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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분신정국과 소비에트 공화국의 붕괴운동권에도 수련이 필요하다?
김정택 목사 | 승인 2019.10.05 18:44

공안정국의 회오리속에서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백골단의 쇠파이프와 진압봉에 의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강경대는 경제학과에 입학한지 2달밖에는 안 되는 1학년 학생이었다. 오후 5시10분경 강경대는 백골단(사복경찰체포조)이 은밀하게 이동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학교밖으로 50m나 진출해 있는 선배 시위 선봉대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선봉대를 향해 뛰어갔다. 백골단이 이를 알아차리고 강경대를 붙잡으려고 달렸다. 강경대는 잡힐 것 같아 두려워 담장을 넘으려고 했다.

이때 5명의 체포조가 강경대를 끌어내렸고 쇠파이프와 진압봉으로 무자비하게 마구 내리쳤다. 강경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백골단은 방치하고 사라졌다. 뒤늦게 학생들이 발견해서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숨은 끊어진 상태였다.

▲ 공권력의 폭력으로 사망한 강경대 군 노제 ⓒGetty Image

강경대 군의 시신이 안치된 세브란스 병원이 있는 연세대에서는 전대협 소속 5천 여명의 학생들이 집결하여 전투경찰과 공방전을 벌였다. 민중과 운동권이 결합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때와는 달리 잽싸게 내무장관을 교체하고 상해치사범들도 즉각 구속하였다. 실내도 아니고 밤도 아니고 대낮에 그것도 대학 정문 근처에서 쇠파이프로 무차별 가격해서 1학년 학생을 쳐 죽였다! 대학생들의 분노는 노태우 정권을 향해 퍼붓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자기를 태우는 분신정국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4월29일에는 전남대에서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를 진행 중이었는데 박승희 학생이 분신하였다. 5월1일에는 안동대학교에서 김영균 학생이, 5월3일 가천대에서는 천세용 학생이, 5월8일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5월10일에는 노동자 윤용하가 분신하였다. 10여일 사이에 5명이 분신한 것이다.

이때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이 대서특필되어 전국에 뿌려졌다.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하는 제목에 옆으로는 큰 글씨로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환상을 갖고 누굴 선동하려 하나!” 하는 글이 써내려졌다.  5월8일에는 서강대 박홍 총장이 “우리 사회에 죽음을 선동, 이용하는 반생명적 세력이 분명히 있다. 이 세력의 정체를 폭로해야 한다.”고 하였다.

노태우 정권은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유서가 대필로 쓰여졌다는 의혹을 신문에 흘리기 시작했다. 전민련 같은 운동권단체들을 불순한, 반생명적 단체로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려는 작전을 개시하였다. 9일 한겨레신문에는 대검관계자가 시위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운동권에서 내부적으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자살을 기도한다는 소문이 있다는 말을 흘리는 것을 아무런 검증없이 그대로 기사화했다.

5월10일 전남대에서 또 분신을 시도한 김용하는 노트에 “누가 분신을 배후·조정한단 말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그 누가 버리라고 한단 말인가?”고 썼다. 하지만 매스컴에는 눈꼽만큼도 다루어지지 않았다. 언론들은 열심히 누군가가  분신에 조력했을 가능성을 다각도로 보도만 하였다.

조선일보의 보도는 그중에서도 완전 홈런을 때려버렸다. 젊은이들의 자살이 어떤 경로를 통해 중앙에서 명령을 받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으며 일부 사람들은 이 지령이 북한으로부터 나오고 있다고 한다. 결국에 끝은 북한이다.

검찰은 5월16일, 언론이 깔아준 홍보의 힘으로 전민련 간부 강기훈을 대필자로 지목하고 구속하였다. 한 달 여 동안 전국에서는 강경대 군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위한 범국민대책회의 명의로 집회와 시위, 가두 투쟁이 전개되었다. 인천에서는 동인천역에서 2만 여명이나 모여 폭력살인 규탄집회를 하고 가톨릭 회관까지 가두행진을 하였다.

▲ 조선일보에 게재된 김지하의 칼럼 ⓒGetty Image

나는 플랑카드를 잡고 행진하는 맨 앞의 대열에서 플랑카드를 잡고 행진하였다. 가톨릭 회관에 근접하자 기다리던 가스차가 수많은 대중을 향하여 최루가스를 뿜어댔다. 사람들은 참지 못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때만 하더라도 요가로 워낙 단련되어 있었고 호흡을 길게 참는 훈련도 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호흡을 멈추고 최루가스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3분은 지났을까? 나는 눈을 떴다. 흩어졌던 동지들이 모여든다.

