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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들에게 지위와 역할의 높고 낮음은 없습니다이정배 교수, 2기 작은교회 아카데미를 말하다 (2)
이정훈 | 승인 2019.10.25 14:26

탈성직으로 교회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위상 변화와 맞물리기 마련이다. 전통적인 교회 형태에서 목회자는 군주에 가깝다. 최고 의사 결정권을 가진다는 뜻이다.

수행자로서의 성직자와 평신도

이정배 교수는 목회자의 위상변화를 수행자로 표현한다. 동서양 종교를 막론하고 성직자들은 철저하게 수행자라고 강조한다. 특히 서양 종교로 대표되는 기독교가 억압하고 배제해 버린 수행자 전통을 살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수행자 전통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과의 합일을 꿈꾸는 기독교 신비주의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특히 이 교수는 초대 몬타니즘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초대 기독교에서 “몬타니즘”이 이단으로 판명하는 것이 참 억울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임박하게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고 교회라는 제도가 생기고 성직자들이 생기니까, 그것에 반발해서 새로운 성령운동을 했잖아요. 그 새로운 성령 운동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억압하고 탄압하고 제도권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절대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구도가 계속되어 왔잖아요.”

또한 이 교수는 이러한 제도적 권위를 뒷받침하는 전통을 성서해석 전통에서도 찾았다. 즉 창세기 1-3장을 해석하는 두 흐름을 지적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의 원복 해석 전통과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된 원죄 해석 전통이라는 것이다.

▲ 제도적 교회를 뒷받침 하는 원죄 해석 전통에서 벗어나 원복 해석 전통으로 복귀를 주장하는 이정배 교수 ⓒ이정훈

이 두 해석의 차이를 이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원죄 전통은 제도적 교회를 필요하거든요. 성직이라고 하는 교권을 필요로 하고, 기독론이라고 하는 구세주 개념을 가져와요. 교회 안에서 제도적인 은총을 강화시키는 구도를 사용합니다. 원복은 인간이 하나님과 끊임없이 스스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성직보다는 성령에, 기독론 보다는 성령론적인 사고를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작은 향 하나가 다 탈 때까지

그렇다면 이 교수가 그리고 있는 수행자로서의 성직자는 어떤 모습일까. 일상에서 어떻게 수행의 모습을 갖출 수 있을까. 이 교수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개신교가 루터 이래로 가톨릭의 수도자 개념을 다 버리지 않았습니까. 작은 향 하나가 타는데 20분 정도 걸려요. 저는 수행이라고 하면 하루에 향이 하나 다 탈만큼 자신의 입을 닫고 귀를 여는 시간들을 매일 가져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럼 우리 시대에 자기 입을 닫고 두 귀를 열어서 무슨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세상의 탄식 소리를 듣는 것이죠. 성령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시간들, 그런 침묵의 묵상이 끝나면 관조하는 단계가 됩니다. 그것이 끝나면 하나가 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죠.”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 그 속에서 휴일까지 반납하고 교회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기독교. 이런 기독교인에게 수행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그런 기독교인들이 하루에 작은 향 하나가 다 타는데 소요되는 20분 정도를 입을 닫고 귀를 여는 수행자의 모습은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꼭 목회자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실천해봄직한 수행방법이 아닐까 한다.

체제 밖의 소리를 듣는 기독교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탈성직을 통해 이루어질 교회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사명으로 인식하는 사명인 하나님 나라 선포를 이 교수는 체제 밖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밀려나고 배제 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 체제 밖의 이야기를 듣고 이 체제를 바꾸는 일에 있어서 교회가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생태, 경제 등등 체제 문제에 대해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세상을 가지고 어떻게 이 체제에 맞서는 하나의 역할을 교회가 할 수 있고 그런 교육들을 해낼 수 있겠는가를 고민해 보는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잘 해낼 수 있는 종교가 기독교라고 힘을 주어 이야기한다. 체제 밖의 이야기라는 오늘날의 용어를 걷어내면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사회적 약자”를 돌보라고 하셨던 성서의 울림이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은 이정배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그렇다면 목회자의 위상은 어떤 것이냐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올 것 같습니다.

