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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은 이방인들에게?(삼상8:1-22; 롬7:5-13; 마11:16-24)창조절 여덟째 주일(10월20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10.18 16:55

1. 난 십자군과 달라. 난 살라딘이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에 하나의 특별구역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 천국에는 갈 수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으며 사는 곳입니다. 가령,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등 예수 탄생 이전의 인물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복음이 전래되기 전 인물인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등이 있겠군요(탄테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단테의 말은 이렇습니다. “아마 지옥에서 가장 적은 벌을 받게 될 이교도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살라딘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그리스 사람으로 위대한 철인입니다. 특별히 플라톤 철학은 초대교부들과 어거스틴이 기독교 신학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죠? 그런데 살라딘((Saladin, 1138~1193)은 처음 들어 보셨을 겁니다. 살라딘은 이슬람의 술탄(통치자, 군주)으로 수니파 이슬람 왕조인 아이유브(Ayyub) 왕조를 창건한 가장 유명한 이슬람의 영웅입니다. 그 지역은 이집트·시리아·예멘·팔레스타인 등입니다. 아무튼 살라딘이 살던 시대에는 십자군 전쟁 중이었습니다. 1096년부터 1291년까지 200년 동안 십자군 전쟁이 있었습니다.

1차 십자군 원정이 끝난 1098년, 십자군의 보에몽 1세(Bohemond I, 1058-1111)는 시리아 북서쪽의 ‘마하라트 알 누만’을 정복,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을 저지릅니다. 가령 산채로 사람을 집어다가 불구덩이로 던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도시 안에서만 2만 2천명을 학살하며 인종청소를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슬람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이슬람 사람을 잡아먹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 사람들은 십자군에 대해 극도로 반감을 품게 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져 싸우고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눠진 것과 비슷합니다. 잠시 이슬람교에 관해 살펴볼까요? 이슬람교는 7세기 초 무함마드(Muhammad, 570-632)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모든 신들을 부정하며, 유일신 알라를 숭배하는 것이 이슬람의 기본 교리입니다. 알라(Allah)는 ‘신’을 뜻하는 ‘일라후( ilāh)’에 아랍어의 정관사 ‘알(al)’이 붙어서, ‘알 일라후’의 단축형 또는 발음이 변이된 형태로, ‘그 경배 받는 존재’, 곧 ‘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창시자이며 예언자이고 최고 지도자였던 무함마드가 죽은 후, 후계자 문제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선거에 의해 최고 지도자(칼리프)를 뽑으려는 정통파(무함마드의 측근들과 그의 협력자들)에 대항해, 무함마드의 가계 곧 혈통을 중심으로 지도자가 계승되어야 한다는 친무함마드계 세력이 충돌하면서 분열되었습니다. 스스로를 ‘정통파’라 생각하는 기존세력을 수니파(Suni), 곧 무함마드의 ‘가르침(Sunnah)을 따르는 사람들’이라 부릅니다. 반면 ‘혈통을 따르는’ 친무함마드계 세력은 시아파(Sia, 분파)라 불리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은 이슬람교의 최고지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다툼에서 분열된 것입니다.

당시 분열된 중동을 강력한 무력으로 평정하며 이슬람교를 안착시킨 무함마드의 성공은 그 혼자의 힘만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겐 강력한 동료들과 강한 힘을 지닌 지지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수니파 계열입니다. 이들은 지역과 혈연, 민족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권력과 종교중심국가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단순히 무함마드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혈통을 중시하는 시아파에게 양보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늘 기독교로 유비하여 보면, 베드로라는 교황의 전통을 중시하는 가톨릭이 이슬람의 시아파로, 반면 교황이나 교권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을 따르는 개신교를 수니파로 비유하면 이해가 쉬울 듯합니다. 개신교는 교황의 교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맘(Imam)으로 불리는 이슬람교의 종교지도자가 수니파와 시아파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면 좀 더 잘 이해됩니다. 먼저 수니파 이맘은 단순히 예배를 관장하는 종교지도자에 불과하며 이맘이 될 수 있는 자격 또한 별다른 특별함이 없습니다. 오늘 개신교의 목사의 지위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반면 시아파 이맘은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스승이며, 신성한 존재입니다. 또한 실수를 할 수 없는 초인적인 존재로서 이슬람 율법에 대한 해석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아파 이맘은 종교는 물론 정치와 사법권의 모든 권력을 소유합니다. 오늘 가톨릭의 교황을 시아파의 이맘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란 이슬람 혁명을 완성한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1989)가 바로 시아파의 이맘이었습니다. 그는 이란에서 신을 대표하여, 이 땅에 내려온 초인적인 존재같이 추앙을 받았고 힘을 행사했습니다.

