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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추정의 원칙나는 죄가 없습니다(욥 23:8-10)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9.29 17:18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오랜만에 욥기의 말씀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욥기의 기초에 대해서는 외우실 때까지 설명을 드리는 편이 좋을듯 합니다. 욥기는 1장부터 2장 10절까지 그리고 마지막 42장 7절부터 17절까지 욥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욥기 전체의 앞뒤를 이야기가 감싸고 있습니다. 2장 11절부터 42장 6절까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욥과 친구 세 사람,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나중에는 함께 왔던 젊은 사람 엘리후와 하나님의 말씀도 나옵니다.

욥기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원문 그대로 읽으면 은혜가 안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욥에 대한 이야기는 앞뒤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욥은 선한 사람이어서 어떤 시험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기에 다시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2장 11절부터 시작되는 욥의 말들은 정말 은혜가 안 되는 말들입니다. 욥은 끝까지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합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람을 우습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아무 죄가 없는 사람에게도 이런 고통을 주는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욥을 향해서 친구들은 말합니다. “니가 모르고 지은 죄가 있을거다. 그러니까 너는 회개해야 한다.” 욥기 42장 6절에 나오는 욥의 고백,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 말과 42장 7절 이후에 나타난 욥의 행동 변화는 정말로 욥이 모르고 지은 죄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욥기는 간단해 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르고 짓는 죄가 있으니까 언제라도 하나님께 벌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회개해야 한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결론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42장 7-9절을 보면, 하나님께 질타를 받는 것은 욥이 아닌 욥의 세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엘리후가 빠져있는 점도 문제이긴 합니다만,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옳지 못하다’라고 말할 때 사용된 히브리어가 ‘쿤(כּון)’인데, 어원은 ‘확실히 하다’, ‘굳건히 하다’라는 말로 ‘정돈하다’, ‘준비하다’, ‘설립하다’, ‘옳게 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됩니다.

‘친구들의 말’은 25장 이후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욥의 말’과 대조되고 있는 ‘친구들의 말’은 앞서 이야기했던 ‘욥이 부지중에 죄를 범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는 말이 됩니다. 42장의 이야기는 세 친구들의 이 말이 틀렸음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옳은 것이고 누가 잘못된 것일까요? 우리는 욥의 불경건한 이야기들을 옳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은 부지중에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붙들어야 할까요?

나는 무죄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들께서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법한 본문 말씀입니다. 앞의 8,9절은 모르신다 하더라도 10절은 자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런데 욥기를 진지하게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이 말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욥기를 읽다보면 가끔 이상한 느낌을 주는 말들이 있습니다. 욥은 지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신 후에 “내가 순금(옛날 성경에는 정금)같이 나오리라”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 뭔가 이상합니다.

▲ Gustave Dore, “재 가운데 앉아 있는 욥” ⓒGetty Image

우선 오늘 본문을 앞에서부터 조금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2절에서 욥은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이 탄식보다 무겁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지금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3-7절은 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면, 자신의 무죄를 하나님 앞에 고할 수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6절을 보면 재미있는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다투시겠나?”

하나님께서 설마 재판장에 나온 자신을 큰 힘으로, 큰 권력으로 찍어 누르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욥의 이런 생각은 38장 이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태도에 의해 배신당하게 됩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하면, 하나님과 자신의 죄에 대해서 논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무죄함이 드러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력으로 욥을 찍어누르지만 않으신다면 그렇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동쪽으로 가도, 서쪽으로 가도, 이렇게 번역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앞’이 ‘동쪽’이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도 가능합니다만, 앞뒤나 동서나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 10절의 말씀은 8-9절과 연결시키기보다 11절 이후와 연결시켜서 보는 편이 이해가 좋습니다. 욥이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길을 아신다.”라고 말하는데, 그 길이 어떤 길인지는 11-12절에 나옵니다. 욥은 자신의 걸음은 오직 하나님의 길만을 따랐으며,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는 상당히 어색합니다. 무죄라고 주장하고 있는 욥이 뜬금없이 하나님의 시험을 인정하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히브리어 전치사 ‘케(כְּ)’의 해석에 있습니다. 가장 흔하게 ‘~같이’로 해석되는데, ‘~ 뒤에’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성경은 이 ‘케’를 두 번 해석하고 있습니다. ‘~후에는’, ‘~같이’ 이렇게 두 번 해석하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욥의 불경건한 발언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고자 이렇게 해석을 해놓은 듯 합니다.