이 질문 이전에 더 근원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동서양 종교의 형태가 서로 다르게 발전해 왔어요. 서양은 제도적인 은총 조직 속에서 제도적인 은총의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동양 종교는 수행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양 종교 안에는 수행자라고 하는 의미가 없어요. 제도 속에서만 일정 교육을 받고 제도로 살면 그걸로 성직자가 되고 그것이 자신이 되어버립니다. 동양에서는 유고든 불교든 힌두교든 간에 동양 종교의 특징은 성직자들은 철저하게 수행자들입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이제 종교 없어도 된다, 영성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데, 과연 믿기만 하면 된다, 수행 없이도 종교가 가능한가, 수행 없는 성직자들의 삶이 가능한가 하는 점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수행의 개념을 성직자들이 놓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 있어 이제는 기독교가 수행의 측면을 영성의 시대에 굉장히 많이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세 가지 흐름이 있어요. 하나는 아날로기 엔티스를 말하는 자연신학 전통인 가톨릭, 그걸 반대에서 말하는 아날로그 피데이 신앙의 유비를 말하는 개신교, 이 두 전통에서 계속해서 버림을 당하고 홀대 당했던 신비주의 전통입니다. 가톨릭의 자연신학은 정말 제도화 되었고, 개신교의 신앙의 유비는 주관적인 믿음 전통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반해 신비주의 전통은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전통입니다. 초기 교부들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건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말을 할 정도로 성육신의 개념을 그렇게 이해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전통이 이어지지 않았잖아요.

하지만 기독교가 동양 전통으로부터 자극을 받은 억압당하고 부정당하고 홀대 당해온 신비주의 전통,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인 소통, 이런 흐름을 다시 찾아낸다면 제도적인 은총으로부터 조금 자유롭게 수행 전통과 만날 수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는 성직자니 평신도니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전통을 영성의 시대에 다시 한 번 되살려 보자 하는 것이 제가 가지고 있는 탈성직이라는 문제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인 틀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는 이런 제도적인 은총을 합리화 하려고 개인과 신과의 관계를 다 부정해버렸습니다. 초대 기독교에서 “몬타니즘”이 이단으로 판명하는 것이 참 억울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임박하게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고 교회라는 제도가 생기고 성직자들이 생기니까, 그것에 반발해서 새로운 성령운동을 했잖아요. 그 새로운 성령 운동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억압하고 탄압하고 제도권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절대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구도가 계속되어 왔잖아요.

이것을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원죄 전통과 원복 전통입니다. 초대 교부들은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를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살 수 있는지를 노래했다고 하면서 원복 텍스트로 봤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텍스트를 어거스틴이 원죄의 텍스트로 바꾼 것이죠. 그래서 원복의 텍스트냐, 원죄 텍스트냐 근본적인 물음을 다시 해야 합니다.

이 원죄 전통은 제도적 교회를 필요하거든요. 성직이라고 하는 교권을 필요로 하고, 기독론이라고 하는 구세주 개념을 가져와요. 교회 안에서 제도적인 은총을 강화시키는 구도를 사용합니다. 원복은 인간이 하나님과 끊임없이 스스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성직보다는 성령에, 기독론 보다는 성령론적인 사고를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원죄의 기본 맥락을 버릴 수는 없지만 원죄보다 더 근본은 원복입니다. 그런 전통을 회복하고 원복의 흐름에서 새로운 기독교의 영성의 시대에 만들어 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신학적인 기본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 이정배 교수는 교회의 사명인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체제 밖의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정훈

▲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기독교 수행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개신교가 루터 이래로 가톨릭의 수도자 개념을 다 버리지 않았습니까. 작은 향 하나가 타는데 20분 정도 걸려요. 저는 수행이라고 하면 하루에 향이 하나 다 탈만큼 자신의 입을 닫고 귀를 여는 시간들을 매일 가져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기도에서 통성으로 기도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밖에 모르지만, 전통적인 기도법에서 소리 내어 기도하는 다음 단계는 침묵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자기 입을 닫고 귀를 여는 것입니다. ‘주십시오!’ 이야기 할 때는 자기가 가장 불행하고 아프고 그런 것 같지만, 성서는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니 그를 대신에서 성령이 탄식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럼 우리 시대에 자기 입을 닫고 두 귀를 열어서 무슨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세상의 탄식 소리를 듣는 것이죠. 성령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시간들, 그런 침묵의 묵상이 끝나면 관조하는 단계가 됩니다. 그것이 끝나면 하나가 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죠.

