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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기끝없이 참으시는 하나님(렘 4:11-12, 22-28; 딤전 1:12-17; 눅 15:1-10)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19.09.17 01:43

< 1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 안에 사도 바울과 관계된 편지는 모두 열 세편입니다. 그 가운데 바울의 서신이 확실하다고 학문적으로 인정받는 편지는 일곱 개입니다. 로마서, 고린도 전서와 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서, 빌레몬서입니다. 나머지 서신인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후서, 디모데 전서와 후서, 디도서는 ‘제2 바울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이 편지들의 내용이 바울의 진정서신과는 내용적으로 다르고, 바울의 죽음 이후의 초대 교회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2 바울 서신들’의 중요성이 경감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위대한 사람의 이름을 빌려 글을 쓰는 전통은 유대 묵시문학에서만이 아니라, 고대 헬레니즘 세계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널리 통용되던 문학적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형식의 글쓰기 전통은 누가 썼느냐보다, 그를 통해 무엇이 말해졌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논란이 되는 사도 바울의 여섯 편의 편지들을 정경에 넣은 것은 누가 편지를 썼느냐보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고, ‘성서의 권위는 저자가 누구냐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분의 권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2 바울 서신들’ 가운데 특별히 디모데 전서와 후서, 디도서는 이른바 ‘목회서신’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고령의 바울이 젊은 사역자들에게 목회적 충고를 하기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목회서신은 주후 100년이 지나는 시대(혹은 그보다 더 늦은 시대의?) 초대교회가 처한 상황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이른바 ‘다른 교리’(different doctrine)를 가르치는 사람들(딤전 1,3),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myths and endless genealogies)를 주장하는 사람들(딤전 1,4) 때문에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 편으로,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가 교리를 정립하면서 제도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조직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직제가 만들어지고, 신학적 다툼을 정리하기 위해 교리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다른 교리’를 가르치면서,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을 팔면서, 쓸데없는 토론과 말다툼으로 공동체를 분열시킨 자칭 율법 교사들이라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이 마치 율법 교사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거짓 교사’(딤전 1,7),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딤전 4,1),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을 먹지 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딤전 4,3)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들은 유대인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로서 모세의 율법에 대한 논쟁을 유발시키고, 신화들과 천상적 존재들의 계급을 사변적으로 정하는 끝없는 족보 논쟁을 좋아했습니다(딤전 1,4; 디도서 3,9). 또한 결혼금지와 음식규정 등의 금욕주의적 주장을 하면서, 자신들의 가르침과 금욕주의적 경건의 대가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신앙의 일상성, 육체성을 억압하고, 추상화한 것이지요. 엄격한 율법의 준수와 금욕적 신앙생활,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교리를 통하여 자신들을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구별하고, 동시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차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딤전 4,4-5)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또 누구든지 성속(聖俗)을 기준으로 차별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유대인들이 천민으로 여겨 접촉도 불경하다고 생각한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머물다가, 황홀경에 빠져 하늘에서 내려오는 큰 보자기에 담긴 온갖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베드로를 연상시킵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라고 거절하는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행 10,15)는 음성이 들린 일이 세 번 있은 뒤에, 그 그릇이 갑자기 하늘로 들려서 올라간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딤전 4,4-5)는 말씀이나,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행 10,15)는 말씀은 율법주의적 음식규정과 금욕주의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인종, 다른 종교, 다른 전통, 다른 계급과 신분과 직업의 귀천의식만이 아니라, 자연에도 적용됩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악해졌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은,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육체에 대한 억압과 성의 죄악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복하신 인간의 육체적 삶은 결코 추상화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신들의 계보나 천사들의 족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땅에 있는 인간들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 잃어버린 양을 찾는 예수 그리스도 ⓒGetty Image

목회서신의 두 번째 특징은 초대교회가 조직화되고, 신학적 논쟁들에 대하여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신학화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바울은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은 자들, 특별히 감독과 장로, 집사들에게 권면합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난폭하지 아니하고 너그러우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며, 언제나 위엄을 가지고 자녀들을 순종하게 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감독은 또한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라야 합니다.’(딤전 3,2-7).

집사도 ‘신중하며,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아니하며, 술에 탐닉하지 아니하며,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아니하며, 믿음의 비밀을 깨끗한 양심에 간직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이와같이 여자들도, 신중하며, 험담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성실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녀와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야 합니다.’(딤전 3,8-12)

디모데 전서 기자가 제시하는 교회공직자들을 위한 모범이 되는 특징들은 사실 그리스도교의 독창적인 덕목이 아니라, 직업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헬레니즘의 문학들 안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디도서가 언급하고 있는 세 가지 덕목,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한 삶’은 헬레니즘 도덕주의자들이 설명하는 선한 삶과 거의 일치하는 것들입니다.

초대교회가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서 널리 공인받은 덕목들을 그대로 교회 안으로 수용한 것은, 신앙공동체도 세상 안에 있다는 것, 세상을 초월해 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세상적인 것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과 악에 대한 도덕적 판단기준도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교회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적 판단기준에도 미치지 못할 때이지요.

