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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할 수 없는 삶, 영생”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10.10 17:44
16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한 분이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예수께 물었다. “어느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20 그 젊은이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2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9:16~22 새번역)

한 젊은이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사이에는 엇갈림이 보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서 영원한 생명은 어떤 행위를 통해 획득하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결이 다릅니다.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 주님의 대답에서 영원한 생명은 ‘획득하는 대상’이 아니라 ‘들어가는 삶’입니다. 선행을 통해 소유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생명 안으로 들어가 누리는 삶입니다.

소유하는 영생과 누리는 영생의 차이는 이어지는 대화 내내 계속됩니다. 젊은이의 질문에서는 욕망이 드러납니다. 계명을 남김없이 완벽하게 지켜서 영생을 완전히 소유하려는 욕망입니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해서 부자가 되었듯이, 더 많은 계명을 더 완벽하게 지켜는 방식을 의지해 성취하려 합니다. 그 성취를 통해서 영생도 완벽하게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보입니다.

▲ Erik Johansson, 「cover up」

주님의 대답은 방향이 다릅니다. 계명을 지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방향입니다.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지만, 결국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방향입니다. 사랑에 완성이나 끝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찌 몇 개의 항목을 지켜 사랑이 완성되겠습니까. 젊은이는 다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율법의 제한된 항목이라면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은 늘 미안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늘 더 해주고 싶고, 더 주지 못해 한 없이 미안합니다.

사랑은 계명의 항목보다 그 안에 담긴 뜻을 따릅니다. 사랑의 열망을 따라 자기를 비웁니다. 비운 만큼 사랑이 커집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이 커집니다. 자신을 비워 이웃 사랑이 깊어진 만큼 영생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더 많이 나누고 사랑하는 삶이 현존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는 삶을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을 뿐입니다.

젊은이와 주님에게서는 하나님 나라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이가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언젠가 완전히 소유할 대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이미 임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하는 현존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하셨고(마12:28),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셨습니다(눅17:21). 그래서 영생에 들어가는 방법 역시 이 땅에서의 일들로 가르쳐 주십니다.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지만, 대답은 생명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것도 십계명 중에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항목들만 말씀해주십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두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 안식일을 지켜라, 첫 번째에서 네 번째 율법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언, 부모 공경, 이웃 사랑만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인간관계만 일러주십니다.

행복하려고만 하면 오히려 행복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순간, 지금 행복하지 않은 점에 집중하기 쉽습니다. 그것을 고쳐서 행복해져야 하니까요. 애쓰면 애쓸수록 불행한 측면이 더 잘 보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추구하기보다 함께 걸어야 합니다. 이미 행복한 지금을 발견하고 함께 동행 할 때, 그 행복이 자라날 테니까요. 하나님 나라도 함께 걷는 동행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여기에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때, 영생은 시작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사랑의 현존에 참여할 때, 생명에 들어갑니다. 소유할 수 없는 사랑을 삶으로 누릴 때, 영생이 시작됩니다. 영생을 끝없이 이뤄갑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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