결국 꼭 동양의 방식을 따르지 않더라도 기독교적 특성을 가지면서 나와 하나님과 하나 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표피적인 부르짖는 단계에서 끝나버리고 자기주장만 하고, 저는 이것은 종교인 혹은 성직자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불교도 법당 안에서 ‘주십시오!’ 하는 것도 있지만, 저기 방에 들어가서 혼자 명상하는 불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독교는 37만원짜리 땅을 가지고 기도했더니 370만원이 되었더라 하고 할렐루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향이 하나 탈 정도의 시간만이라도 입을 닫고 귀로 듣고 그 소리를 이야기하는 전통을 되살려야죠. 사실 목사들이 교인들로부터 기도 부탁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어요. 그런데 정말 목사들이 그렇게 기도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정직하지 않다고 봐요. 정말 중보기도 하려면 입을 닫고 귀를 열려고 노력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 결국 탈성직이라는 문구 안에 수행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보면 모두가 똑같은 사람일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계시네요.

그렇죠, 똑같은 사람입니다. 평신도들은 설교 하려면 얼마나 떨고 두려워하면서 준비합니까. 그런데 목회자들은 아무 떨림과 두려움이 없잖아요. 이런 모습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누가 더 성직자냐는 것이죠. 그래서 제도적인 은총에만 의존하지 말자는 것이죠. 목사들도 일을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차원을 이해하면, 적어도 하루의 몇 십분이라도 끊임없이 축적된 삶을 살아내는 것이 성직자의 삶이죠. 일반 사람들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성직자들이 그나마도 못한다고 한다면 성직자일 수 없지 않을까요.

▲ 지난 아카데미에 비해 책들이 많이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네, 작년에는 많이 무거웠죠.(웃음)

▲ 이번 아카데미에 함께 나눌 책을 선정하실 때 기준은 어떤 것들이었나요?

탈성직이라는 화두를 놓고 보았을 때 탈성직은 역할의 문제이고, 목사의 과도한 권위를 내려놓고 평신도들이 갖고 있는 수동성을 올린다는 맥락으로 봤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마이스터 에카르트”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는 눈으로 내가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과 인간의 하나됨을 이야기한 얼마나 멋진 신비주의 철학입니까. 요즘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에카르트를 종교철학적으로 많이 활용합니다. 

두 번째는 그러면 이제 평신도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점을 생각해 봐야죠. 존 캅이 썼던 “평신도 신학”이라는 책은 과정신학적으로 평신도와 목회자의 간격을 상당히 많이 해설을 해놨어요. 과정신학적으로 평신도를 이해하고 목회를 이해하는 그런 책입니다.

그리고 좀 무게 있는 책이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를 쓰고 난 다음에 출판한 “자기만의 신”이라는 책입니다. 묵직한 책인데, 이 책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설명하면서 중세의 객관주의 교회에서의 탈피에 큰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개인을 제도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루터는 그 개인을 다시 성서에다가 묶어 놓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서에 다시 묶어놓은 루터 종교개혁의 한계를 지적하고 우리 안에서 울리는 하나님 소리를 찾아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나? 나치 수용소에서 한 여자아이가 경험한 그 경험을 가지고서 성서 안에만 묶어 놓은 신앙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믿음의 양태를 말해주려는 것들이 있어서 그 책을 선정헀습니다.

또 하나는 한국적으로 씨알 사상. 씨알은 그 작은 것이 스스로 흙을 뚫고 나오잖아요.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함’이라는 것이 씨알의 본질이잖아요. 함석헌의 씨알, 안병무의 민중, 다 개념이잖아요. 이런 씨알사상을 중심으로 우리 모두가 부분이며 전체이다, 움츠려들면 개인이고 확대되면 전체가 된다는 씨알사상을 근거로 해서 스스로 얼마든지 자기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주체를 뒷받침하는 책으로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4권의 책을 텍스트로 삼았습니다.

▲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보고 보니 마치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주체 논쟁이 생각나기도 하고 재주체화가 많이 느껴집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재주체화 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체의 죽음을 말하는 시대에 재주체화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탈’을 말하면 ‘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탈만 말하면 역사성을 담보할 수 없어요. 탈 이론을 가지고 기존의 것을 비판하는 데는 참 좋은데 ‘탈’ 하고 나면 지금 여기 역사성이라고 하는 문제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 하는 문제가 제기 되기 됩니다. 저는 탈의 이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완전한 해체보다는 ‘향’이라는 차원에서 다시 형태들을 재구성하는 차원에서 있어야 역사적인 현실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완전한 해체로는 가고 싶지 않다, 기독교의 재주체화라는 말을 즐겨 쓰는 편입니다.

