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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자본주의를 옹호할 수 없다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 (25)
강원돈 교수(한신대 신학부/사회윤리와 민중신학) | 승인 2019.10.28 16:49

참여, 생태계 보전, 정의, 인간의 존엄성 존중 등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의 네 가지 원칙들에 바탕을 두고서 교회는 자본주의를 옹호할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해야 한다. 교회의 반자본주의 선언은 개신교가 자본주의와 친화성을 갖는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고 날로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점점 더 절실해져 가고 있다.

개신교가 자본주의에 친화성을 갖는다는 주장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상관관계를 사회학적으로 규명한 막스 베버 이래로 마치 학문적 근거를 갖는 의견인 것처럼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미국에서 발전한 번영신학은 아예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물질적 풍요와 번영을 신학적으로 축성하기까지 한다. 한국 개신교는 선교적 개신교, 전쟁 개신교, 친미반공 개신교, 성장주의 개신교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반대 개념으로서 자본주의를 맹목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하게 옹호해 왔다.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를 위시해서 세계 여러 나라의 개신교가 자본주의에 친화적인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개신교 교회들의 주장은 성서적 근거는 말할 것도 없고, 신학적 논리조차 어설프기 짝이 없다. 교회가 성서의 가르침과 신학적 논리에 충실하다면 자본주의를 결코 옹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연재와 그 다음에 이어질 두 차례의 연재에서 필자는 교회가 자본주의를 옹호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상관성을 논한 막스 베버의 주장을 논박할 것이다. 둘째, 개신교의 자본주의 친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거는 번영신학 담론을 분석하여 그 담론의 천박성과 무모성을 드러낼 것이다. 끝으로, 한국 개신교가 자본주의를 교조적으로 옹호하는 까닭을 분석하고, 그 극복방안을 모색한다.

막스 베버에게 ‘자본주의 정신’이 갖는 의미

막스 베버에게 자본주의는 경제적 잉여를 축적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수행하는 경제활동을 가리켰다. 이러한 경제활동은 근대 이전에는 없었다. 근대 이전의 경제활동은 자급자족에 머물렀고, 경제활동을 통하여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는 기본 욕망과 안전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소비되었다. 근대 이전의 봉건사회에서 경제활동의 산물은 생산자 가족의 기본욕망 충족을 위한 몫과 정치군사적 보호자인 영주를 위한 몫으로 배분되었다. 이를 초과하는 경제적 잉여를 생산하기 위해 노동을 더 많이 하고, 그 잉여를 저축한다는 것은 근대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낯선 생각이었다.

막스 베버는 바로 이 낯선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경제적 잉여를 더 많이 축적하기 위해 경제활동을 합리적으로 통제하는 자본주의적 영리 활동이 정착하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경제적 잉여는 비용을 줄이고 효과를 늘리는 합리적 계산의 산물이고, 근면과 절제의 피조물이다. 합리적 선택과 근면과 절제가 어우러져서 경제적 잉여를 생산하고자 하는 태세가 확립되는 곳에 ‘자본주의 정신’이 탄생한다. 따라서 경제적 잉여는 ‘자본주의 정신’의 구현체이다. 경제적 잉여는 기업의 저축으로 바뀌고, 기업의 저축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투자로 이어진다. 따라서 경제적 잉여를 창출하는 자본주의는 경제활동을 확대재생산하는 동력을 자기 안에 장착하고 있는 체제이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막스 베버가 보기에, 역사적으로 가장 생산적이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물적 기반을 가장 효율적으로 확보하는 경제체제이다.

