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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지은 형제라는 난제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9.30 17:56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으려는 것이다. 17 그러나 그 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마태복음 18:15~20 새번역)

익숙한 이 말씀이 난제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글자로, 머리에서 만지작거리지 않고, 삶속에 적용하려할 때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릇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곤 합니다. 그 사람에게 이 말씀대로 반응하는 한국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끝없이 용서해주라는 주님의 가르침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혹시 교회의 문턱을 낮출 대로 낮춰서 늘려놓은 성도 숫자가 줄어들까 두려운 것은 아닌지. 잘못한 한 사람 내보낸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모든 사람도 선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공유해야 합니다. 대형교회에서 익명으로 편히 신앙생활하려는 분위기를 깨버립니다. 그저 문제 해결, 위로, 천당 때문에 나왔다면, 의로운 삶의 십자가는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잘못을 행한 사람이 이해관계로 엮인 권력자일 때는 더 난해합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가 어릴 적에는 참 싱거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생존의 전장터에 깊이 연루될수록 이 동화가 다시 떠오릅니다. 비루한 삶의 알몸을 너무 정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분명 잘못을 행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이 아는데, 아무도 말해주지 못합니다. 말해주지 않습니다. 말해줘도 받아들이지 않을 게 뻔해 보입니다. 받아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만 피해를 당할게 자명해 보입니다.

▲ Max Leiva 作

벌거벗은 임금님에서도 한 어린 아이가 벌거벗었다고 소리칩니다. 모두가 알고 있던 진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임금도 신하도 모르는 척하고 행진을 계속합니다. 그 옷을 볼 자격이 없는 어리석은 아이의 실언으로 덮어버립니다. 그 진실을 인정하는 순간, 임금도, 신하도, 백성들도 만천하에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위선과 거짓과 어리석음을.

현실은 이와 다를까? 진실을 말한 사람만 쫓겨나고 피해를 입기 쉽습니다. 관련자들 모두 그 진실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속이며 자기 밥그릇을 지키길 바랄 뿐입니다. 진실이 드러나면 그간 함께 속인 거짓이 드러날 뿐입니다. 당사자는 자신이 틀렸다는 가능성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데, 게다가 나머지 모두가 아니라고 합니다. 진실을 말한 그 한 사람만의 잘못으로 뒤집어씌울 게 뻔합니다. 질투나 시기, 교만 등 뒤집어씌울 이유는 늘 남아돕니다. 

게다가 주님의 가르침과도 엇갈려 보입니다. 분명 바로 앞에서는 한 마리 잃은 양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또 바로 이어질 말씀에서는 끝없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방인과 세리처럼 대하라고 하시는데, 주님께서는 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도대체 이 엉킴을 어찌 풀지 난감합니다. 그러나 길을 잃은 이유가 길이 복잡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욕망과 집착이 복잡하게 만든 것입니까? 성도 숫자가 줄어들까봐 두렵고, 이해관계에서 자신만 피해를 당할까 두려운 탓은 아닙니까.   

만일 말씀 묵상이 감동이나 정답을 향한 길이라면, 이 본문 속에서 길을 잃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진실을 찾으려는 길이라면, 난제만은 아닙니다. 현실의 복잡한 맥락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쉽지 않지만, 기도만은 더 깊어집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소용  없어 보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게 뻔해 보여도 진실을 말해주고픈 사랑, 그 사랑을 구하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밥그릇 앞에서 비루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다행이도 주님 약속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간구할 때 함께 하시며 들어주신다고.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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