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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분노를 피하는 법은혜로 구원을(엡 2:1-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9.15 17:30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요즘에 기독교, 그리스도교는 무엇일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상당히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고, 더 나아가 지금 이 시대에 기독교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한 사람의 목사로서의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구원 받아서 천국 간다는 점을 뺀다면, 기독교에 남는게 뭐냐고 묻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목적은 결국 구원 받아 천국에 간다는 이 한 가지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다니십니까? 무엇을 위해서 교회에 다니시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라고 고백하십니까? 또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셨다는 말입니까?

사회의 문제

지금까지 전해드렸던 말씀들을 다시 살펴보면, 저는 대부분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자, 말씀의 마지막에 꼭 하는 말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라는 말은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전체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개인의 변화보다는 사회 전체적인 변화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드려왔습니다.

제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서 이런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사회 전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합니다. 몇몇 개인이 하나님을 떠나서 잘못을 행했다는 문제보다는 사회 전체가 악을 행하고 있으며, 그 악함은 구조적으로 약자를 핍박하고 약자를 수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전체적인 사회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사회적 악, 잘못, 문제점을 발견해내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악함이, 사회의 불균형을 가져오는 문제가 사라진 세상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성경 말씀을 읽고 사회의 잘못된 모습들을 바라볼 때에, 어떤 잘못을 행한 특정 대상에만 한해서 ‘넌 잘못했다’, ‘넌 악하다’라고 말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사회 전체적인 문제, 구조적인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특정 대상을 악으로 지정하고, 마치 그 대상만 사라진다면 사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최근 조국 장관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되었을 때부터 끊임없이 그의 가족에 대한 문제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번 추석 기간 동안 여러 언론의 메인에는 추석과 관련된 기사보다 조국 장관에 대한 기사가 매일 한 가지씩은 올라왔습니다. 조국 임명에 찬성하냐 찬성하지 않느냐는 문제를 떠나서 이번 조국 장관 청문회 전후로 우리사회의 커다란 문제점들이 상당히 많이 드러났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대입과 관련된 이 사회의 계층 구조입니다.

조국 장관의 딸이 누렸다고 전해지는 수많은 혜택들은 사실 그녀만 누린 혜택이 아니라 소위 강남8학군에 속한 학생들, 특목고 학생들, 자사고 학생들이 모두 누렸던 혜택입니다. 물론 그 학생들 사이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왜 많은 아이들이 고교시절에 이렇게까지 스펙을 쌓으려고, 자소서에 무언가 한 줄 더 넣기 위해서 노력하고, 경쟁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 조국 법무부 장관의 자녀 특혜를 비판하면 서울들/고려대 학생들이 촛불집회를 진행했다. ⓒ연합뉴스

또 서울대, 고대 학생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며 촛불 집회를 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어이없는 상황입니다. 이들은 이미 미래의 기득권으로 가는 길에 발을 들여놓은 학생들입니다. 성인이 되어 우리나라의 상위층이 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딘 아이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른바 SKY에 이미 속해있는 아이들입니다.

우리나라 내에서 봉사활동을 해서 표창을 탄다던가, 대학 연구실에 인턴으로 들어가서 논문 저자에 이름을 올린다던가, 이런 스펙들은 전부 SKY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스펙입니다. 그런데 이미 SKY에 들어와 있는 아이들이 이런 행위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집회를 한다면 SKY 학생들이 아니라 소위 지잡대라고 비하되어 말하여지는 지방대 학생들이 했어야 말이 됩니다.

게다가 특목고, 자사고, 강남8학군 소속 학교 교사들이 이런 스펙 쌓기를 주도하고 있었다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해야 할 사람은 조국이 아니라 자신이 다닌 학교 선생님들입니다. 왜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저렇게 해주지 않았는가를 따져야 합니다. 여기에 공립학교의 문제, 우리나라에서 사교육을 없앨 수 없는 현실의 문제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보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특정인에게 죄를 모두 씌워놓고 그 사람만 없어진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여깁니다. 조국 지지자들이 반대로 나경원 아들에 대해서 비판하는 일도 똑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문제

어쩌면 우리가 사회 전체를 바꿀만한 힘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 3.1 만세운동으로, 6.10 민주화운동으로, 촛불집회로 사회를 변화시켜 온 모습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사회는 변화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구조의 문제보다는 어떠한 개인의 문제만을 바라보고 비판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이 전체 사회 구조가 선해지는 세상을 이야기함에도 우리가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바라보고, 이러한 변화를 이루어가지 못하는 이유, 지금 시대에 교회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도 요즘 사람들에게는 전달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이러한 개인에게 집중된 삶을 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개인에게 신경을 집중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먼저 개인의 문제를 생각하고, 개인의 문제를 해결한 후, 이를 넘어 사회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서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서 ‘남’이라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나’라는 개인의 문제를 바라보셨으면 합니다.