<시아파와 수니파 분포>

아무튼 오늘날 수니파는 이슬람의 약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시아파는 약 10% 정도에 불과합니다. 최근의 역사로 보면, 보통 서방의 주요 국가들에겐 IS의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주로 이란으로 대표되던 시아파를 세계평화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인식해왔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지원으로 이란을 통치했던 팔레비왕조를 호메이니를 주축으로 한 시아파 종교 세력이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지만(Iran-Iraq War, 1980~1988) 실패로 끝나고, 이란은 더욱더 서방국가들과 멀어지며 반서방지역과 관계를 키워나갑니다. 이후 이란은 미국을 선두로 한 서방국가들에 의해 ‘악의 축(부시는 여기에 북한도 포함했죠)’으로 불리며, 여러 제재에 시달렸습니다.

다시 살라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아랍 지역은 한정된 자원인 오아시스를 차지하기 위해 매일 같이 약육강식의 혈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쟁도 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도 기독교인들에게 빼앗겨 버렸죠. 이렇게 내외부적으로 전쟁의 바람이 그치질 않을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소수민족 쿠르드(Kurd)족 출신인 살라딘입니다. 쿠르드 족은 오늘날까지 단일 민족으로, 독자적인 국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가장 큰 종족입니다. 3,000만 명 정도가 됩니다. 대부분 수니파입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살라딘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살라딘의 권력이 커갈수록 우리들의 두려움도 커져간다. 그는 통찰력과 용기를 가진 인물이며 영토는 금방 두 배로 늘어났다. 우리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원수들에게 조차 존경을 받은 위대한 군주가 바로 살라딘입니다. 역사는 그를 ‘문명의 화해자’라고 부릅니다.

살라딘은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고 소수민족인 쿠르드 족 사람인 그가 제국을 통치하려면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을 공격하고, “이슬람이여, 단합하자!”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입성합니다. 살라딘은 기독교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안전하게 기독교권(유럽)으로 보내주겠네. 남녀노소 백성 전부와 기사들, 병사들, 여왕까지도, 맹세코 안전을 보장하겠네.” 당시 십자군의 책임자였던 발리안(Balian, 1140-1193)은 이렇게 묻습니다. “십자군은 입성 때 이슬람을 학살했소.” 살라딘의 말입니다. “난 그들과 달라. 난 살라딘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 2005)은 살라딘과 발리안을 이야기 합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역사상 중세문화 고증을 가장 완벽에 가깝게 실현한 영화’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영화에서 발리안은 협상을 타결한 후 이렇게 묻습니다. “What is Jerusalem worth?”(예루살렘은 어떤 곳이죠?)  살라딘은 뒤로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걸어가며 대답 합니다. “Nothing!” (아무것도 아니지.) 어이없어 하는 발리안에게 살라딘은 뒤로 돌아 천천히 두 주먹을 가슴에 올려 쥐고, 발리안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합니다. “and Everything”(모든 것이기도 하고)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죠?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 되기도 합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싸움과 전쟁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펼쳐집니다. 후계자의 정통성 때문에 분열되어 싸웁니다. 교리 때문에 서로 증오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안에는 힘과 권력이 있습니다. 또한 그 권력과 힘을 누가 가지느냐에 따라 싸움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섬김과 봉사가 아니라, 지배와 정복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인가요? 그래서 힘을 숭배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왕을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힘과 권력의 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먼저 섬김과 봉사의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왕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서신서는 그 이유가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는 ‘죄의 정욕(롬 7:5)’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복음서 말씀에서 말씀의 진리를 떠난 이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책망하십니다.

