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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관한 지식, 하나님에 관한 지식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의 상관성 (1)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19.10.05 18:37

이번 글에서 살펴보려는 『기독교강요』 제1권 1장은 칼빈의 사상에 대한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원리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칼빈은 “우리가 갖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곧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해내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는 말과 함께 시작합니다.

2000년의 기독교 신학사를 살펴보면, 많은 이단들을 보게 되는데, 단순화시키면 가장 초기에 등장한 이단은 기독론적 이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인정한 ‘에비온주의자들’과 그의 신성만을 인정한 ‘가현설론자들’이 그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이단이 모양을 달리한 채 오늘날까지도 우리 주변에서 출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전부이냐, 이것은 당대의 칼빈이 비판자들로부터 비난받았던 주장입니다. 칼빈은 하나님만 전부라고 하고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고 인간은 비하시키고 인간에게서 아무런 장점과 가치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당시 칼빈에게 쏟아진 비난이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칼빈은 온전한 지식의 총체를 말하면서, 온전한 지혜의 두 부분을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을 말하면서 어느 한쪽이 부족해도 온전한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지식이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해 내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우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을 알 수 없다.”

먼저 완전하신 하나님을 숙고하라고 주장합니다. 온전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숙고하면 즉각 그들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질들이 그 빛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리석고 교만한 죄된 자들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어떻게든 자랑스럽고 잘랐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인간은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행17:28)하고 있는바 하나님을 응시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서 살며 기동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 볼 때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드러나는 우리의 현실은 바로 아주 비참한, 죄로 말미 암아 타락하고 전락한 비참한 존재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진실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한, 곧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한,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게 한다.”(I.i.1)

여기까지, 그러니까 1장 1절만으로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앞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즉각 방향을 바꿔서 정반대의 것을 단언합니다. 2절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불의, 더러움, 불결함을 스스로 확신하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자신을 의롭고, 바르고, 현명하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만은 온 인류에게 본유적인 것이다. (I.i.2).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죄에 대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그것이 법을 위반하고 어떤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내포하지만, 성경은 더 폭넓고 더 깊은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칼빈은 여기서 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왜 죄인인지, 왜 죄된 존재인지를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적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위선자여서 일종의 공허한 의의 형상이 의 그 자체를 대신하여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켜준다. 그리고 우리의 속과 주의는 너무나 부패하여 더러워지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이 인간 부패의 범위 내에서만 보게 되면, 적게 더러워진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마치 가장 깨끗한 것처럼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것은 마치 검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눈이 희끄무레한 것이나 갈색인 물체를 볼 때, 완전히 흰 것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우리가 영혼의 여러 능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크게 속고 있는가 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더욱 명백히 깨닫게 된다. 만일 우리가 대낮에 땅을 내려다보다가, 주위에 있는 어떤 사물들을 본다면, 아마 우리는 자신이 가장 강하고 가장 예리한 시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눈을 들어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게 될 때, 우리의 시력은 당장 그 큰 광채로 말미암아 눈이 부시고 혼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 이러한 사실은 또한 영적 은 를 생각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 지상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가장 훌륭한 존재인 양 우쭐대며 자신을 거의 반신적인 존재로 착각하게 될 것 이다(I.i.2).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비로소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인간에 대해 말하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 칼빈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 앞에 선 인간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때마다 충격을 받으며 압도당한다고, 성경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 두려움과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이다.”(I.i.3)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빛처럼 강렬한 거룩함으로 그들에게 나타나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삿13:22).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압도적인 두려움을 체험했고,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단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I.i.3)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욥과 아브라함과 엘리야의 경우를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합니다(욥38:1이하; 창18:27; 왕상19:13).

여기서 칼빈은 베드로에 대한 예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장면은 거룩한 분과의 만남에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매우 잘 말해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다가와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심정은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께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거룩한 분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앞에, 하나님 말씀 앞에서 섰을 때,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예를 들면, 시편 51편에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습니다.”(시51:3-4)

3절 마지막 부분에서 칼빈은 두 지식의 관계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먼저는 전자에 대해 논의하고 다음으로 후자를 논의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일 것이다”(I.i.3).

바로 이것이 칼빈의 사고의 핵심이고, 개혁교회 신학의 핵심 원리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언제나 함께 합니다. 그런데 우선적이고, 앞서 있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출애굽 공동체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앞서 인도하고, 그 뒤를 출애굽 백성이 뒤따랐던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언제나 앞서는 것은 하나님이시고, 뒤따르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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