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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한 투쟁은 불행을 만들지 않는가?하나님 나라의 대헌장 (4)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19.10.09 19:31

문: 그러면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이라는 것은?

답: 그것도 같은 것이다. 무지비한 사람은 독선적이다. 그는 자기의 정당함을 완강하게 주장하고, 늘 자신의 권리에 집착한다. 그의 권리는 그의 소유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하나님과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자심의 정당성을 포기하는 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며 큰 보상을 받는다. 또한 역으로 하나님께, 아버지이신 주님께 나가는 자는 더 이상 샤일록처럼 하나님 앞에서 겉으로만 그럴듯한 자신을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타인들의 권리, 인간의 권리, 형제의 권리가 그 자신의 권리를 거부한다. 그는 자비로워진다.

문: 그렇다면 우리는 권리를 추구해선 안 되는가?

답: 우리는 권리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올바른 방법과 자비를 잊어서는 안 된다.

문: 우리 자신이 자비로울 때만 우리는 실제로 자비를 입는가?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신가?

답: 하나님은 물론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은혜를 베풀 때, 은혜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악한 종의 비유(마태복음 18장 21-35절)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상호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의미에서, 또 인간을 양육하기 위해서도 그분의 태도를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정하신다.

자비를 입고자 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자신이 자비를 베풀어야만 한다.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가 그렇게 해야 할 불가피한 이유가 없는데, 자신의 권리를 그의 소유로서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고, 그대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를 상속받으면, 그는 행복하다. 이 얼마나 큰 행복이며 해방인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문: 이것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는 것과 계속해서 동일선상에 있는 것인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어떤 마음이 완전히 깨끗한 것인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란 것은 또 무슨 뜻인가? 피안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답: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실재성(Gottes Wirklichkeit)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신실함을 체험한다는 뜻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란 완전한 사람들, 오점이 없거나 결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올곧은 사람들, 올바른 사람이 되고자 뜻을 세운 사람들, 악의와 속임수가 없고, 뜻하고 추구하는 데 있어서, 이를테면 위세, 명예, 이득 등 더러운 동기가 섞이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 아프리카의 한 국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 중 경찰병력을 향해 한 청년이 타이어를 던지고 있다. ⓒGoran Tomasevic/REUTERS

이런 마음으로 우리는 저절로 이 축복선언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이러한 축복선언이 거부하는 것은 이 세상의 일이다. 즉 더러운 마음과 위력, 권력을 구하고, 온갖 이득을 얻으려하고, 갖은 환락을 다 누려보려고 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런 것들도 역시 세상이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는 소유물이 된다.

그러나 이것에 의해서 세상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멀어지고 기쁨을 모르게 된다. 네가 이 거짓 보물들을 포기할 때 겉으로는 매우 가난한 듯이 보이나 너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것이다. 너는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며 하나님의 무한함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너는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즉 너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고 알게 될 것이다. 너는 바로 그 하나님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음을 체험하고 알게 될 것이다. 너는 무한한 축복을 체험하고 만사형통을 깨달을 것이다. 확고부동하라! 신뢰를 버러지 마라!

문: 그러나 패배하고 실망하게 되면?

답: 그 경우에도 역시 기쁠 것이다. 곤궁과 죽음에서도 너는 승리할 것이다. 너는 바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그 역도 성립된다. 즉 네가 하나님을 추구하고 발견하는 그만큼 네 마음은 세상의 더러움에 얽매이지 않게 되고 행복하게 될 것이다. 개개인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일에 중요하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위한 싸움과 인간의 일을 위한 싸움은 중요하다.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라. 더러운 꿍꿍이 속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너는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른 신학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문: 그러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Friedfertigen)은 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Friedeschaffer)이라고 해야 하는가?

답: 왜냐하면 실제로 원문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번역은 능동형을 수동형으로 남성적인 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일이 어떻게 변질되는지, 그 변질의 방향을 특정적으로 보여준다. (Friedfertige는 문자적으로는 ‘평화를 위해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수동적인 뜻이 있고, Friedeschaffer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능동적인 뜻이 있다. - 역주) 동일선상에서 “하나님의 아들”(Söhne Gottes)이 될 것이란 말 대신에 “하나님의 아이들”(Kinder Gottes)이 될 것이란 말이 쓰였는데, 성장한 사람들이 어린애로, 자유인은 의존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팔복의 정신은 또 한번 위조되었다.

