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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다르지 않다, 역할이 다를 뿐이다이정배 교수, 2기 작은교회 아카데미를 말하다 (1)
이정훈 | 승인 2019.10.24 18:27

작년 이맘 때,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1기 작은교회 아카데미. 제목만 봐도 압도적인 책들을 2박 3일 동안 소화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아카데미는 탈성장이라는 주제를 책들과 함께 훌륭히 소화해냈다.

이제 작은교회 아카데미 2기를 앞두고 아카데미를 이끌고 있는 이정배 교수님을 만났다. 감신대에서 자원 은퇴하고 이제 거리의 신학자로 살아가고 있는 이정배 교수님을 만날 때면 그 열정에 늘 압도되곤 한다. 그 열정이 이야기 하는 작은교회 아카데미 2기의 주제인 “탈성직”에 대해 이야기를 청했다.

탈성직, 고착화된 역할의 변화를 일으킨다

먼저 언뜻 와닿지 않는 “탈성직”에 대해 이 교수님은 이 단어가 주는 어감에서 비롯된 반발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걸 우리보고 어떡하라는 이야기냐? 하는 주제에 대한 궁금증도 많고 주저함도 있고 반발도 있는 것 같습니다.” 기자 자신도 반발까지는 아니어도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였는데 이런 반발 아닌 반발이 충분히 예상되기도 했다.

이어 이 교수님은 “탈성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성직이라는 개념을 존재론적인 위상이 아니라 회중 안에서의 역할의 문제로 이해하자고 강조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성직자의 위상 문제가 역시 전면에 등장해 있다. 하지만 이 교수님은 또 하나의 문제를 제기한다.

“현 시대 교회의 평신도들은 수동적인 역할로 이해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목사들에게 성직에 대한 존재론적인 역할이 아니라 민주적인 발상을 요구하는 만큼 평신도들도 자기들도 일상에서 성직자라고 하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평신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지는 너무도 오래된 이야기이다. 작고하신 한 교단의 목사는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책으로 한국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막 딱 거기까지였다.

▲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자원 은퇴하고 거리의 신학자로 살악라고 있는 이정배 교수. 그를 통해 작은교회 아카데미 2기에 관한 이모저모를 들어보았다. ⓒ이정훈

여전히 한국교회의 성직자와 평신도의 위상이 고착화되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교수님이 언급한 평신도들의 수동적인 역할에 대한 요구는 변하지 않는 바위처럼 보인다. 특히 이 교수님은 목회자와 평신도의 위상 변화를 교단과 목회자들의 삶의 환경에서 찾았다.

시대의 변화 앞에 교회는 변할 수밖에 없다

“(각 교단들이) 목회자들의 삶을 책임질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목회자들이 이중직·삼중직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 기본적으로 사회구조가 달라지고 경제적인 배경이 달라졌기 때문에 목사님들도 일터에서 그 삶을 같이 공유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한다면 이런 기회에 성직에 대한 개념도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보게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저성장을 넘어 역성장으로 접어든 시대에 성직자들도 교회가 아니라 일반 노동현장을 찾아야 하는 현실. 이 현실은 당연히 성직자의 위상 변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한국교회가 맞이하고 있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타계해 보자는 의도로 보였다.

그렇다면 탈성직을 통한 교회의 변화상은 어떨까? 여전히 한국교회에서 성직자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설교, 성찬 그리고 세례식 같은 부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평신도들이 설교하도록 배치하는 교회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평신도들의 설교는 신앙간증 쯤으로 치부되는 현실은 어떨까?

“저 같은 경우도 30-40년 신학을 했으니 주워들은 게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마는 시골에 할머니가 새벽기도 나와서, 주여, 한마디 하는 그 진심과 내가 하나님 어떻고 하는 것보다 내가 낫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설교를 하던 기도를 하던 우리가 솔직할 수 있느냐 진실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설교가 될 수 있고 기도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남에 것만 들으려 하지 말고 자기 것을 이야기함으로 자기를 다시 깨우치고 돌보고 이렇게 살아보자 이런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시간에 걸친 인터뷰의 1부를 싣는다. 2부는 내일 게재하도록 한다. 다음은 이정배 교수님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 이번이 두 번째 아카데미를 진행하게 되셨습니다. 소감이 어떠세요?