구원이라는 말이 지금 시대에는 수많은 의미가 붙었고, 추상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성경에서 기본적으로 ‘구원’은 ‘죽음으로부터 건져냄’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는 말을 합니다. 바꿔 말하자면 ‘너희는 구원 받았다’가 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구원받아 천국간다’는 표현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말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 죽음에서 건져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중에 천국이 허락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받아 천국간다’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흔히 우리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합쳐서 죽는 순간에 천국에 가면 구원받는 것이고, 지옥에 가면 구원받지 못했다는 생각도 존재합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에베소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인해 이미 죽은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셨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허물과 죄를 벗어낼 수 있도록 도우셨고 인도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제 우리는 허물과 죄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지 않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남이 아닌 나 자신, 우리 개인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뒤이어지는 말씀들 속에서 사도 바울은 ‘허물과 죄’가 무엇인지를 조금 더 설명합니다. 2절에는 ‘세상의 풍조를 따름’,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름’이 나옵니다. 3절에는 조금 더 구체적일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라는 말씀은 육신의 정욕에 따르는 삶,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일만을 행하며 사는 삶이 ‘허물과 죄’임을 말합니다.

사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이미 이러한 삶을 벗어던진, 육신의 정욕에서 벗어난 사람들, 육체나 마음에 따르는 삶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육신에 머문 삶, 정욕에 머문 삶, 세상이 보여주는 욕구에 따라 사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까? 3절 마지막을 보면,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테크나 퓌세이 오르게스(τέκνα φύσει ὀργῆς)’는 ‘태생적인 진노의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날 때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번역되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르게스’는 ‘분노’라는 뜻을 가진 명사입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은 우리의 본성이 무언가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가득 차 있는 존재들이라는 의미를 이 말 속에 담고 있지는 않는가 해석해봅니다. 육신의 욕망, 마음의 욕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평안이 자리잡지 못합니다. 언제나 불안하고 불만이 넘치고 이런 감정은 분노, 화로 이어집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언제나 화난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를 이런 상태로 이끄는 것이 죄, 욕구이고, 우리는 이런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살아있는 삶이 아니라 죽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허물과 죄를 입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죽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9절에서 구원이 ‘행위에서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죽은 삶에서 벗어나는 일, 마음의 욕심에서 벗어나는 일, 우리를 언제나 화나게 만들고 무언가에 분노하는 삶을 살게 하는 일에서 벗어나는데 우리가 행위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사실 초대교회에서부터 어거스틴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부들이 말했지만,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욕심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들, 악한 마음들을 스스로는 뿌리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참선을 한다 해도, 수도원에 처박혀서 금욕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욕심은 욕망은 우리 힘으로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9절 하반절에서 그 이유를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오직 은혜로

그러면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5절을 보면, 괄호 속에 들어가 있기는 합니다만,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은 오직 은혜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우리는 죄에서, 육신의 욕망과 마음의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증오하고 남에게 모든 죄를 전가하는 죽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일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세상의 구조 앞에 스스로 무력하다고 여기며 주저 앉아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마음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이유없는 불만과 분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길 간구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참된 평안을 주시길, 지금 내 삶이 죽은 삶이 아니라 참된 생명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지금의 삶 자체가 행복으로 가득 찬 삶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은혜를 입을 사람들입니다. 이미 은혜를 입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우리 밖에 있는 허물을 모두 벗어버리시고, 죽은 삶으로부터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남의 허물과 죄를 바라보며 분노에 찬 삶을 살아가는 삶은 여전히 죽은 삶입니다. 먼저 우리 스스로의 허물과 죄를 바라봅시다. 내가 욕하는 사람과 나의 삶은 과연 다른지를 먼저 살펴봅시다. 혹시나 여전히 우리의 삶이 그런 모습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허물과 죄를 벗기시는 은혜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살리시는 구원, 참된 평안이 가득한 그리스도인들이 점차 늘어갈 때에 이 사회의 문제들도 하나씩 바뀌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으시고 구원 받은 참된 성도님들 되시길 바라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에 자연스럽게 세상을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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