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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自强不息내 아버지가 일하니 나도 일 한다, 이런 예수가 거짓뉴스 탓에 죽었다(요 5:10-17)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9.10.23 18:19
9월 마지막 주일 평신도 중심으로 모이는 겨자씨 교회에서 했던 설교 전문입니다. 여러 곳을 다시 수정했습니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현실을 걱정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 저자 주

사람들은 무덥고 추운 여름, 겨울보다 봄과 가을을 선호합니다. 봄이 좋은 것은 차디찬 대지를 뚫고 생명이 움트는 경이를 보는 까닭입니다. 온 산하가 실(實)한 열매를 맺는 가을, 그 풍요로움 때문에 사람들은 이 절기를 좋아합니다.

본래 아름다움이란 말은 봄보다 가을에 써야 제격이라 합니다. ‘아름답다’란 말의 어원이 ‘알’, 곧 실한 열매에서 왔다는 설(說) 때문입니다. 예부터 조상들은 온갖 열매를 맺는 가을을 아름답다 여겼고 이 가을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자신들 사는 곳이 아름답게 되었음을 감사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민족들 역시 추수한 열매를 보고 하느님 구원이 자신들에게 임했음을 고백했고 찬양했습니다. 아름답기에 감사했고 감사했기에 이들은 나누며 살 수가 있었습니다. 하늘에 드리는 제사와 나누는 일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상 함께 했던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누구도 홀로 독점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가을의 아름다움, 가을의 실과(實果)는 여타 절기의 도움 없이 절로 오지 않습니다. 겨울의 추위, 봄의 생명기운, 여름의 무더위가 없다면 가을은 의당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역』에서 보듯 ‘천지자강불식‘(天地自强不息)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하늘과 땅은 조금도 쉼이 없이 스스로 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강불식하는 하늘의 마음을 인간도리인 인의예지(仁義禮智)로 풀기도 했습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것, 이 절기에 감사를 생각한다는 것은 이처럼 쉼 없이 일하는 자연의 섭리를 기억하여 인간답게 살자는 뜻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거둔 열매는 오로지 ’천지자강불식‘의 결과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땀으로 이룬 것 같으나 이렇듯 보이지 않는 불식(不息)의 존재로 인한 선물일 뿐입니다. 자신이 맺은 모든 것을 떨구고 맨몸 되는 절기를 보며 우리 역시도 자신의 움켜쥔 손을 펼칠 준비를 해야 옳습니다. 우선적으로 자신들 후손을 위해서, 그리고 이들과 함께 살 이/저런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사회를 위해서 자기 손을 펼 수 있을 만큼 영적, 정신적으로 강해져야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강해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면 좋겠습니다. 성서 또한 천지의 덕(德)을 세상에 펴는 존재가 되라고 우리가 하느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라 가르칩니다.

이렇듯 ‘천지자강불식’이란 『주역』 첫 괘의 효사(爻辭)를 떠올리며 저는 요한복음 5장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말씀하듯이 38년간 앉은뱅이 상태로 지냈던 한 사람을 걷게 한 예수의 행적이 기록되었습니다. 평생 걷는 것이 소원이었던 그에게 예수는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평생의 한이 풀리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병자의 시각’에서 사태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 유대 법에 근거하여 안식일에 예수가 일한(고친) 것을 두고 시비를 걸었고 이 일로 예수를 죽일 결심을 더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의 최후 말씀이 5장 17절에 담겨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시비를 걸지 말라고, 아버지가 하는 일이니 나도 하는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천지 창조 후 하느님이 ‘참 좋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당신 지은 피조물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신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의 한(恨)이 있는 한 세상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참 좋다’는 신의 환호를 지속하기 위해 그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서 ‘천지자강불식’이란 말을 소환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고쳤던 예수의 일은 세상이 두 쪽 날지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었고 천지의 마음(측은지심)이었던 까닭입니다.