요즘도 그때 거기에 있었던 친구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그들이 나를 알아보고 그때의 장면을 상기시켜 주니까 잊어먹을 수가 없다. 그때가 한창 서부영화 장고류가 인기가 있었나보다. 서부영화에서 주인공이 먼지가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멋진 장면들이 관중들의 감성을 자극했었다.

어떤 친구는 그런다. 마치도 서부영화의 한 장면 같았었다고. 이후로 나는 수배자가 되어 집에는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민중교회 송현산마루교회 주일예배도 인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마침 후배 손연경 전도사가 송현산마루에 살면서 지역주민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은 없었다. 그렇다고 어느 한곳에서 조용히 머물 수는 없었다. 때로는 비밀회의도 해야되고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전민련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새롭게 민민운동의 구심을 형성해야 하는 과제로 씨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판적 지지파, 후보단일화파, 독자민중후보파 등이 운동의 구심을 다시 형성하기 위해 모여서 전민련은 만들어내었지만 정치적 이견 해소를 위한 작업은 진행된 것이 없었다. 이미 전민련 결성 이전인 88년에도 민민운동 진영에서는 독자정당으로서 한계레민주당, 민중의당을 만들어 88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는 실험을 해보았다. 한사람의 당선자도 못내었다. 그렇지만 국민은 양김분열로 대통령 선거는 패배했지만 김영삼의 민주당, 김대중의 평민당에 표를 몰아주어 여소야대 정국은 만들어 내었다.

이렇게 노태우 정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양김의 2개의 정당이 건재해 있어 전민련 차원에서도 합법의 제도권에 진입하기 위한 합법정당을 만들어 진출하는 것도 괜찮으리란 기운이 돌았다. 민민진영의 독자정당이 제도권에 진출해서 양김 정당과의 연대 또는 통합을 이루어 나가는  것도 괜찮은 방책이라는 인식이 온 것이다. 그래서 김근태, 이부영 등은 함께 전민련 내에 정치세력화소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1989년 5월 전민련 상임집행위원회에서 상임집행위내에 정치세력화 소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논의를 진척시켜 89년 전민련 2차중앙위원회에서는 합법정당 건설에 참여하고자 하는 조직내 성원들은 그 직을 사임하고 추진한다고 결정하여 합법정당 추진 자체는 인정하고 통상 관례대로 중요직책을 겸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사임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전민련 간부중 이부영은 사직하고 이재오, 장기표 등과 함께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을 결성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뀔만한 사건이 터져버렸다. 90년 1월22일 노태우는 김영삼, 김종필과 합의하여 3당을 통합하여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키면서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양김의 연대나 통합이 과제 자체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야권은 이제 인물로는 김대중만 남게 된 것이고 정당은 평민당과 이기택으로 대표되는 꼬마민주당만 남았다. 그 결과는 90년 3월 3일의 전민련 제2차 대의원대회에서 아예 독자정당 건설을 부결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합법정당 추진자 400여명 인사들이 전민련에서 빠져나갔다. 전민련은 역량에 큰 타격을 받았다.

대의원대회에서 합법정당 건설방안이 부결되자 전민련 고문 4인 계훈제, 박형규, 백기완, 이소선은 사퇴를 하고 기자회견을 통하여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정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에 홍성우, 고영구, 조준희, 백낙청, 안병직, 오세철, 이효재, 박순경, 신경림, 김정남 등 재야운동권인사들 16인은 전민련 고문단이 천명한 민중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제안을 받들어 정당 결성을 제안한다고 발표하면서 전민련 4인 고문의 결단을 중요시 하였다.

이렇게 하여 민중의 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가 출범하였다. 인천에서는 87년 대통령 선거시 백기완 민중후보선거 인천대책본부에 참여했던 황선진 등 주요인사들이 다 참여하였다. 나도 참여하려 하였다.

▲ 유서대필 조작 사건 ⓒGetty Image

그런데 하필이면 이 때 예수 생각은 왜 나나? 예수가 권력을 잡아 세상을 변혁하려고 했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었다. 답은 자꾸 아니다로 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참여할 의지를 낼 수가 없었다. 90년 5월 9일에는 전국 18개 지역에서 20만명이 참여하는 민자당 해체, 노태우 정권 퇴진 국민궐기대회를 전민련이 주도함으로써 김근태 등이 구속되고 지역의 지도부들도 구속되거나 수배자가 되었다.

