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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이율배반(에스겔 46장 1-24)천천히 걷자
여상범 목사(제주신흥교회) | 승인 2019.09.17 01:37

모세오경은 왕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 배경이라서 제사 때 왕의 역할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에스겔은 왕이 제사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왕은 제사에 드려질 제물을 수납하는 역할(45:16)과 그것을 분류하여 제사 때 사용하도록 준비하는 역할(45:17)을 할 뿐 아니라, 안뜰 문간에 서서 제사를 참관하기도 합니다(2절).

이런 내용은 이스라엘이 정치적 공동체가 아닌 신앙적 공동체임을 표방하고, 신정공동체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는 부분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시대로부터 약 2,500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상식적으로 우리가 아는 국가와 종교의 긍정적인 관계는 서로 관여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스겔이 보여주는 신정공동체의 비전과 우리가 아는 정교분리의 상식을 서로 비교하며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한국 극우 개신교의 민낯은 복음 전도와 정치를 일치화시키는 권력욕에 있다. ⓒGetty Image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묘한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 어느 도시를 성시화하자고 주장해도 ‘아멘’이라고 화답하고, 신앙인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도 ‘아멘’이라고 화답합니다.

아마 ‘성시화’라는 말을 도시 전체를 전도한다는 신앙적 의미로만 이해해서 그럴 테지만, 제도와 정치가들의 도움 없이 도시 전체를 전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런 전도는 전도가 아니라 강제 개종이 될 공산이 큽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어느 나라든 정치와 종교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정교분리가 중요한 논제가 된 것은 로마제국을 좌지우지하게 된 가톨릭 교회의 횡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정치를 장악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신앙은 알아도 정치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정치가 교회를 지배해도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교회의 저항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정치가들은 정치는 알아도 신앙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화 ‘황산벌’을 기억하시는 분은 전쟁과 정치에 대한 김유신(정진영배우)의 대사를 떠올려보세요.)

정교분리는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가 아니라,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왕은 세상에서 권력을 쥔 자이지만 제사가 드려질 때는 참관자로서 문 곁에 조용히 서 있다가 퇴장합니다. 제사가 준비되는 과정에 긴밀하게 관여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관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정공동체에 대한 비전은 종교인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비전이 아니라, 정치가 자신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공동체에 대한 비전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란, 카리스마적인 인물들에게 그때그때 다르게 원칙 없이 내리는 계시가 아니라, 정의와 평등에 기초한 ‘하나님의 법’에 나타난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자리에 어떤 직함을 가지고 서 있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됩시다.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드는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기도합시다.

여상범 목사(제주신흥교회)  uptig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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