원어대로 읽어보자면, ‘그가 나의 길을 알기 때문에, 그가 나를 시험하였다. 나는 순금처럼 나올 것이다.’ 하나님의 시험에 순금처럼 당당히 나아가겠다는 뜻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다’라는 의미가 더 맞는 듯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욥이 하나님의 시험을 받고, 자신이 정금처럼, 순금처럼 깨끗해지리라 고백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자신을 시험해봤자, 자신은 깨끗하다는, 자신은 무죄라고 끝까지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욥의 옳음, 친구들의 옳지 않음

제가 욥기를 자주 보게 되는 이유는, 욥이 친구들에게 외치는 이야기들이, 어쩌면 하나님께 외치는 이야기들이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와 똑같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세상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걸까?’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시나?’ ‘내가 교회에 열심히 안 나가서, 헌금을 많이 안 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안 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나?’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생각들입니다. 이런 생각을 당연히 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때에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어떤 분들은 하나님에 대해 의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나한테 이렇게 하시면 안 되지.’ 어떤 분들은 정말 반대로 자신의 잘못이라고 탓하면서 하나님 앞에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셨다고 생각되는 그 시험을, 어려움을, 고난을 거두십니까? 우리 삶에서 그 어려움이 아픔이 거두어졌습니까? 우리의 삶은 여전히 힘들고 어렵고 아픕니다. 여전히 우리는 시험 속에 놓여있는 듯 합니다. 욥이 8-9절에서 외쳤던 것처럼 앞뒤좌우를 둘러봐도 하나님은 그 어디에도 계시지 않고 그저 우리의 고통을 방관하시는 듯 합니다.

욥은 13-14절에서 이렇게 푸념합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하나님은 이미 자신에게 고통을 주기로 결정하셨으니 그 결정하신대로 뜻을 바꾸지 않고 그저 고통을 주실 것이라는 푸념입니다. 어찌보면 정말 불경스러운 말입니다.

왜 성경은 우리들의 속마음과 같을지도 모르는, 이런 불경스러운 말을 그대로 담고 있을까요? 이 말들은 우리가 교회에서 배워오기로 분명 불경스러운 말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마치 욥의 말이 옳았던 것처럼 이야기하실까요?

저는 욥기의 이야기가 하나님을 향해서 외쳐야만 한다는 이야기로 봅니다.

“하나님, 저는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신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신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하셨는데, 왜 제가는 고통 밖에 없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외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셨던 점은 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외칠 수 있는 모습, 간구할 수 있는 모습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향해 외치는 이들을, 자신을 향해 간구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회개부터 하고 보자는 친구들을 옳지 않다 하셨습니다. 욥기의 시작과 마지막에 있는 이야기 속에서 욥의 태도 변화를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변화 중 하나로 욥이 회개한 후에는 더 이상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욥이 갖고 있던 죄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진 것이라는 설명도 합니다.

그런데 욥기 42장에 제사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욥은 제사 대신 행하는 일이 있습니다. 욥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1장에 나오는 욥의 제사와 42장에 나오는 욥의 기도는 분명 다릅니다. 1장에서는 자신의 자식들이 죄를 ‘범할까봐’ 제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42장에서는 친구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범한’ 죄에 대해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욥은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이야기는 욥에게 죄가 없음을 시사합니다. 제사는 죄를 범한 사람들, 잘못을 행한 사람들이 드려야 합니다. 누가 누군가를 대신해서 드리는 제사는 의미가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다만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 회개는 알지도 못하는 죄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회개와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서서, 진정으로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간구하고, 혹시나 하나님의 법에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을 되돌리시기를 외치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이 욥의 옳은 점이고, 욥기는 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과적으로 욥기는 스스로에 대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어렵고 힘들다고 느껴지실 때, 왜 내 삶이 이런가 고민하기 전에, 삶의 어려움에 지치시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을 행하시는지, 하나님께 끊임없이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해 외치는 일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예언서들을 보면 종종 읽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죄에 대해 논쟁해보자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받는 고통에 대해서 다른데 가서 풀지 말고 내 앞에 나와서 나와 얘기해보자는, 어찌보면 하나님의 붙드심입니다. 붙드시는 하나님을 외면하지 마시고, 삶의 모든 어려움과 힘든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삶의 아픔을 외치시기 바랍니다.

또 더 나아가 우리 주변의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들의 삶도 함께 나아지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여러분께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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