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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열려 있고, 카이로스는 뜻하지 않게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렘18:1-11; 몬1:17-21; 눅14:25-33)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19.09.10 18:28

< 1 >

오늘의 누가복음서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세 가지 조건과 언뜻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세 개의 짧은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첫째 조건은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는 것입니다.

부모와 아내, 자녀 사랑이 신앙 양심과 충돌할 때,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제자의 길이라는 것은 비록 따르기는 쉽지 않지만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부모를 묵인한 것의 결과를, 잘못된 자식 사랑이 자식을 오히려 망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미워해야 한다’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 부모나 부부, 자식,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십계명은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디스트(sadist)나 마조히스트(masochist)’가 되기를 원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미워해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주석학자들은 ‘미워하지 않으면’이라는 단어는 인간적 감정을 가리키는 단어라기보다는 문맥상 히브리어에서와 같이 ‘버리다’라는 포기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 ‘미워하다’는 단어를 ‘버리다’의 뜻으로 이해하면, 세 번째 제자직의 조건, 곧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자기 소유, 그것이 부모와 형제자매, 자녀들이건 재산이건, 자기 자신의 목숨이건, 자기 소유를 버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신앙생활을 오직 ‘덧셈’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직을 ‘뺄셈’으로 제시하시기 때문입니다. 버리고 또 버리면 남는 것이 없을 터인데, 마지막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의 마지막이라는 말일까요?

그러나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는 법,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이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계산해 봐야겠지요. 망대를 세우려는 건축가가 먼저 비용을 셈하여 보고 시작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것처럼,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하는 어리석은 건축가처럼 되어서는 안되니까요(눅 14,28-30). 그렇다면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하는 건축가는 누구일까요? 믿음이 없어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이지요. 작은 시련이나 시험, 고통이나 고난에 믿음이 흔들리는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보다고 생각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전쟁에 나서면서 적의 전력을 헤아려 보고, 승산이 없으면 적이 아직 멀리 있는 동안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지혜로운 임금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셈하고, 헤아려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눅 14,31-32)

그런데 놀라운 것은 셈하고 헤아려 보아도, 그 마지막에 무엇이 남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직은 부모와 형제자매, 자녀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면서 획득할 만한 가치를 지닌 어떤 물건이 아닙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떠나, 완전히 불안정한 생활로 들어오라는 말입니다. 전망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생활에서 떠나, 전혀 예측할 수 없고 우연한 생활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 바울의 동역자였던 빌레몬은 그의 주인 오네시모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Getty Image

그러나 디트리히 본회퍼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완전히 불안정한 생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절대적으로 안정되고 평안한 생활로 들어가는 길이고, 전혀 예측할 수 없고 우연한 삶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일하게 필연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생활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자직이 뺄셈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입니다. 덧셈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매이는 것이 제자직의 마지막입니다. 그러므로 순종과 믿음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믿음의 결과가 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이 믿는 것입니다. 믿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다시 주실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믿어도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을 믿는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믿음의 시작이자 마지막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이고, 믿는 사람은 순종합니다. 순종과 믿음은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적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의 대가는 오직 믿음 그 자체인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려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목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다시 말해 자기 목숨도 버릴 수 있어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학이나 자살을 권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와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억압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길이 필연적으로 십자가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아셨기에,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가족과의 불화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건, 자기 소유와 목숨을 버리는 것이건, 제자직은 불안정한 현재, 불확실한 미래에로의 초대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계산하고, 이리저리 헤아려 보아도, 제자직은 ‘덧셈’보다는 ‘뺄셈’처럼 보입니다.

< 2 >

바울이 사랑했던 동역자 빌레몬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레몬은 믿음과 성도들에 대한 큰 사랑으로 바울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마음에 생기를 얻게 해 준 인물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의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그에게서 도망쳐 바울에게 간 것입니다. 격분했을 것이 분명한 빌레몬은 도망친 노예를 잡아 처형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호의를 청하는 편지와 함께 오네시모를 그에게 되돌려 보내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그의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으로서가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바울을 그렇게 대했듯이 그를 동지로 생각하고 맞아주기를 부탁한 것이지요(빌레몬서 1,17). 심지어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 마음’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노예가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사도 바울의 서신을 가지고 가기는 하지만, 오네시모는 신변의 안전을 확신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다른 서신인 골로새서 4장 9절을 보면 오네시모가 그 후에도 ‘사랑 받는 신실한 형제’로서 활동한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를 통해 우리는 초대 교회 안에서 노예와 노예주 사이의 계급적, 신분적 차이가 있었으나, 사람을 오직 ‘쓸모’로만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 차이가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서로의 생각과 의견이 충돌할 때는, 또는 설령 자신의 입장에 거스르는 일일지라도, 자신의 고집을 꺾고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의 행위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는 것이 제자의 길이라는 누가의 증언을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정치적 죽음이나, 자학적 고해가 아니라, 확대하여 해석한다면, 불신앙의 자아를 버리고 오직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33)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모든 크리스천이 성 프란체스코처럼, 거지 성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재물이 전혀 없는 듯이 재물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재물에 걸지 말라는 것이지요. 재물을 하나님이 맡기신 선물로 생각하는 착하고 신실한 청지기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처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도로 찾으면, 우리가 장만한 것들이 다 다른 사람의 것이 된다는 것’을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눅 12,16-20). 사도 바울은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사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고후 6,10).

