노동자대투쟁을 준비하자던 프로그램은 무로 돌아갔다. 참가노동자들은 훌륭한 동지들을 잃어버린 채 각자의 현장으로 돌아갔다. 과연 4인의 노동자를 잃기만하고 끝난 노동자수련회는 인천의 대투쟁의 불길에  조금이라도 물을 끼얹는 역할은 하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난다. 이대용이 생각나서다. 이대용이 속한 노동자모임이 송현산마루교회에서 모임을 할 때 내가 참석한 적이 있다. 내가 참석했을 때는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돌아가면서 나에게 노동자, 노동운동은 무엇인가를 얘기해 보는 시간이었다.

대용이 차례인데 등치도 크고 정말 수려하게 생긴 젊은 친구가 “노동자는 나에게 어머니다. 노동자는 나에게 정신적 영양을 계속 공급해주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때 그 말이 나의 머리에 충격을 주었다. 그후로 대용이는 어떤 노동운동가가 될까 궁금했다. 그런데 동료를 구하다 물에 빠져 죽었으니 김정호도 일찍 죽고 김의기도 일찍 죽고 이대용도 일찍 다 20대 초반에 죽었으니 하여튼 이러면 안 되는데 서럽다.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둘러싼 혼란들

노동자대투쟁이 끝나자 재야정치인들은 군사정권과 타협하여 단임 5년,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만들어 10월12일 국회의결을 거쳐 10월27일 국민투표로 마무리 하였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일을 12월16일로 확정하였다. 대통령 선거일이 정해지자 대통령선거라는 블랙홀은 정치인과 국민들을 온통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민족·민주운동진영도 역시 빨려들어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소문정치의 힘까지 작용하면서 민주화운동진영에 여러 입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 소문은 김근태가 비판적 지지라는 입장을 취했다는 소문이 내귀에 들어왔다.

근태 형은 감옥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자기 입장을 내어놓을 수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근태 형은 대단히 신중한 사람이고 본인 입장을 먼저 잘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것도 정보 수집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감옥에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라는 입장을 내세웠다고 하니 도대체 수긍이 안 되었다. 운동권 제1의 상징적 인물의 입장이라는 소문은 민족·민주운동진영 전체를  삼켜버렸다.

다음으로는 문익환 목사가 비판적지지 입장을 취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교회권이 온통 요란해졌다. 소문은 비판적 지지의 정확한 내용이나 김근태, 문익환의 실제의 견해를 알고자 하는 관심은 눌러 버리고 김대중을 지지하기로 했다더라는 것만 번지게 하였다.

10월13일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범국민적 후보로 김대중 고문을 추천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김대중, 김영삼을 많이 접해 두 사람의 인품을 아는 사람들은 김대중과 김영삼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두 사람을 직접 접한 적이 없어 차이를 논할 자격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비판적 지지가 별로 설득력 있게 다가 오지가 않았다. YWCA사건으로 대전교도소에서 공범들이 합방생활을 할 때 임채정 선배가 “김대중 선생이 죽으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며 김 선생의 안위를 걱정할 때도 대수롭지 않게 넘긴 나였으니까.

이번에는 박형규 목사가 후보단일화 입장에 섰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그때 “아하, 이제 제대로 된 입장이 나타났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명망가 상층의 후보단일화는 김영삼 지지라는 해석이 나돌았다. 도대체 이건 무슨 셈법인가? 결과적으로 명망가 상층부의 단일화는 힘없는 단일화이고 통일민주당의 총재 김영삼을 도와주는 모양새를 취하게 될거라는 점쟁이의 점 비슷한 셈법이다.

그러면 힘있는 단일화는 어떤 것이지? 김대중, 김영삼 어느 쪽에서든 군사독재를 끝장내기 위해서 내가 양보하겠다는 선언이 어느 쪽에서든 나와야 할텐데 안 나오는 것을 보면 두사람 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이 분명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김영삼 총재는 10월10일 대통령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고 10월28일에는 김대중 고문이 대통령 출마와 평화민주당 창당을 공식선언하였다.