잠깐 역사를 돌아보자면 생명평화마당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작은 교회 박람회를 진행했습니다. 박람회 행사를 다섯 번에 걸쳐 끝내고 “작은 교회 아카데미”를 하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첫 번째 작은교회 아카데미에서 “탈성장”이라는 주제로 고민을 같이 나눴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은 안 하고, 탈성장이라는 말을 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기후붕괴문제로 시민단체와 종교단체가 같이 세미나 하는 자리에서 노동단체 소속 한 분이 탈성장 담론을 제일 먼저 꺼낸 곳이 종교 쪽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 기후 붕괴시대를 맞이하고 저탄소 시대를 열어야 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역성장, 탈성장이란 말들을 기업에서, 세계적 차원에서 실질적이고 의미 있고 중요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자본주의적인 욕망으로 팽창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탈성장을 표명했는데, 그 담론이 기후 붕괴 문제로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교회가 그것을 먼저 이야기했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고마워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좋은 주제를 선택했구나 생각했습니다.

탈성장은 지난 학기 네 권의 책을 가지고 20여명이 모여서 집중토론을 했죠. 그 때 막 교회를 시작하려는 젊은 목회자들이 참여해서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도 해주어서 보람이 있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학기는 사실 올해 4월 부활절 때 했어야 했어요. 하지만 여력이 부족하기도 해서 1년에 두 학기씩 하기로 했던 것을 1년에 한 학기씩만 하자는 결정이 있어서 두 번째 학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 두 번째 아카데미의 주제가 “탈성직”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번 두 번째 작은교회 아카데비는 11월달에 탈성직을 주제로 진행합니다. 탈성장은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이 많고, 그 점에 대해서도 교회 안에서도 일상화된 말이기도 하고, 설득력이 있고 호소력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 주제가 “탈성직”이라고 하니까,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이걸 우리보고 어떡하라는 이야기냐?” 하는 주제에 대한 궁금증도 많고 주저함도 있고 반발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탈성직이라는 말이나 주제를 잘 이해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뷰에 응했던 것입니다. 

여러 형태도 세미나들이 많이 있지만 생평마당의 아카데미는 책을 가지고, 즉 근거를 가지고 진행하려고 포맷을 맞춘 것입니다. 근거 없이 생각나는대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결과물로 나온 책으로 진행하려는 것이죠. 그래서 이번 아카데미의 주제인 탈성직과 잘 맞겠다 싶은 책들을 선정한 것입니다.

사실 탈성장이라고 하면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나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탈성직 하면 여남을 막론하고 성직을 받으면 보이지 않게 특권의식 존재론적인 어떤 차이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탈성직에 대한 어감들을 좋지 않게 갖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좀 됩니다.(웃음)

▲ 탈성직이 가져올 교회의 변화상에 관해 이정배 교수는 여러가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정훈

▲ 사실 답변 중에 뒤에 나오는 질문의 내용과 어느 정도 연속되는 부분이 있어서 질문을 앞으로 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이단이라고 낙인찍은 모 교단 같은 경우는 성직가가 없고, 교우들이 설교를 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탈성직이라는 말속에 그런 걸 뜻하나?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탈성직이라는 말이 잘 와 닿지 않는 분들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탈성직 하면, 기본적으로 루터가 “만인제사직”이라는 그 원리를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루터가 말했던 종교개혁의 3개의 “오직” 교리는 많이 강조가 되고 있지만 만인제사직이라는 것은 거의 이야기도 안 되고 의미도 많이 퇴색된 것 같아요. 일단 탈성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성직이라는 개념을 존재론적인 위상이 아니라 회중 안에서의 역할의 문제로 이해하자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라 역할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탈성직이라고 해서 성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까지 “안수”라고 하는 제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특권화 되고 존재론적인 의미화가 강조되고 그로 인해서 부정적인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니 성직을 하나의 역할로 이해해 보자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를 루터가 말했던 만인제사직에 두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도 자기의 삶의 소명을 가진 사람이나 교회 안에서의 소명을 가진 사람이나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부름을 받았다라고 하는 만인평등 대원칙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대원칙 하에서 목사도 하나의 역할이고 다른 평신도들도 하나의 역할이라고 하는 생각을 한번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또한 탈성직이라는 개념에는 평신도들도 소명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 시대 교회의 평신도들은 수동적인 역할로 이해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목사들에게 성직에 대한 존재론적인 역할이 아니라 민주적인 발상을 요구하는 만큼 평신도들도 자기들도 일상에서 성직자라고 하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현실 사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도 아울러 포괄하기 위한 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나름대로 좀 더 민주적인 평등한 의식 속에서 자기의 일을 역할로서 생각을 하고 그래서 과도한 특권의식을 물리치고, 평신도들은 너무나 수동적으로 길들여져 오기도 했지만 평신도들이 일상에서 자기들이 소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조금 더 의식을 키워나가고 고양시키자는 흐름들을 다 같이 포섭하려는 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또 하나, 탈성직을 말할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인 요건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제가 속한 감리교단만 하더라도, 장로교단에 비해서 두 번째로 큰 교단인데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의 삶을 책임질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목회자들이 이중직·삼중직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세속적인 삶 속에서 자기의 삶을 영위해야 되는 상황 속에서, 일부 대형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은 나는 상관이 없어 이런 태도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사회구조가 달라지고 경제적인 배경이 달라졌기 때문에 목사님들도 일터에서 그 삶을 같이 공유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한다면 이런 기회에 성직에 대한 개념도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보게 된 것입니다.