▲ 작년 인터뷰에서는 1년에 두 번 정도, 전체적으로는 3년 과정을 기획하셨는데 내년에는 어떤 계획이신지요.

내년에는 “탈성별”과 함께 “동성애” 이야기도 다룰 예정입니다. 탈성별이라는 것을 여남 뿐 아니라 제3의 성까지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Sex, 즉 성이라는 것이 Male과 Female로만 나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 것들을 다루면서 고전이나 현대 책들을 다루면서 여성학, 페미니즘 책들을 보려고 합니다. 마지막 학기는 3개의 탈, “탈성장·탈성직·탈성직”을 이야기했으니 이를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성서적인 배경들을 가지고 마지막 4번째 학기를 다루려고 합니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런 과정들을 다 거치고 나면 “교회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상을 제시하신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일단 그 전에 이렇게 2박 3일을 외딴 곳에서 하니까 좋은 것도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오지 못하는 문제가 있더군요. 일단 4학기까지 마치던지 아니면 3학기부터라도 도심에서 2일 3일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토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까지는 한적한 곳에서 진행해보고 참여율이 보면서 형태를 좀 바꿔볼 생각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런 걸 하면 교회가 어떻게 될까, 글쎄요. 제가 이런 것을 하는 이유는 교회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인데, 일단 쉽게 말하면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리고 세상과 달라야 하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곳인데 하나님 나라는 이 체제 밖의 이야기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나 이 체제 안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이야기만 하거나 체제를 완전히 떠나는 내세의 이야기만 했습니다. 체제 밖의 이야기라는 것은 이 체제를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교회는 그 체제 밖의 이야기를 듣고 이 체제를 바꾸는 일에 있어서 교회가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생태, 경제 등등 체제 문제에 대해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세상을 가지고 어떻게 이 체제에 맞서는 하나의 역할을 교회가 할 수 있고 그런 교육들을 해낼 수 있겠는가를 고민해 보는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면, “힌두교”만큼 이 세계의 궁극성을 말하는 종교가 없어요. 아무리 못 살고 힘든 삶을 살아도 “아트만”이라는 개념으로 이 세계의 궁극성을 말해요.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불교에요. 이 세계의 실체는 없다, 모든 것은 관계로만 있다고 하죠. A라는 실체는 없어, B라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있는 것이야, 불교의 연기설 아닙니까.

이 궁극성과 관계성은 기독교로 말하면 원복의 상태에요. 기독교가 이 두 개를 부정하지 않아. 그런데 이걸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는 이 세계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종교에요. 신마저도 죽을 수밖에 없는 공간이 이 세상으로 봐요. 원복 상태의 궁극성과 관계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이 망가진 현실이 지금 역사성이고 부정성이죠. 지금 식으로 말하면 기울어진 운동장이죠, 이 현실을 잘 고치기 위해서라도 궁극성과 관계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이 궁극성과 관계성이 하나님 나라에요. 부정된 현실 속에서 기능하도록 그 역할을 다른 종교들보다는 기독교가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요. 그 일선에 있는 것이 교회라는 것이죠. 교회는 궁극성과 관계성의 세상이 될 수 있도록 기울어진 세상 속에서 그 흐름을 바꿔 살아내는 존재로 살아가는 교회가 되었으면 해요. 그래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방식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죠.

탈-성직을 지향하는 작은교회, 책과 함께 하는 생명평화마당 작은교회 아카데미 2학기는 11월25일(월)-27일(수)까지 강촌 요한 피정의 집에서 진행된다. 참여를 원하는 분들은 먼저 다음 인터넷 주소에 접근해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

http://bit.ly/작은교회아카데미

신청서 작성과 함께 참가비를 입금하고 작은교회 아카데미 사무국 02-6080-6219로 연락하면 된다. 참가비는 10만원이며 국민은행 702301-00-007759(예금주: 생명평화마당)으로 입금하면 된다(입금 시, 참가자 본인 성명으로 송금 요망).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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