문: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답: 이것은 세상의 근본적인 수준이 바뀌지 않았음을 뜻한다. 세상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명예와 힘을 주장하고 싶어 하며 스스로 법이라고 자처하고 싶어 한다. 그것들은 세상의 소유이다.

그러나 모든 소유는 싸움을 일으킨다. 세상의 근본사상을 지속시키면 이렇게 된다. 싸움은 전쟁에서 그 가장 실질적인 형태를 띤다. 전쟁과 함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진다. 그것은 불행이다.

이런 불행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러한 일을 해내는 사람들은 전쟁 영웅들보다도 진정 위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굳센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평화는 얼마나 좋은 것인가! 그 얼마나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인가! 그러므로 온갖 시련과 투쟁 속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고 평화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러나 역으로, 우리가 만역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참된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평화를 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평화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아이든, 민족의 자아이든, 자기주장을 하는 자아는 하나님의 요구와 이웃의 요구로 인해 사라진다. 모든 개인과 민족과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미음은 사라지고 축복이 빛을 발한다.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축복이다.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모든 전쟁은 사라지고 그로부터 민족 간의 평화, 사회적 평화, 영혼의 평화가 나온다. 이것이 바로 축복이다.

문: 그런데 왜 “평화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라고 하는가?

답: 그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필이면 평화까지 가지고 있음으로써 혹시라도 세상이 될 대로 되도록 놔둬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예수의 말씀은 의미에 맞게 “평화를 위해 싸우는 사람”으로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평화를 위해 일하고 평화를 위해 싸우는 사람만이 행복하다.

문: 어떻게 우리는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는가? 양보하고, 동의하고, 대립을 감추고, 곤궁과 불의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는가?

답: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가 옳다. 진리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위해 일하고 싸우기도 하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질서가 충만한 곳에서만, 모든 것의 질서가 있는 곳에서만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예수는 “나는 평화를 주려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고 말한다.

문: 그러나 그것은 투쟁이며, 투쟁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만들지 않는가?

답: 그것은 큰 오해다! 전쟁(Krieg)은 불행을 만들지만 투쟁(Kampf)은 행복을 만든다. 이슬람교의 경전을 보면 예수의 말씀과 대단히 유사한 말이 있는데 “낙원은 칼의 비호아래 있다.”고 한다.

문: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모욕하고 박해하고 우리에 대해 거짓으로 온갖 나쁜 말을 할지라도 우리가 정의를 위해서” 사람들과 항상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답: 바로 그런 경우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가난에서 축복으로 나아가는 길이 완성된다. 인간의 명예 역시 세상적 의미로 본다면 소유물이며, 우리를 하나님과 인간으로부터 갈라서게 한다.

우리가 걱정스럽게 명예를 지키려고 하는 한 우리에게는 기쁨이 없다. 우리는 가련해진다. 우리는 그것에서 결코 충분한 이득을 보지 못하며 때때로 아주 변변치 않은 이익조차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예를 뒤에 놓고 하나님께로 나간다면, 즉 모욕과 박해의 길로 들어선다면 축복의 밝은 빛이 비치며. 우선은 가난해지겠지만 후에는 부유해진다. 우리는 인간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얻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칭찬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훌륭한 왕관을 쓰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정의를 위해서 고난 받는 것보다 더욱 더 훌륭한 삶의 왕관이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모욕이 명예가 되며, 모든 박해가 해방으로 변한다. 우리는 인류의 가장 고귀한 사람들과 한동아리가 된다.

저들이 받아들였던 것과 똑같은 어떤 경험,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어떤 경험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기뻐하라! 환호하라! 어떻게 해서든지 오직 이 왕관을 구하고자 했던 삶만이 영예를 차지한다.

이런 경험을 한다는 것은 물론 인간적으로 쉽지는 않다. 이런 경험은 단지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이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

그 앞에서 세상의 모든 명예는 침몰한다. 하나님의 명예가 밝게 빛난다. 그러므로 이것이 모든 기쁨의 가장 깊은 원천이요, 최고의 행복이다. 그러기에 순교자들은 화형의 불길 속에서도 찬송하고 환호했다.

의를 위해서 박해받는다면 너희들은 행복하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길이 팔복선언 전체를 통해 나타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모든 복의 전조다. 팔복선언은 모든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아버지이신 주님께로 돌아서는 획기적인 방향전환을 가리킨다. 이것이 팔복선언의 단순하면서도 깊고 강력한 의미, 즉 하나님을 통한 세상의 혁명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상인 하나님 나라라고 불리는 것이다.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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