여름이 아무리 더워도 모든 생명을 태워 버리지 않습니다. 겨울이 춥다한들 움틀 생명조차 동사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식하는 천지의 마음, 세상을 측은케 여기는 하늘의 일입니다. 이렇듯 천지는 결코 불인(不仁)하지 않습니다. 예수에게 유대 율법인 안식일이 38년 된 병자의 탄식보다 결코 중요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선택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당대 법과 통념, 질서를 위반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런 선택이 하느님의 일이자 예수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선택을 지금 우리도 요구받습니다. 기독교인 된 까닭이겠습니다.

일본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굴지의 중견기업 임원으로 바다에 원유관을 묻고 기름을 찾는 일을 하는 제자가 몇 번 찾아왔습니다. 중·고등부 시절 제가 교회에서 가르쳤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오십을 훌쩍 넘긴 이런 공학도가 제게 최근 수차례 질문을 던졌지요. 여러 물음이 있었으나 한마디로 축약하면 기독교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하느님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것이냐고, 목사들이 하느님 음성 들었다며 자기 말을 따르라 하는데 저의 생각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평생 교회 생활을 하는 지식인이 아직도 이런 물음을 묻고 이 때문에 갈등하고 있으니 걱정스럽습니다. 그에 대한 제 대답은 이랬습니다. ‘몸의 아픈 곳이 우리들의 중심이 되듯 하느님은 세상의 아픈 곳을 중심으로 여기는 분’이라고 말이지요. 그 아픈 곳에 우선적으로 마음을 쏟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장 잘 따른 이가 예수이고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 기독교인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지하듯 힌두교는 이 세상의 ‘궁극성’을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세상 속 누구, 어떤 실체라도 우주적 존재(브라만)인 것을 강변하지요. 반면 불교는 실체를 부정하고 세상이 관계적으로만 존재한다는 연기설을 본질로 합니다. 실체인 세상을 거짓(假)이라 여기며 오로지 ‘관계성’을 핵심이라 가르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하느님조차 세상에서 죽을 수 있는 현실을 말하지요. 세상의 궁극성과 관계성을 부정하지 않으나 이것이 깨친 현실, 곧 ‘역사성’(부정성)에 무게 중심을 두는 종교란 것입니다.

세계의 부정성,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 그분이 하느님이고 예수는 그 일을 지금 한 연못가에서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방해와 위협을 무릅쓰고 한 병자를 옳게 세우는 일, 이것이 불인(不仁)치 않는 하늘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요한복음 5장의 사건은 단적인 예에 불과하겠습니다. 그러나 매순간 우리는 이런 선택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제도와 법 그리고 인습적 가치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불인(不仁)하지 않고자 이것들과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낼 것 인가?를 말입니다.

성서의 예수는 지금도 우리에게 ‘네가 보기를 원하는가?’를 묻습니다. 율법에 맹종했던 유대인처럼 우리 역시 온갖 인습적 판단, 정치적 성향, 자극적 언론 탓에 ‘사실’을 접하며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의견이 사실로 둔갑되는 탈(脫)진실 현실에서 우리 모두 장님으로 살 뿐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결코 아름다울리 없습니다. 억울한 사람들, 한 맺힌 사람들의 절규가 내개 우선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는가?, 내가 보기를 원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며 사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겠습니다. 이런 질문 앞에서 비로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들의 ’대답‘이라면 도대체 우리들의 물음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거듭 생각하며 살 때입니다.