▲ 탈성직이 그리는 교회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구체성을 보여주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성직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특권이라면 특권이 설교와 성찬 그리고 축도라고 볼 수 있죠. 당장 탈성직 하면 이런 것부터가 걸리는 문제잖아요. 하지만 설교라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다”, “성직자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구도 할 수 있다”는 전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실 요즘 평신도들도 설교를 하는 교회도 제법 많이 있으니까 여기까지는 쉬운데, 성례전은 또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제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서서히 성례전도 성직자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 하는 것이지 성직자가 일방적으로 베푸는 특권은 아니라는 것이죠. 축도 역시도 서로 손잡고 서로가 서로와 함께 하는 공동 축도의 형태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성직자만 할 수 있다고 하는 특권 아닌 특권 이런 것들부터 특권으로 이해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으로 교회 안에서 합의를 이루어가면 좋겠습니다. 예컨대 성직자가 한 달에 설교를 두 번 한다면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두 번 설교를 하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서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성만찬도 성직자와 평신도와 같이 이렇게 공동 주관할 수도 있는 문제고 세례예식도 보통 서양에서는 세례를 주면은 보조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같이 손을 얹고 세례를 주거든요, 단순하게 성직자의 보조자만이 아니라 참여자로서 같이 손을 얹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손을 얹는다는 말은 마음으로 축복한다는 이야기니까 얼마든지 그런 예식들을 교우들과 환호 속에서 세례예식도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교회 운영 문제는 지금 장로들도 너무 많이 타락을 해서 문제가 심각하죠. 근데 이런 상황이 성직자들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어쨌든 교인 총회를 만들어서 성직자도 총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도록 해야죠. 이미 그런 교회들이 제법 되잖아요. 성직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홀로 독재하는 시스템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죠. 사실 이미 그런 교회들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이제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문제와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재작년에 독일 교회의 날 행사를 가보니까 예배에서 성서만이 아니라 간디의 자서전이나 이웃 종교의 책도 읽더군요. 이런 것들이 그날 설교의 주제가 되어서 같이 이야기도 하고. 그리고 설교를 하는데 있어서 평신도와 성직자들이 사전에 이런 주제를 갖고 하겠다고 이야기하면 서로 의견을 나누고 듣고 집필은 나중에 성직자가 하더라도 그 본문을 갖고 내가 어떤 설교를 하면 좋겠는가 교회 사람들과 같이 의논해서 설교하는 모습을 내가 봤어요.

그러니까 설교가 성직자 혼자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이죠. 성직자는 주제를 선정하고 성직자가 성서 이야기를 하면 교인들은 성서가 아닌 다른 텍스트에서 그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같이 꺼내고 서로 같은 주제를 가지고 모두에게 설득력 있는 설교를 하는 것이죠.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설교를 만들어가는 것이죠.

