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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의 상관성 (2)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19.10.26 18:17

2장은 정확히 하나님의 지식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칼빈에 의하면, 경건입니다. 이 경건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필수조건이라고 말합니다. 칼빈은 경건, pietas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아는 데서 생기는 사랑이 결합되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우리가 ‘헌사’에서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집필한 의도를 확인한바 있습니다. 신앙이 열심인 사람들에게 참된 경건을 진척시켜주려고 『기독교강요』를 집필했다고 말했습니다.(헌사, 41)

1절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바로 말해서 종교 혹은 경건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우선 ‘종교’(religion)라는 용어를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칼빈에 의하면 종교는 “하나님 관한 진지한 두려움, 즉 자발적 경외와 율법에 규정된 참예배를 수반하는 신앙”(I.ii.2)입니다. 이렇게 종교라는 말이 언급될 때마다, 종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율법이 규정하는 대로 참된 예배를 수반하는 믿음이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빈은 이 종교, 경건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칼빈은 이제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지식을 말하려고 합니다. 첫째,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이것은 제1권에서 다룰 핵심 내용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속주로서 보여주셨는데, 이것은 제2권 이하의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칼빈은 “하나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시고, 그 분 밖에서는 아무것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 한, 단순히 하나님을 경외와 찬양의 대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으로 양육을 받고 있다는 것, 자기가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결단코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기 때문”(I.ii.1)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렇게 그분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은 감사의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 그리스도인의 한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싸웠던 야곱의 씨름일 것이다. ⓒGetty Image

그래서 칼빈에 의하면 단순히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그 자체로 독자적으로 어떤 분이신가?(Quid sit Deus)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다만 헛된 사변으로 장난􏰀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이런 질문은 옛 철학자들이, 예컨대 에피큐로스 학파 사람들이 논했던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입니다. 우리의 삶과 무관한, 신들의 세계에서 홀로 고고하고 고상하게 그런 삶을 즐기는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하여 칼빈은 하나님은 어떤 속성을 갖고 계신 분이신가(Qualis sit Deus), 다시 말하면 우리를 향하시는 그 분은 누구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구체적인 물음을 던지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칼빈에 의하면, 바로 이러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를 믿는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I.ii.2). 이것은 칼빈의 신인식론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대로, 계시하시는 대로 믿는 것, 바로 이것이 칼빈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입니다. 또한 이것이 20세기 칼빈의 해석자로 유명한 칼 바르트의 신인식론, 신학방법론의 핵심원리가 됩니다. 칼빈은 뒤에서 힐라리를 인용하면서 다시 이것을 확인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기꺼이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자. 왜냐하면 힐라리가 말한 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한 유일한 충분한 증거이시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떠나 다른 곳에서 그를 찾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 자신께 맡기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하겠다.(I.xiii.21)

그러나 우리는 칼빈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대해 말할 때, 자연적 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연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다른 가능성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신학적 입장입니다. 예컨대, 자연신학은 자연, 역사, 이성 등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한 바와 같이 칼빈은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인식할 때, 다음과 같은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만물이 그의 지배하에 있음을 알고, 그가 만물의 안내자요 보호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창시자이심을 알고 있기 때 문에, 고통스러울 때나 궁핍할 때에는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의 보호를 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알고 있으므로, 그를 완전히 신뢰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재난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주요 아버지로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일 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위엄을 경외하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힘쓰며, 또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I.ii.2).

바로 이것이 올바른 질문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대답의 요점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분으로 자신을 알려주셨습니다. 칼빈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아는 곳에 순수하고 참된 종교가 있다고 말합니다. 칼빈은 그의 첫 번째 『신앙문답서』 (1537)에서 경건을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정의합니다. “참 경건이란 하나님을 주님으로 존경하는 만큼 아버지로서 사랑하며, 그의 의를 수용하고 죽을지언정 그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순수하고 참된 열심에 있다. 이러한 열심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몰염치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날조하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하되 하나님이 자기를 그들에게 제시하시고 선포하신 대로만 이해한다.”(1)

그러므로 경건에 대해 칼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경건은 “사랑과 결합된 존경”입니다. 경건은 때때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와 동일시됩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그를 주로서 경외하고 존경하는” “진실한 감정”입니다. 경건은 참된 종교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기원이며 원인이 됩니다. 경건은 하나님과 혼란스러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한 공허하고 헛된 사변의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칼빈이 말하는 경건은 “경건주의”로 알려진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의혹을 갖고 있기 때문에, 칼빈의 경건은 신비적인 내면성이나 또는 교회와 세상에서 분리된 사적인 헌신적인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빈이 말하는 경건은 가족과 이웃, 교육과 문화, 사업과 정치의 매일 매일의 삶의 모든 관심사들을 포괄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영성에 대한 현대의 이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동적인 개념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교제의 삶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명백하게 그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감사하는 예배의 삶이기 때문입니다.(2)

미주

(미주 1) 존 칼빈, 이형기 옮김, 『칼빈의 신앙교육서』(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16.
(미주 2) I. John Hesselink, Caivin’s First Catechism, A Commentary(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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