< 3 >

그래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한 것입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님 손 안에 있고, 그 진흙으로 무엇을 만들지도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마음과 손에 달린 것입니다.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도, 어떤 민족이나 나라를 세우고 심는 것도, 주님께서 하십니다. 죄악 때문에 멸망할 민족과 나라일지라도 그들이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주님은 재앙을 거두시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악한 일을 하는 민족이나 나라에게는 약속하신 복을 거두신다는 것이 예레미야의 증언입니다(렘 18,1-10).

한 인간의 운명만이 아니라, 한 민족이나 나라의 운명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믿음 때문에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전 627년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후, 살해 위협과 암살 음모 속에서도 값싼 평화와 구원을 선포하는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면서, 멸망해가는 자기 조국 유다에 미치는 재난을 예언해야 했습니다. 자기 조국 유다만이 아니라, 제국과 세계의 운명도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예레미야의 선언을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등 제국은 비웃었을 것입니다.

세계의 운명이 자기 손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제국에게 그것은 가소로운 일이었겠지요.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벨론 제국의 세계통치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바벨론 제국도 마침내 또 다른 제국에 의해 멸망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렘 50,1-3). 비록 자기 조국 유다의 운명이 주변 강대국인 바벨론, 그 뒤를 이은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결정되겠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제국의 심판자이시며 세계사의 운명을 궁극적으로 결정하신다는 믿음으로 국제적 역학관계를 판단한 것입니다.

올 해는 삼일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발발 80년, 독일 통일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지난 9월 1일, 독일 대통령 슈타인마이어는 폴란드의 비엘룬을 방문, 80년 전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으로 희생된 600만 명의 폴란드인들에 대한 사과는 물론, 인류 앞에서 사죄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전범 국가인 이웃나라 일본의 태도는 그에 비해 치졸하기 짝이 없습니다.

1989년 동서 베를린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지는 날, 저는 독일 함부르크에 있었습니다. 당사자인 독일 사람들은 물론, 어쩌면 지구 위에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독일 통일을 현지에서 같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전환은 기획되거나 사람이 계획한 대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처럼 보이는 ‘(카이로스적) 사건’으로 촉발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났습니다. 독일 통일 후, 평화통일운동을 해온 한국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여러 학술단체와 시민단체들, 심지어는 정부도 나서서 독일 통일로부터 교훈을 얻으려 했습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일방적인 흡수통일은 안 된다’, ‘서독 같은 경제 강국도 통일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남북의 통일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옛 동독인들에 대한 서독인들의 혐오와 차별을 극복하고 사회통합을 이루는 데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다 맞는 말입니다.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우리가 배우고 한국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지만, 독일의 통일 경험은 중요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통일 이후 30년 동안 지속된 사회통합을 위한 노력만이 아니라, 분단 후 통일까지 44년간 이어진 동서독의 교류, 그리고 화해를 위한 정부 간, 교회 간 협력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반도의 상황입니다. 통일은커녕, 평화의 길조차 요원합니다. 주변 강대국, 특히 미국과 일본, 중국의 입김에 이리저리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남한 정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은데, 북한의 대남 비난도 사태를 종잡을 수 없게 합니다. 혹자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럭비공 같은 성격이나, 비즈니스 마인드, 노벨평화상에 대한 욕구, 재선 타이밍 등을 들어 북미관계, 남북관계 개선을 낙관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남북의 분단 상황이 자국 이익에 도움이 되는 한, 주변 강대국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분단 상황을 유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 내부의 상황은 어떤가요?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 주한미군 주둔비 협상이나 일본의 수출제한 조치, 일본과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남한 정부는 대북 협상에서 미국의 간섭과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미중 무역전쟁, 일본의 수출제한 압박에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 협상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남한을 종속변수처럼 여기고 행동합니다. 숨이 막히고 속이 타는 것 같습니다. 조속한 시일 안에 통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고, 또 그걸 기대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전쟁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사는 마치 강대국들이 만들어가는 것 같지만, 역사의 변화는, 앞서 언급했듯 결코 기획되거나 인간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열려 있고, 카이로스는 예상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사건이기에, 밧모섬 유배지에서 기도했던 요한처럼 우리도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계 22,20)이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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