< 2 >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그에게 사도의 직분을 맡기신 것은, 그를 하나의 ‘본보기’(Vorbild/example)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바울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딤전 1,16).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사도로 부름을 받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을 박해 하던, 디모데 전서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죄인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교의 사도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끝없는 참으심과 은혜의 결과이고, 하나님은 바울을 본보기 삼아 자신을 끝없이 참으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은 죄를 끝없이 참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니, 주님은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릴 것’이라고 시인은 노래했습니다(시편 96,13). 하나님이 끝없이 참으시는 것은 죄가 아니라,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오래 참으시면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는 분이시고(벧후 3,9), 그렇게 끝없이 참으심으로써 바울을 마침내 사도로 만드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한 본보기로 삼기 위해 부르셨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우리를 통하여 어떤 하나님을 나타내시려고 우리를 끝없이 참으시고 계시는 것일까요?

디모데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없이 참으심으로써, 우리를 본보기 삼아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합니다(딤전 2,4). 본보기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죄악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개하기를 끝없이 기다리시는 하나님 자신이시지, 본이 될만한 신앙적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선한 양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서 파선을 당한 사람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당하실 때에도(딤전 1,19-20) 하나님의 바탕, 죄인을 끝까지 참고 계시는 영원하신 왕,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바탕은 변하지 않습니다(딤전 1,17).

그래서 여기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참으시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 3 >

예언자 예레미야도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악한 일을 하는 데에는 슬기로우면서도 좋은 일을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고’ 자기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본보기였습니다(렘 4,22-27).

예레미야는 스스로 예언자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시 예언자 학교도 있었고, 직업적 예언자들도 많이 있었지만, 예레미야는 예언자가 되기를 스스로 원했던 인물이 아닙니다. 선택의 주체는 온전히 하나님 자신이시고, 예레미야는 단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결과에 개의치 않고 선포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한 일도 아닌데, 자기가 하고 싶은 말도 아닌데, 해야만 하는, 그것도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자기 조국의 파국과 파멸을 말해야 하는 예언자의 숙명을 받아드리기 힘들어,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신 것은 유다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다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렘 1,10).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은 심판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그런 하나님의 본보기로 삼으신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도 끝까지 참으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본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심으로써,’(눅 15,2),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본보기셨습니다.

< 4 >

초등학생 시절, 교과서에서 여러분 모두 읽었으리라 생각되는데 너새니얼 호손(1804-1864)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어른을 위한 동화가 있습니다. 가난한 시골 마을, 엄마와 함께 큰 바위 얼굴을 보면서, 언젠가 큰 바위에 새겨진 얼굴을 닮은 귀한 사람이 나타난다는 예언이 실현되기를 기다리며 사는 동안 어느덧 자신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예언 속의 바로 그 인물이 된다는 이야기이지요. 사람들은 엄청난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게더 골드’가 혹 그 사람인가, 아니면, 피와 천둥의 군인으로 불린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씨가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웅변을 잘해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 정치가 ‘올드 스토니 피즈’가 그런 사람인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도사가 되어 산골 골짜기 고향을 지켜오면서 백발 노인이 된 어니스트는 여전히 큰 바위에 전설로 새겨진 얼굴을 가진 그런 인물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시골 골짜기를 지나가던 시인이 마침내, 어니스트에게서 큰 바위 얼굴을 봅니다. 그러나 평생을 자연으로부터 얻는 순수함과 정직함으로 살아오면서, 백발이 되어 죽음을 앞둔 어니스트는 여전히 큰 바위 얼굴을 한 사람을 기다리면서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직도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착한 사람이 큰 바위 얼굴 같은 용모를 가지고 빨리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합니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면, 언젠가 자기도 모르게 그가 기다리던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 자기 마음 속에 진실로 닮고 싶은 사람을 본보기 삼아 살면, 언젠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인물이 된다는 말이지요.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서산 대사(西山大師, 1520[중종 15]∼1604[선조37])의 선시(禪詩), 백범 김구 선생님이 하루에 세 번씩 낭송하면서 실천했다는 시가 있습니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길 걸어갈제
불수호난행(不須胡亂行): 행여 아무렇게나 걷지 말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마침내 뒷 사람의 길이 되리니.

앞에 있는 사람들보다 뒤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살아있는 이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씀이지요. 한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나 공인들은 물론, 종교인들이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말씀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어떤 본보기가 될지는 그가 마음 속에 어떤 본보기를 두고 사느냐에 달렸습니다. 마땅히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삼아야겠지요. ‘죄인들의 영원한 친구’(딤전 1,15),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딤전 2,5),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본보기로 삼고 열심히 살아가면, 주님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주님의 본보기’로 삼으실 것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본보기로 삼으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실을 따라 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따라 하신 것입니다(딤후 1,9). 우리는 비록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주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주님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딤후 2,13). 죄인인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은 끝없이 참으시는 자기를 보여주시기에, 우리는 타인에 대한 끝없는 겸손과 자신에 대한 끝없는 희망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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