여기에 유서대필 사건에까지 얽혀버렸으니 거의 실신상태에 놓여버렸다. 이후로는 새로이 건설된 전노협, 전교조, 전농 그리고 전대협 등이 참여하여 만들어진 한시적인 조직인 민자당 일당독재 음모분쇄와 민중기본권 쟁취를 위한 국민연합이 투쟁의 구심이 되어 전민련의 공백을 채워나갔다. 상황은 점점 국민연합이  한시적인 조직이 아니라 상시조직으로 전화하고 전민련은 해소해야할 시점으로 닥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1991년 12월 1일,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이 출범하게 되었다. 지역에서는 지역국민연합이 그대로 지역연합으로 전환하면 되었다. 인천에서는 인민연 의장이면서 국민연합 대표인 내가 그대로 인천연합 의장을 하면 되는 것인데 여기서 NL쪽이 양재덕 선배를 의장으로 추대한다는 안을 들고 나왔다.

PD쪽은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뺄 수 없다고 당연히 김정택 의장이 그대로 의장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하기야 나도 인천에는 굴러들어 온 돌로 치면
마찬가지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나는 81년도에  들어와서 10년이나 됬고 양재덕 선배는 인천에 온 지가 얼마되지 않아 인천의 운동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차이는 있었다.

12월, 크리스마스도 얼마남지 않은 어느날 나는 아내와 딸을 꼭 보고싶어졌다. 나래는 여성노동자들의 집인 나눔의 집의 어린이집엘 다니니까 끝날 때쯤 저녁 어둠컴컴할 때 가면 만날 수 있었다. 경찰도 별로 나를 잡으려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다보니 정말 내가 수배가 맞나? 하는 느슨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찿아갔다. 딸과 아내를 보니 하루는 어딘가에서 함께 있고 싶었다. 나는 아내가 운전하는 자가용에 올라 탔다. 집에는 차마 갈 수가 없고 마침 장모님이 백운역앞 현대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아내는 현대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현대아파트에 들어서자 그때서야 자동차 한대가 바짝 우리차를 뒤쫒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순간 나는 틀렸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내에게 저 넓은 곳에 차를 대라고 했다. 나래를 안심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 정차하자마자 내가 먼저 내려 아는 체를 하고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는 딸에게 한마디 하고 차를 타겠다고 재빨리 얘기했다. 그리고는 딸에게 가서 아빠 친구들이 왔네. 이따 들어갈께 하고는 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내가 잡히고 구속되자 인천연합 의장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다. 자동으로 양재덕 선배가 의장이 되었다. 이제 나에게는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내 나이가 41세다. 육체는 여전히 쌩쌩한데 정신에 피곤함이 어느 정도 쌓였다. 왜? 그러할까? 무엇이 나에게 피로를 갖다 주었을까? 밖이 아니라 내안에서 그리고 운동권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자기입장, 자기 생각을 너무 중요시 여긴 건 아닌가? 견해가 다른 동지와 조직들과 함께 한다는 기쁨은 어디로 가고 기필코 이겨야만 하는가? 자기 입장과 생각을 한번 내려놓아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서로 견해가 다르면 따로 활동하고 같으면 같이 하고 그렇게 유연할 수는 없는 것인가? 우리가 조금씩 현실 자락을 잡고 있는 것이지 온전히 꽤뚫고 있나? 서로 다른 견해를 모으고 모아 더 현실 이해로 닥아갈 수는 없는 것인가? 그러면서 동지와 조직이 서로 깊어갈 수는 없는 것인가? 운동권에도 수련이 필요한가?

실은 나도 요가는 열심히 했다. 그렇지만 건강에 초점을 두거나 강함에 초점을 두었다. 그래서 요가 단계에도 있는 정신적 측면, 선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었다. 비운다에 별로 초점을 두지 않았다. 인천구치소는  또 하나의 수련장소가 되어 주었다.

한국이라는 감옥 밖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련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소연방내 최대공화국인 러시아에서 자유선거에 의해 급진개혁파 보리스 옐친이 1991년 6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옐친은 연방대통령 고르바쵸프를 제치고 사실상의 연방내 최고권력자로 등극하였다.

1991년 8월에는 기존체제 유지의 보루인 군부세력의 반옐친 쿠데타가 감행되었으나 실패하였다. 1991년 12월25일 고르바쵸프는 연방대통령직을 사임한다고 방송하였다. 이 때를 맞추어 크렘린궁 지붕에서는 74년간 펄럭이던 적기가 내려졌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 보리스 옐친과 고르바초프 ⓒGetty Image

김정택 목사  kjt94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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