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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선택: 아브라함과 ‘선재(先在)적 메시아’(창 12:1-9;갈 3:1-14;요 8:53-59)창조절 셋째 주일(9월15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9.13 22:43

1. 한 사람의 선택

우리는 창조절 두 주 간을 지내오며 한 사람의 타락과 공동체의 타락을 살펴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타락은 아담의 경우였으며, 공동체의 타락은 바벨탑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창조절 셋째 주일 말씀과 다음 주인 창조절 넷째주일 말씀은 이제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곧 새로운 창조(recreation)를 위해, 한 사람을, 그리고 한 공동체(민족)를 선택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한 사람을 선택하시는 말씀인데, 그 인물은 바로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아브람(큰아버지)’에서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으로 이름이 바뀌었죠?

구약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시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합니다. 서신서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인한 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말씀은 이러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넘어 ‘선재(先在)적 메시아’인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말씀이 조금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깊이를 깨닫게 되면, 기독교 신앙의 깊은 영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남신도회 주일인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남신도 회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아브라함,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소명 받아 떠나는 아브람>

창세기를 보면 1장부터 11장까지의 원역사가 끝나고, 이제 12장부터 족장사가 시작됩니다. 특별히 12장 말씀은 아브람에게 소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소명 받은 아브람은 말씀에 순종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1-3)

하나님께서는 복된 땅 가나안을 예비해 놓으시고, 아브람에게 그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아브람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줄 것이며,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아브람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어쩌면 인생의 후반기를 준비해야 하는 아브람이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터전과 기득권, 곧 땅과 관계와 혈통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납니다. 신앙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늘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믿음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 12:5-8)

가나안 땅에서 아브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점점 남방으로 옮겨(창 12:9)”갑니다. 아브람의 삶은 이처럼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한 이유요, 새로운 창조의 역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제단을 쌓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재창조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바울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3.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이방인이 복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참된 의가 무엇으로 가능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예로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6-7)

그리고 중요한 말씀을 하나 더 합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 3:8).”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이방인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나요?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삶을 돌이켜 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복을 받나요? 아니죠!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들을, 교회를 걱정합니다. 신앙에 열매가 없고,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인들의 양면적인 모습에,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는 바벨탑이 되었고, 교인들은 또 다시 선악과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먼저 그들의 믿음을 책망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무슨 말인가요? 갈라디아 교회에 ‘다른 복음(갈 1:6, 1:9)’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른 복음의 핵심을 바울은 이렇게 꿰뚫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사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유대주의적 복음’이 만연했습니다. 즉,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율법과 할례가 구원의 척도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경계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갈 3:4)”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 믿음 때문에 그렇게 핍박과 고통을 받았는데, 왜 다시 그 소중한 믿음을 율법과 할례라는 유대교의 전통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 3:5)”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익숙한 율법과 믿음의 도식이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 도식을 다른 종교를 통해서 한번 살펴볼까요?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Max Müller)는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라고 합니다. 다른 종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좀 더 깊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인도(힌두)의 종교인 힌두교(Hinduism)가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기독교적 구원을 뜻하는 ‘목샤(Moksha, 불교의 해탈)’에 이르는 길을 크게 세 가지로 봅니다. ‘깨달음의 길’, ‘신애(信愛)의 길’, ‘행동의 길’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힌두교에는 여러 철학적 학파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베단타(Vedanta) 학파가 있는데, 그 말은 ‘베다의 끝’이라는 뜻입니다. ‘베다(Veda)’는 인도의 아리아인들이 신들을 찬미한 노래로 그 뜻은 ‘앎, 지식, 지혜’ 혹은 ‘종교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문자로 기록된 것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입니다. 기원전 1500~1200년경으로 연대를 추정합니다.