2.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구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섬김과 봉사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 민족, 제사장의 나라로 다른 모든 나라의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하는 이스라엘은 450년 동안 이어온 사사 시대에 대해 환멸을 느낍니다. 주변국의 왕정 정치를 흠모하였으며,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늙고, 시대가 변했다고 생각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원치 않으셨지만 승인해 주십니다.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배반당한 하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삼상 8:1-2).” 그런데 사무엘의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삼상 8:3)”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삼상 8:4)” 이렇게 요청합니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 8:5).” 그러나 사무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6-7)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받은 사무엘, 그리고 택한 백성들에게 버림받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삼상 8:8-9)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러한 왕의 제도에 관한 사무엘의 말입니다. 길지만 쉬운 말씀이니, 오늘날과 비교하며 읽어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삼상 8:10-17)

이처럼 왕의 제도가 불합리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집을 꺽지 않습니다.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삼상 8:18-20)

결국 “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삼상 8:21-22)

따라서 이어지는 사무엘상 9장의 말씀은 사무엘이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만나,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다른 왕을 요청합니다. 이웃 나라와 같이 힘과 권력을 가지고 백성을 지배하는 왕을 요청한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3. 일본도 전국시대(센고쿠)를 그리워하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시대가 센고쿠 시대입니다.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인 센고쿠 시대(1467~1590년)는 군웅이 할거(割據)하며 서로 다투던 시대였습니다. 오닌의 난(応仁の乱)으로 다이묘(大名, 지방 영주)들이 독립하여 패권을 다투게 되면서 센고쿠 시대가 시작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센고쿠 시대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피도 눈물도 없는 하극상의 시대였습니다. 남자로 태어나면 전쟁에서 싸워 죽는 것을 미덕으로 세뇌당해 싸우다 죽었으며, 여자로 태어나면 노동력 생산의 도구가 된 시대입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왜 센고쿠 시대로 가고 싶어할까요?

우리가 잘 아는 중국 『삼국지』의 세 영웅, 유비·관우·장비와 같이 일본도 센고쿠 시대의 세 영웅이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이들의 성격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 손 안의 새가 울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 사람은 각각 다르게 말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성격을 잘 말해줍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죽여 버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든 새가 울게 만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

<좌로부터 센고쿠 시대의 세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결국 오다가 쌀을 찧어, 도요토미가 반죽한 천하라는 떡을 힘 안들이고 먹은 이는 도쿠가와였습니다. 이렇게 도쿠가와에 의해 일본의 에도 시대(江戶時代)가 시작됩니다. 에도는 오늘날 일본의 수도인 도쿄입니다. 이후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막부(幕府, 바쿠후) 체제 아래 국내적으로 평화를 구가하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을 이룩합니다. 일본의 마지막 봉건시대(1603~1867)가 250년간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1867년 12월 9일 왕정복고파가 바쿠후 타도파와 결합해 왕정복고 쿠데타를 단행하여 메이지 신정권을 수립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메이지 유신이죠(명치유신). 따라서 도쿠가와 바쿠후가 붕괴되고, 덴노(천황) 중심의 통일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천황체제 하에 서양 문물을 급속도로 받아들여 일본의 근대세계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백성들, 곧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이 센고쿠 시대가 어땠을까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농민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놀랍죠? 지금도 일본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어진 사람이라고 평가 받는 도쿠가와의 말입니다. 즉, 농민이란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죽을 때까지 착취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일본의 센고쿠 시대와 바쿠후 체제>

