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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하나님 나라의 대헌장 (3)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19.10.02 17:59

문: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속하는가?

답: 이것은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다. 기쁨도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본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유이며, 기쁘게 하지 못한다. 슬픔은 이런 소유를 빼앗고 하나님께 인도한다. 그러므로 슬퍼하는 사람은, 슬퍼했던 사람은 아주 기뻐할 수 있다.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큰 구원은 오직 심각한 고난을 통해서만 온다. 바로 오늘!

문: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기쁨이라고 하지 않는가? 복음을(Evangelium) 기쁜 소식이라고 하지 않는가?

답: 그렇다.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들까지도 행복하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단순히 슬픔으로 인해서 그가 행복하다고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슬픔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슬픔을 가져온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싸움도 역시 슬픔을 가져온다. 이때 슬픔은 극복될 수 있고,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 슬픔이 우리를 급속히 하나님께 인도하고 하나님께 특별히 가까이 데리고 가며, 그럼으로써 기쁨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자신은 늘 기쁨이지만, 우리는 인간인만큼, 다만 슬픔의 심연을 가로질러가는 도상에서 하나님께 도달한다. 그래도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진실로 도달한 사람은 분명 기쁠 것이다. 심기불편한 모든 상태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어거스틴)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 “온유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치지할 것이다.”는 축복선언에도 비슷한 해석이 적용되는가? 왜 “부드러운 사람”(Sanftmütige)이라는 말 대신에 “온유한 사람”(Gütige)이라고 하는가?

답: “부드러운”이라는 표현은 주로 너무 여성적으로 이해된다. 단순한 굴복이요, 침묵과 감수로 이해되고 단순한 수동성이요, 인내로, 권리를 위한 투쟁의 결여로서 이해된다. 간단히 말해서 비영웅적일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함께 그리스도의 품성과 견해는 돌이킬 수 없이 치명적으로 변조된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런 식으로 부드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남성이요, 투사요, 영웅이다. 그는 투쟁하고 반대하고 분노한다. 그는 뜨겁다. 그는 그래야할 필요가 있는 곳에서는 칼처럼 날카롭고 단호하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복음 10장 34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정신을 고려해서 다른 번역을 찾아야 한다. 가령 “온유한 사람들은(die Gütigen) 행복하다”거나, “관대한 사람들은(die Milden) 행복하다”거나 “폭력에 호소하지 않는 사람”(die Gewaltlosen)은 행복하다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오늘 모든 복이 임한다. ⓒGetty Image

문: 폭력을 쓰지 않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후자의 경우도 역시 여성적이고 수동적이지 않을까?

답: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해선 안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간디나 톨스토이를 생각해보면 그들이 여성적이거나 구동적인 사람들인가? 예수 자신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도 기꺼이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는 것이다.

문: 이런 축복선언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 이 축복선언은 세상의 셋째 기본 경향인 폭력을 거부하는 것으로써 처음 두 개의 축복선언과 동일선산에 있다. 폭력 역시 일종의 소유이다. 폭력은 지배권을 욕심 사납게 빼앗아 모은 것이다. 폭력은 억누르고자 한다.

그러나 폭력도 기쁘게 하지는 못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민족이나 폭력에 호소하는 개인 또는 어떤 폭력 행사자도 늘 기쁨을 느끼지는 못했다. 폭력 역시 하나님과 갈라서고, 인간과 갈라서게 하기 때문이다. 폭력은 세상을 정복하고자 하나 정복하기는커녕 세상을 유지하지도 못한다. 폭력은 내적으로 공허한 것이다. 폭력은 정신 앞에서, 진리 앞에서, 자유 앞에서, 정의 앞에서 무너진다.

특히 정의를 위한 고난 앞에서 폭력은 무너진다. 시저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승리한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승리할 것이다. 십자가는 칼보다 강하고, 무력한 것인 강력한 것보다 쎄고, “도살된 양”이 사자보다 강하다. 세상은 결국 정신, 자유, 진리, 사랑의 것이다. 폭력을 추구하는 자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반면에, 폭력과 멀어진 사람은 반대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는 가남으로 인해 부유해지고 기쁨과 행복이 넘치게 된다.

또한 역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더 이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주님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기가 해야만 하고, 또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하나님을 깨달은 사람은 또 다른 힘을 깨닫고 그것을 믿는다.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은 사람만이 폭력을 행사할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참된 신뢰와 경외심이 전혀 없다는 분명하고도 실질적인 증거요,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신격화 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른 민족과 다른 종족과 다른 종교의 신성한 권리도 존중한다. 여기에 기쁨과 축복이 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또한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세상을 지배하고 그리스도가 승리할 것을 알고 있다.

온유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 그러나 그들은 정말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다. 이것은 슬픈 일 중에 하나가 아닌가? 이들이 어떻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답: 바로 그들이 슬퍼하는 사람임으로 그들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로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배부름(Sattheit)은 역시 소유이거나 실재적인 혹은 가상적인 소유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과도한 배부름은 하나님과 갈라서게 하고 인간과도 갈라서게 한다. 정신적인 과식도 역시 그렇다. 그것은 심기를 불편케 한다.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세상은 주리고 목말라한다. 그것이 세상의 본질이다. 세상은 살맛나는 삶을 갈급해 한다. 세상은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서 이것을 추구한다. 돈, 권력, 명예, 향락, 감각, 세속적 풍조, 예술, 학문 그리고 특히 종교에서 이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갈급함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단지 하나의 샘물 밖에 없으며, 이러한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은 단지 하나의 빵 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문: 정의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단지 공정한 것이 정의인가?

답: 그런 것도 정의이지만 산상설교와 관련해서 우리가 말하는 정의는 그 외에도 하나님 나라의 전체적인 내용과 그의 약속 및 요구를 뜻한다. 즉 하나님의 일이요, 인간의 일이며, 그리스도의 일이기도 한 정의를 뜻한다.

문: 그러나 그런 노력이 결코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사람들은 과연 흡족해 할까? 왜냐하면 세상의 정의가 있는지, 세상 고유의 것이 있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답: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만으로도 우리는 만족한다. 이것이 하나님에 주리고 목마른 것과 세상에 주리고 목마른 것 사이의 차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진실로 충족된다. 그러므로 개인의 영혼과 뭇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보다 더 필수적인 양식이나 음료란 있을 수 없으며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행복하다!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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