아무튼 베단타 학파를 창시한 샹카라(Shankara, 788~820년경)는 베다를 통해, ‘깨달음의 길’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라마누자(Ramanuja, 1056~1137년경)는 샹카라가 주장하는 깨달음의 길로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믿음과 사랑의 길(신애의 길)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은총과 사랑이 가득한 인격신에게 자기의 영혼을 완전히 맡기고 신의 은혜를 기다리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라마누자가 죽은 다음, ‘신의 은총’이라는 개념을 두고, ‘원숭이 학파(북종)’와 고양이 학파(남종)가 나눠집니다. 원숭이 학파는 어미 원숭이가 그 새끼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듯, 신이 은총으로 인간을 구원하지만, 원숭이 새끼가 그 어미 원숭이에게 매달리듯, 인간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몫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양이 학파는 어미 고양이가 입으로 새끼 고양이를 옮길 때, 새끼 고양이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전적으로 어미 고양이만 의존하듯, 인간도 오로지 신의 은총을 믿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기독교에서 믿음과 행위를 함께 강조하는 것(곧, 칭의와 성화)과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불교에서도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나눠지죠? 소승(小乘)은 작은 수레, 대승(大乘)은 큰 수레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개인의 엘리트적인 행위를 강조한 자력구원의 소승불교는 기독교적인 행위를 뜻합니다. 그러나 중생 모두의 구원을 위해 행위보다는 믿음을 강조하는 대승불교는 기독교적 은총과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맥락을 전제하고, 계속해서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13)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 핵심적인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구세주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둘째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며’, 셋째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는 구원의 궁극적 내용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대승불교의 이론이죠? 혼자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중생, 곧 이방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까지 구원의 손길이 미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다는 것은 베단타의 고양이 학파의 사상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바울의 생각에서 하나가 됩니다. 믿음과 행위가 부딪힙니까? 그렇지 않죠? 율법과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에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복을 미치는 우리의 믿음의 행위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가 함께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가능합니다.

4. 선재적 메시아: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신 분

그런데, 복음서의 말씀은 이러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 새롭게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 보다 먼저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치려(요 8:59a)”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요 8:53)

<예수를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요 8:54-55)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 칭하시는 그 분을, 예수님은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만이 아버지를 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십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볼까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요 8:57) 

예수님의 놀라운 선포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공관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예수님의 자의식입니다. ‘미래적 메시아’라는 자의식은 마가복음에도 있지만, 이렇게 ‘선재적 메시아’, 혹은 ‘선재적 그리스도론’은 요한복음과 빌립보서(케노시스 기독론, 빌 2:6-8)에만 있습니다. 따라서 선재적 메시아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요 8:59b)십니다.

<성전을 나가시는 예수님>

5. 예수를 돌로 치려하거늘

오늘 세 본문 말씀을 통해, 특별히 복음서 말씀을 통해 겉으로 드러난 주인공은 아브라함이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예수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선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요한복음의 서론인 ‘로고스 기독론(요 1:1-18)’과 선재적 기독론은 동정녀 탄생의 기적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메시아 예수님의 신적 구원을 이야기 합니다.

사실 현재 국제 성서학계에서 학자들의 꾸준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연구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초기 기독교의 신(神)적 또는 선재적 메시아의 기원과 발전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십자가의 치욕적인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나사렛 예수를 신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유일무이한 하나님과 함께 태초부터 선재(先在)한 존재로 믿게 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엄격한 유일신사상의 배경에서 성장한 초기 기독교인들이 한 인간에 불과한 나사렛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믿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동안 학계의 일치된 견해는 고대 이스라엘이 주변국들의 다신론적 신앙과 문화 속에서도 오직 그들의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천지를 창조하고 만물을 통치하는 하나님임을 굳게 믿는 소위 배타적 유일신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은 최근 학계에서 이 견해가 더 이상 합의된 결론이 아닌,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2 성전기(기원전 516년 이후)를 연구하며 학자들은 스룹바벨 유대 총독이 지은 스룹바벨 성전 시대(제 2성전기)에 유대교 내에 선재적 메시아사상이 존재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선재적 메시아사상으로 인해 제2성전기 유일신사상은 이미 포괄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도 있었겠죠? 아무튼 이러한 메시아적 관점이 신약 시대로 들어와 예수님께 신성과 선재성을 부여하는 초창기 기독론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형일, 「선재(先在)적 메시아사상이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 내에 존재했는가?」, 『성경과 신학』 72권, 한국복음주의신학회, 2014 참조)

쉽게 말하면, 바벨론 포로기 이후, 페르시아 시대부터 신구약 중간기에 선재적 메시아사상의 기초가 놓여 졌다는 것이고, 마침내 초대교회 교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신 선재적 메시아, 곧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 우리는 예수님을 돌로 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을 쌓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기준이 우리들 자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만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창조주 하나님께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을 맡기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선택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특별히 남신도 회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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