노예와 같은 삶 속에서, 일본 사회 특성상 신분이 고정되어 있어서 죽을 때까지, 그리고 자손들도 영원히 노예의 삶을 살았던 그 시대, 지금 일본인들은 그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농민이나 노예의 삶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영웅의 모습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예는 누구일까요? 물론 일본 안에 있는 농민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요? 바로 조선인들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세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따라서 이웃 나라 일본사람들이 ‘센고쿠 시대’처럼, 뛰어난 능력과 힘과 부를 가진 이가 쇼군이 되어 다른 사람을, 혹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노예로 삼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 생명이 생명답게 존중받는 ‘하나님 나라’를 그리워 할 때, 한일 관계가 올바로 회복이 되겠지요? 하나님 나라는 센고쿠 시대처럼 노예와 영웅의 구별이 없습니다. 복음서 본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죄인으로 취급받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밥상공동체로 이야기하는데, 바로 그러한 세상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8-19)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나 죄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 대신 왕을 세우고 선이 아니라, 악의 길로 달려갑니다. 우리 가운데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4.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롬 7:5)”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죄의 정욕이 우리들 중 몇몇에 역사하여 사망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군 전쟁과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신구교 전쟁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지구상에서 가장 잔인한 전쟁을 일삼고 있습니다. 근현대에 들어서도 식민지 쟁탈전과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영토 침범 등 모두 가톨릭과 개신교인들이 자행했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폭력을 일삼은 역사입니다. 죄의 정욕이 우리 가운데 역사한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인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율법 그 자체를 악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오해할지 모르는 ‘율법 폐기론’에 맞서서 율법 자체의 선함과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는 율법의 역할과 기능을 소개합니다. 특별히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바울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율법이 없다면, 기준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십계명의 금지의 명령과 “~하라”의 명령이 우리에게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그러나 바울은 더 나아가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롬 7:8).”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율법의 조문을 벗어나야하는데,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얽매였던 것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영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죄의 속삭임에 넘어가버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율법 자체의 선함과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는 율법의 역할과 기능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공동번역 말씀으로 보겠습니다.

“나는 전에 율법이 없을 때에는 살았었는데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가져다 주어야 할 그 계명이 나에게 오히려 죽음을 가져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계명을 기회로 나를 속이고 그 계명으로 나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어디까지나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정당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좋은 것이 나에게 죽음을 가져왔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죄가 그 좋은 것을 매개로 해서 나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죄는 죄로 드러나게 되고 계명으로 말미암아 그 죄가 얼마나 악독한 것인지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롬 7:9-13)

놀라운 말씀입니다. ‘율법 대긍정론’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정당하고 좋은 것입니다. 이런 좋고 선한 것이 우리에게 악하게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이 물음의 답이 바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고 봅니다.

5. 화있을진저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이여!

예수님은 복음을 거부하는 마을에 대해 안타까워하십니다. 그 마을은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들러, 친히 진리의 말씀을 증거해 주셨고 이적과 기적을 많이 행하셨던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자기의 본 동네라고 부를 만큼 많은 이적과 가르침을 베푸신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물론 고라신과 벳새다 역시 가버나움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성읍이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자주 그곳을 다니면서 많은 기적과 은혜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세 도시가 장차 주님의 심판 날에 더 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구약 시대의 소돔과 신약 시대의 두로와 시돈 사람들보다 더 혹독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소돔과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비록 악행과 죄를 많이 저질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대적으로 덜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소돔 성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했지만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두로와 시돈 역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많이 보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잠시 한번 들리셨지만, 그곳에서 권능을 베푸시고 가르침을 펼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적과 권능을 베푸셨고, 오랫동안 진리의 말씀을 전했던 가버나움과 벳새다와 고라신은 그토록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 날에 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6-17)

오늘 세 본문 말씀의 제목을 ‘심판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로 붙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성도들, 그리스도인들, 그들에게 심판은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한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 11:20-24)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고가 되는 말씀이 되어, 적어도 세상 사람들보다는 상식적이고, 도덕적이고, 좀 더 서로를 배려하는 사람,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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