이런 모습은 얼마든지 한국 교회에서도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 교회 성직자들이 존재론적인 특권을 내려놓으면 얼마든지 가능하고 민주적인 탈성직의 새로운 방향들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생각을 해보는 것이죠.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만 평신도가 설교를 하면 신앙간증, 평신도가 집전하는 성찬은 애찬식,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생각에 대해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관여했던 “겨자씨교회” 같은 경우에는 교우들에게 “기도를 하는데 원칙은 솔직하면 된다, 어떤 말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안 믿어집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런 하소연도 기도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늘 이번 학기에 강의 다 짤렸어요, 다음 학기에 강의할 게 아무거도 없습니다, 저 어떻게 살아야 하죠.” 해도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모든 이야기가 다 가능하다, 할 수 있다, 솔직히만 하자”고 늘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기도가 얼마나 설득력 있고 감동적이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지 몰라요. 천지창조부터 계시록까지 섬기는 미사어구 있는 것보다 기도의 본질에 더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신학교육도 문제입니다. 지금 목사 교육이 직업교육이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사람을 영적으로 다르게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지식을 주입시켜서 숙련도 안 된 어설픈 사람으로 내보내고 그걸 제도가 뒷받침 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런 사람들 보다 오랫동안 성서를 읽고 고민해 오면서 시대를 살아온 평신도들의 성서에 대한 고민들이 더 적실해서 어떤 목사나 신학자들의 설교보다 더 좋다고 판단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30-40년 신학을 했으니 주워들은 게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마는 시골에 할머니가 새벽기도 나와서 주여 한마디 하는 그 진심과 내가 하나님 어떻고 하는 것보다 내가 낫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설교를 하던 기도를 하던 우리가 솔직할 수 있느냐 진실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설교가 될 수 있고 기도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남에 것만 들으려 하지 말고 자기 것을 이야기함으로 자기를 다시 깨우치고 돌보고 이렇게 살아보자 이런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목사가 아량을 베풀지 못한 점’도 있고. ‘교인들이 내가 어떻게 저 일을 해’ 하는 두 가지 점이 있다고 봅니다. 이 두 가지의 간격을 넘어서는 일은 얼마나 솔직하게 진실 되게 성서 말씀과 부딪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그것은 단순한 간증이 아니고 그것은 충분한 설교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보통 설교하면 입으로 하지만 불교의 화엄경에는 信解行證(신해행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신해행증 마지막 단계에서 증이 설교에요. 신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누구냐 자기 존재에 대한 깨침입니다. “내 안에 불성이 있다” 불교는 바로 그걸 믿는 것이에요. 그게 신입니다. 하지만 그걸 믿기만 하는 게 아니라 도대체 그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걸 끊임없이 이해하는 단계 해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해 다음에 내가 그런 존재구나 그에 맞게 행동을 하는 것이죠. 또한 행동을 한 후에 자기가 증언을 하는 것, 그게 증이에요.

불교에서는 보시 중에 가장 큰 보시가 법보시가 중요하는가 하면 믿고 이해하고 살고 그리고 나서 말하는 게 보시거든요. 목사들은 기계적이고 직업적이고 정직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이 점에서는 평신도들이 성서 말씀과 더불어 부딪히면서 자기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고민들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들을 신앙 간증이다, 주관적이다, 폄하하지 말고 그런 이야기들을 삶의 통한 진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설교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목사의 일방적인 이야기보다, 물론 목사님들도 당연히 설교를 해야 하죠, 설교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기회를 주자, 그리고 평신도들이 이런 설교를 하려고 한다 하면 목사님들이 얼마든지 조언을 할 수 있다, 또 목사도 평신도들과 더불어 내가 주일날 이런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얼마든지 같이 나누자는 것입니다.

탈-성직을 지향하는 작은교회, 책과 함께 하는 생명평화마당 작은교회 아카데미 2학기는 11월25일(월)-27일(수)까지 강촌 요한 피정의 집에서 진행된다. 참여를 원하는 분들은 먼저 다음 인터넷 주소에 접근해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

http://bit.ly/작은교회아카데미

신청서 작성과 함께 참가비를 입금하고 작은교회 아카데미 사무국 02-6080-6219로 연락하면 된다. 참가비는 10만원이며 국민은행 702301-00-007759(예금주: 생명평화마당)으로 입금하면 된다(입금 시, 참가자 본인 성명으로 송금 요망).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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