민중독자후보전술, 백기완 선생이 서다

이제는 대단한 민의 힘으로 양김에 압박을 가해야 혹시 단일화를 이룰 수 있을까 다른 길은 없어 보였다. 이때 나타난 것이 민중독자후보 전술이었다. 선거시기에는 후보가 있어야만 대중에게 힘있게 다가갈 수 있고 입장을 분명하게 전달하여 힘있는 단일화의 힘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단일화를 시켜낼 수 있는 선거시기의 힘있는 전술! 민중독자후보전술이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 민중독자후보로 나선 백기완 선생 포스터 ⓒGetty Image

소리꾼 임진택(당시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대책본부 특별보좌관)은 백기완 선생이 민중후보로 나서게 된 장면을 그야말로 소리꾼답게 묘사해 놓았다. 그 해, 한겨레신문이 창간 되던 날, 행사장인 YWCA강당에 백기완 선생을 민중후보로 추대하자는 긴급전단이 나돌았다. 분위기가 뒤숭숭 할 때 앞서 축사를 하던 내빈 한분이 민중후보 추대는 누군가의 공작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우려하였다.

그런데 다음번 축사는 백 선생 차례였다. 연단에 나선 백 선생은 무거운 분위기로 말을 시작하였다. “여러분! 방금 어느  인사께서 이 시점에 민중후보를 추대하는 것은 누구의 공작일거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공작이 틀림없습니다.” 순순히 비판을 시인하는 듯하던 백 선생이 돌연 목소리를 높여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여러분! 이 백기완을 민중후보로 추대한 주체는 바로 민중입니다. 다른 누구의 공작도 아닌 바로 민중자신의 공작입니다. 건곤일척! 목숨을 걸고 진검으로 겨뤄야 하는 단판 승부!” 일순 장내가 조용해지면서 정적이 잠시 흘렀다.

인천에서도 백기완 민중후보 인천선거대책본부를 결성하였다. 본부장은 나에게 맡겨졌고 중심적인 역할을 할 사람으로서는 황선진, 인하대 김영규 행정학과 교수가 있었다. 그리고 주축은 노동운동 조직들이었다.

공개적으로는 단일화를 이루어내는 유력한 무기로서의 민중후보전술이 선전되었지만 내부를 보면 참여 주체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일화는 이미 물건너갔다고 단정하고 독자민중후보가 끝까지 완주하여 진보정당의 토대를 쌓는데 주력하는 것이 옳다는 정파들도 있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자하는 조직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내부에서 심각할 정도의 대립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끝까지 갈 것인지, 중도에 사퇴할 것인지는 상황을 봐가면서 후보 중심으로 판단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인민노련의 중심인물이었던 노회찬이 어느 인터뷰에서 87년 민중후보 전술에 대해 피력한 대목도 당시 내부 사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인민노련은 공개적인 민중정당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1987년 백기완 선생을 대선후보로 내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합법적 진보정당을 만드는 노선을 선택한 것이지요.”

나는 주로는 역전의 용사가 되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전철역이었다. 그렇다고 전철역 앞에서만 연설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어느 정도 있는 장소라면 백 선생이 왜 민중후보로 출마했는지를 단순하면서도 간결하게 힘주어 또릿또릿 하게 포효하듯 말하였다.

목이 쉬면 쉰대로 말하였다. “이 지긋지긋한 군사독재를 끝장내기 위해서, 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 시민의 힘을 모아 양김의 후보 단일화를 시키기 위하여 출마했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였다. 물론 후보단일화를 시키면 백 후보는
분명히 사퇴할 것임도 빠뜨리지 않고.

12월16일 대통령 선거 이틀전 12월14일, 대학로에서 백기완 후보의 마지막 유세가 있었다. 전국에서 30만이 운집하였다. 백 후보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후보단일화를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으나 양김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후보단일화를 위한 우리들의 노력은 실패했다. 이제 나는 사퇴하겠다는 뜻을 피를 토하듯이 정말로 슬프게 울먹거리며 뱉어내었다.”

김정택 목사  kjt94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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