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세상에 적응하려는 그리스도인하나님 나라의 대헌장 (6)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19.10.23 18:13

문: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서 이런 혁명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가?

답: 예수께서 이에 대해 대답하신 것은 이렇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겨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복음 5장 13-16절)

문: “세상의 소금”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답: 뭔가 중요한 것을 뜻한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한다. 그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들인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제자들은 부패로부터 세상을 보호한다. 세상은 단지 힘을 위해 힘을 추구하다가 그것으로 인해 망할지도 모른다.

문: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들이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아주 소수인데?

답: 물론이다. 많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양에 간을 맞추기 위해서 많은 소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국민 모두와 시대를 구하기 위해 소수가 있어도 충분하다. 간혹 한 사람 만으로도 충분한 경우도 있다. 단지 이 소수의 사람들은 흠없이 온전해야만 한다. 소금은 “게으르거나”, “어리석어서는” 안 된다.

문: 소금은 늘 소금이지, 그것이 어떻게 “어리석거나”, “게으르게” 되는가?

답: 소금은 이물질과 섞일 때 “둔해지거나 게으르게” 괸다. 이때 소금은 소금으로서의 힘을 잃는다.

문: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답: 이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일과 진리에 대한 실제적으로 유일한 위험이다. 그리스도의 일과 진리를 위협하는 것은 오해, 박해, 패배가 아니라 – 이것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축복일 것이다. - 그리스도의 일과 진리에 속화(Verweltlichung)이다.

문: 속화란 무엇을 뜻하는가?

답: 그것은 두 가지 중요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리스도의 일이 세상 자체를 정복하고자 들고, 세상과 동맹을 맺고 세상의 힘, 즉 돈, 권력, 명예나 그와 같은 것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또는 그리스도의 일이란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적응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선포의 진지성은 약하게 된다. 그래서 복음과 세상을 혼동할 정도로 복음을 세상에 동화시킨다. 날카로운 칼끝처럼 심판하고 구원하면서 세상 속으로 들어와야 하는 복음의 날(Spitz)을 세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때까지 갈아서 닳게 한다. 그렇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일이 곧 세상의 제가(Sanktion) 외에 다름 아닌 것이 될 때까지 일을 꾸미고, 그리스도의 일을 악용함으로써 세상의 불의를 정당화시키고, 나아가 예수의 말씀과는 정반대되는 가장 나쁜 의미에서, 즉 “기독교적”이라는 외모의 추가로 더 확고하고, 양심의 공격도 더 잘 방어할 수 있는, 악이 그 자신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존시키는 수간으로써의 소금으로 될 때까지 일을 꾸미고, 복음이 그 “칼끝”을 세상을 향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게 될 때까지 일을 꾸민다.

문: 하지만 진리는 그것이 영향을 주고자 하는 인간에게 적응해야만 하지 않는가? 교사는 학생들에게 적응해야만 하지 않는가? 바울도 유태인에게는 유태인이 되고,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이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그들이 아직 단단한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하므로 우선은 젖만을 주었다고 설명하지 않았는가?(고린도전서 9장 19-21절과 고린도전서 3장 1-3절 참고)

답: 이것은 잘못을 탓할 수 있는 적응이 아니다. 이것은 진리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진리와 대상과의 연결일 뿐이다. 이런 단순한 연결에 있어서 소금이 실제로 사용되지 않았다면, 소금은 그대로 소금이다. 진리는 진리로 머물고 타협으로 바뀌지 않는다. 소금은 소금으로서의 짠 맛을 간직한다. 진리는 날카롭고 엄격해야 한다. 진리는 반만 주장해서 안 되고 전부를 주장해야 한다. 진리는 칼이다. 그것은 잘라야 하고 상처를 입혀야 한다.

문: 그것은 사랑에 위배되지 않는가?

답: 그것은 사랑의 완성이다. 진리를 위해 일하고, 증언하고, 고난을 받는 것이 가장 고귀한 사랑의 모습이다. 이런 사랑이 예수 안에서 나타났다. 예수는 바로 그런 사랑으로써, 날카롭고, 대담하고, 혁명적인 진리이며, 세상의 소금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소금의 특성을 이어 받았다. 이와 같이 그는 부패로부터 세상을 보존한다. 진실을 말하지 않거나, 유약하게 포기하거나, 적당히 미화시키기나 얼버무리는 것이 사랑인 것으로 아는 잘못된 기독교적 사랑이 있다. 이런 잘못된 사랑은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대시킨다. 예수께서 “너희들은 세상의 버터다”라든가. “너희들은 세상의 설탕”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던 것을 잘 이해하기 바란다. 기독교의 소금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가차없이 용감하게 투쟁하는 진리의 힘이 거의 없기 때문에 기독교의 소금은 밖으로 던져지고 길에 밟히는 더러워진 소금의 운명을 맞이한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의 신세가 바로 그렇다. 그리스도의 진리의 소금이 짠 맛을 잃는다면 이 세상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라 전혀 없다. 그리스도의 일 자체가 더러워진다면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사람들이 찾는 소금의 대용품이란 만족스럽지 못할 뿐 아니라, 종종 유독물질이며 부패를 더욱 심하게 한다. 단지 그리스도의 일만이 필요한 소금의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이 다시금 소금이 되게 하라. 여러 공동체들과 운동들과 개개인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일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도록 하라. 그러면 그리스도의 일이 얼마나 빨리 이 땅의 소금이 되는지 그대들은 보게 될 것이다.

문: 그러나 “더러워진” 소금이 다시 순수한 소금이 될 수 있겠는가? 던져지고 밟힌 소금이 다시 사용될 수 있겠는가?

답: 자연의 이치상으로는 물론 그럴 수 없겠지만, 정신적으로는 그걸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일이 장애가 있거나 불행이 생겨도, 내던져지고 밟혀져도 바로 그 가운데서 세상으로부터 떠나서 자기자신에게 돌아옴으로써, 즉 방향을 바꿈으로써 다시 소금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오리가 오늘날 이런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의 일은 분명이 그 소금의 짠 맛을 다시 얻고 있다.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