세상 속 부정성을 고치는 일, 그것이 사적 차원에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일이겠으나 공적차원에서는 불의한 구조를 공정하게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렸던 세상의 궁극성과 관계성을 옳게 회복시켜내야 합니다. 성서는 이런 회복을 일컬어 복음(福音)이라 말했습니다. 의지할 곳 없는 가난한 청년들에게는 ‘기본소득’이 복음이 될 수 있겠습니다. 하늘계신 그분께 일용할 양식을 구할 것을 예수가 가르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유지, 존속될 수 있고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조국 장관 사태에서 보듯 우리 시대 20대 청년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좌절하는 그들에게 새 길을 여는 일이 안식일에 일어나야 합니다. ‘네가 낳기를 원하는가?’란 예수 말씀에 귀 기울인다면 기독교는 이를 위해 역사 앞에 서야 합니다. 이런 청년고통마저 정치적 정쟁(政爭)수단으로 삼는 정치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 마음은 한없이 불인(不仁)하면서 이들 고통을 운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렇듯 세상이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함께 평화로운 세상 되기를 예수가 바랐고 바울이 꿈을 꿨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떤 제약이라도 뚫고서 하느님의 일, 예수의 일을 지속해야 옳습니다. 하느님의 의(義), 복음은 세상의 어떤 법(法)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세상 법을 초월하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이자 복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늘 일을 부정하고 방해하는 집단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하느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확신하던 유대인들이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법으로 알았지 그 뜻(일)으로 마음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여 이들은 ‘천지자강불식의 하느님을 죽이려 했고 그 일을 중지시키고자 모의했습니다. 그가 자신을 하느님과 같게 봤다는,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했다는 거짓뉴스를 전했고 대중들은 이 말을 신뢰했습니다. 정작 38년 된 병자가 걷게 되었다는 소식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병자가 걸었다‘는 말 대신 예수가 율법을 어겼다는 말이 퍼진 것입니다.

이점에서 기쁜 소식. 곧 복음과 반대되는 말은 우리 시대 말로 하면 ‘거짓 뉴스’라 할 것입니다. 신약성서를 읽다보면 예수는 평생 거짓뉴스에 시달리다 그 때문에 죽으셨던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행했던 일은 묻혀 폄하되었고 그의 말을 왜곡시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십자가상에서까지 자기를 매단 사람들이 자신이 한 말, 한 일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그들을 품고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구약성서 ‘십계명’에는 ‘이웃을 해하려 거짓 증거 말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십계명이란 종교적 계명처럼 보이지만 실상 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약속일 것입니다. 바빌론 포로기 이후 남의 나라애서 살지만 제대로 된 유대 공동체를 일궈보자는 취지가 담겼습니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때론 한두 번 거짓을 말할 수 있습니다. 허나 남을 해하고자 고의적 거짓을 반복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속되어야 할 선한 일에 태클 걸고 급기야 유대인처럼 예수(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인 까닭입니다. 이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天地自强不息’의 하느님과 맞설 수 없습니다. 하늘의 일을 막는 것은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입니다. 하늘 일을 막는 사회와 교회, 이들은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운명, 곧 베어 질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성직자처럼  교회가 거짓뉴스의 진원지가 되고 예배가 거짓뉴스를 생산 유통시키는 수단이 되고 있으니 오늘의 교회는 하늘에 감사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유대 성전이 무너졌듯이 교회 역시 허물어 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를 주제로 예배 드리는 것은 예수가 그랬듯이 하느님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나를 통해서 천지자강불식의 그 사랑(仁)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할 목적에서입니다. 세상의 아픈 곳을 중심으로 여기는 하느님의 마음을 품고 하느님 마음 되어 세상을 살면 우리들 삶에도 알맹이가 맺힐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가 중요합니다. ‘어느 곳, 어느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의 물음이 진지해 지길 바랍니다. 이 물음에 옳게 답해야 가을 닮은 아름다움을 우리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주는 구원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열매들 때문에 모두가 좋으니 아름다운 것입니다.

말했듯이 유대인들은 자연이 자신에게 준 열매를 보고 하느님의 구원을 노래했습니다. 거짓은 실(實), 곧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열매를 쉼 없는 하늘의 마음(仁)이 있었다는 반증으로 여긴 것이지요. 자연이 열매로 증명하듯, 이를 구원의 징표로 여겼던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하며 거짓이 진짜처럼 활보하는 이 땅의 현실을 함께 많이 걱정하십시다. 거짓은 결코 이 땅을 아름답게 만들 수 없습니다. ‘천지자강불식의 하느님, 거짓 없는 성(誠)인 하느님을 바랄 뿐입니다. 안식일에 38년 된 앉은뱅이 병자를 고치신 예수의 마음과 공감하며 살아가십시다. 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고 안식일을 기념하는 종교행위입니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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