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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원에 이르는 지혜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렘 31:31-34; 딤후 3:14-17; 눅 18:1-8)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19.10.22 01:42

< 1 >

광화문 교보문고 건물 앞에 이런 글이 새겨진 조형물이 있습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맞는 말입니다. 물론 모든 책이 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아니고, 또 어떤 책들은 차라리 안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으로 평가받는 것들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책들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세상을 변화시킨 책들은 많지만, 단 한 권의 책이 끼친 영향력에서 본다면, 단연 성경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단테, 마틴 루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아브라함 링컨을 비롯한 크리스천은 물론, 그리스도교 밖에도 성경 때문에 인생이 바뀌고 세상을 변화시킨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 불교는 책의 종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마다 경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은 유대교에 그 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약 76억 명의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 유대인은 1천 5백 만 명이 채 안됩니다. 세계인구의 0.2%도 되지 않는 숫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작은 수의 유대인들이 2천년 동안 나라 없는 디아스포라로 살면서도, 과학, 문학, 음악, 경제, 철학 분야에서 수많은 큰 인물들을 배출한 것은 그들의 뜨거운 교육열과 신앙, 특별히 ‘율법’에 대한 열심이 배경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토라’,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참으로 등불이요, 그 가르침은 빛이며, 그 훈계의 책망은 생명의 길’(잠언 6,23)이었습니다.

▲ Marc Chagall, “The Prophet, Jeremiah”(1968) ⓒGetty Image

그러나 성경은 이해하기 쉬운 책이 아닙니다. 주전 12,000년경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주전 4,000년경에 이르는 이른바 신석기 시대의 혁명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 – 그리스어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땅을 가리키는 말인데 – 이 두 강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의 생활, 생각과 언어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수메르, 앗수르, 이집트, 바벨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엄청난 역사적 굴곡 속에서 마침내 나라를 잃은 유대 민족의 복잡한 역사도 성경을 더욱 난해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이웃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었고, 특정한 개인 혹은 공동체에 의해 수집 또는 기록되고, 전승되고 편찬되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성경은 결코 이해하기 쉬운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원인은 한 성경 안에 서로 다른 하나님이, 서로 다른 가르침이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보복과 심판, 폭력과 파괴의 하나님을 만나는가 하면, 사랑과 온유, 끝까지 참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도 만납니다. 예언자 이사야와 미가는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미 4,3)고 하나님의 비전을 선언했지만, 예언자 요엘은 정반대되는 비전을 주장합니다: ‘전쟁을 준비하여라! 용사들을 무장시켜라. 군인들을 모두 소집하여 진군을 개시하여라!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욜 3,9-10).

우리는 4개의 복음서에서 서로 다른 예수님을 만납니다. 산상수훈의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록의 예수 그리스도와 분명히 다릅니다. 요한은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16)고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요일 2,16)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또한 ‘위험한 책’입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그 안에서 놀라운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윤리적 규범이나 도덕적 삶을 위한 지침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곧바로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오래된 신화적 언어로 기록된 낯선 이야기들, 등장하는 수많은 형태의 인간 군상들, 삶에 대한 탄식과 충만한 생명의 기쁨, 고통과 치유, 십자가와 부활 사건 속에서 우리 존재의 터전이 흔들리는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살아있는 오래된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대가인 존 도미닉 크로산은 성경 안에는 이렇게 상충되는 주장과 전복의 리듬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경 안에 있는 이야기와 사건들이 다양한 주장과 전복의 패턴을 보이고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디모데 후서에 의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줍니다.’(딤후 3,15). 이 말은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거나, 성경 자체 안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와 관련되어 이해될 때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지, 성경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구원을 준다는 생각, 성경의 단어 하나 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을 ‘성서주의’(biblicism)라고 합니다. 성서주의자들은 성경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며 기준이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전통과 신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은 신앙의 원천이며 기준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유일한’ 원천이며 기준이라는 주장이 성경의 학문적 탐구를 막는 도그마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의 저자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당시에 성경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취사선택한 영지주의자들로부터 성경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의 일부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성경을 총체적으로,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빛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는 말씀(All Scripture is God-breathed/von Gott eingegeben)은 성경 저자가 무의식 상태에서 성령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썼고, 그러므로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다는 축자영감설, 혹은 성서문자주의를 뒷받침하는 주장이 아닙니다. 아무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은 상호 모순되는 성경 자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지만,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을 오히려 막고 제한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것은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스며있다는, 성령의 감동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도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저자는 성경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고 합니다. 저자는 구약성경과 바울 서신들, 복음서들을 염두에 두고 말했을 것입니다. 교훈과 책망은 교리논쟁을 위해,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는 신앙생활을 위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의 저자는 초대 교회가 성경으로, 한편으로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딤후 3,13)의 거짓된 가르침을 바로잡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희망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저자는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박해와 고난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의 지도층 인사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였고, 그들을 그 지방에서 내쫓았고’(행 13,50), 이고니온에서는 ‘이방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이 그들의 관원들과 합세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돌로 쳐죽이려고 했으며’(행 14,5),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몰려와서 군중을 설득하고, 바울을 돌려 쳤는데,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그를 성 밖으로 끌어냈다’(행 14,19)고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들의 핍박과 박해를 견디면서,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행 13,52), ‘성경에서 배워서 굳게 믿는 진리 안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딤후 3,14). 그런 사람은 말씀을 힘입어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은 성경 말씀에서 온다는 것이지요.

< 2 >

그렇다면 신앙의 원천이자 신앙생활의 힘인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첫째, 성경은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귀로 읽는 책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낭송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 등 이른바 ‘책의 종교’라고 불리는 종교들은 경전을 낭독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 주에 ‘마울브론’(Maulbronn)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11세기에 세워진 침묵수도원이 있는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소신학교가 되었다가 나중에 김나지움이 되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소설가 헤르만 헷세, 과학자 케플러, 시인 횔더린이 여기서 공부했습니다. 이 수도원 건물 옆에는 파우스트 박사가 실제로 연금술을 연구했다는 탑이 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수도승들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이 수도원에서는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한 사람, 성경을 낭송하는 수도승만이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말씀으로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성령님은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선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은 성경을 말해진 말씀으로 읽고 선포할 때 드러납니다.

둘째, 성경을 읽을 때는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 이야기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비유’(눅 18,1-8)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줄곧 찾아가서 귀찮게 한 과부의 권리를 마침내 찾게 해주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처럼 하나님도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얼른 찾아주실 것인데, 문제는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기도가 금방 응답받는다면, 낙심할 사람 없겠지요. 그러나 기도해도, 기도하면 할수록, 의심과 낙심이 커질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곧바로 응답되지 않는다고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안되는 것처럼, 성경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읽기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니,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셋째, 성경은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자식들의 이가 시게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렘 31,29-30). 조상들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후손들에게 묻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죄악에 대한 책임은 오직 각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십니다. 출애굽하면서 세운 언약과는 다른 언약, 제2의 탈출이라고 할 수 있는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하여 세우는 새 언약은 더 이상 돌 판이 아니라, 각 사람의 가슴 속, 마음 판에 새겨 기록되어야 합니다(렘 31,33).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렘 31,34).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성경을 통하여 이르러야 할 목표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이보다 더 큰 은혜,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은 동시에 전도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의 저자는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딤후 4,2-5)라고 권면합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나 신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전도는 우리가 좋은 크리스천이 되기 위하여 하는 것이지, 믿지 않는 사람을 나쁜 크리스천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도, 무엇에도 매여 있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딤후 2,9),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고,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내는 하나님의 말씀’(히 4,12)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지혜가 될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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