▲ 막스 베버는 기독교와 자본주의와의 관계를 재조명해 큰 성과를 이룩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해석이 정당한지는 분명히 짚어보아야 할 지점이다. ⓒGetty Image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기에 막스 베버는 독일의 미래가 자본주의의 발전에 달려 있다고 보았고, 시민계급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베버는 자유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정당에 소속되어 있었고, 독일 시민계급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 당대 독일에서 가장 큰 정치적 과제라고 믿었다. 그는 시민계급이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봉건적 지주-소작 관계를 고집하는 대토지소유자 세력(융커 세력)에 대항해서 헤게모니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베버는 융커 세력이 자본주의 발전에 족쇄를 채우고 독일의 미래를 가로막는다고 강력하게 비판했고, 자본주의를 지배와 착취의 체제로 규정하고 이를 해체할 것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그 이론적 지주인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을 무력화하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를 저축을 위한 경제활동으로 성격화하고, 그러한 경제활동의 동력이 합리성과 근면과 절제를 바탕으로 한 에토스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 것은 단순한 학술적 견해가 아니다. 그것은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전제하고 있는 하나의 주장이다.

막스 베버의 질문: ‘자본주의 정신’은 어떻게 근대 서구에서 태동하였는가?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태동한 적이 없고 오직 근대 서구에서 탄생하였다고 주장하고, 왜 근대 서구에서 ‘자본주의 정신’이 탄생하였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인간의 행위가 의미에 이끌린다고 보는 학문적 관점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베버는 자본주의의 태동에 대해 묻지 않고 경제활동을 하는 주체에게 ‘자본주의 정신’이 어떻게 해서 태동하였는가를 물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 독특한 방식의 질문을 ‘막스 베버의 질문’이라고 지칭하고 싶다.

베버는 박물학자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세상의 문물에 대한 지식들과 정보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였고, 이를 소화하여 자신의 저작에 능숙하게 반영하였다. 따라서 ‘자본주의 정신’이 중국이나 인도, 팔레스틴을 위시한 근동 지역, 아프리카, 인디언 문화권 등지에서 관찰되지 않고 유독 근대 서구에서만 발생하였다는 베버의 주장이 아무 근거가 없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베버는 중국 광동 지역의 상인들이 엄청난 이익을 거두는 상술을 터득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그 상술이 ‘자본주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 이익이 개인이나 가문의 향락이나 상업적 투기로 이어지기 십상이고, 기업의 저축이 되어 투자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여기서 베버가 접한 세계 여러 지역들에 관한 지식들과 정보들이 서구인들에 의해 기록된 문헌들을 통하여 전달되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그 지식들과 정보들은 서구인들의 관점과 가치판단에 ‘오염’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정신’이 어째서 근대 서구에서만 탄생하였는가 하는 ‘막스 베버의 질문’은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힌 질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1)

베버는 경제적 잉여를 생산하기 위한 경제활동을 이끄는 의미체계를 ‘자본주의적 정신’이라고 정의했고, 이러한 ‘자본주의적 정신’은 유독 근대 서구에서, 그것도 칼빈주의적 개신교가 정착하고 발전한 지역에서 태동하였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 주장의 논거를 밝히는 것이 베버의 학문적 과제가 되었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베버는 역사적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본주의 정신’과 ‘칼빈주의적 개신교’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작업이다. 베버는 역사적 인과관계를 자연과학적 인과관계와 구별하였고, 역사적 인과관계는 이념형(Idealtypus) 수준에서 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념형은 실제 사물이나 사건의 개별적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관념적 구성물이다. 무수한 지식들과 정보들을 특정한 관점에서 분류하여 얻어낸 이념형들도 특정한 관점에서 구성된 관념들이고, 그런 점에서 이념형은 추상적 범주의 성격을 띤다. 베버가 말하는 ‘자본주의 정신’도 일종의 이념형이다. 그것은 자급자족 경제, 봉건적 경제, 상업적-투기적 경제, 공산주의적 경제 등과 구별되는 경제활동을 이끌어가는 의미체계의 한 유형이다.

근대 서구에서 ‘자본주의 정신’은 경제적 잉여를 창출하는 경제활동을 이끌어가는 원리이고, 그것은 비용 대 효과, 투입 대 결산의 합리적 계산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근면하게 일을 하여 얻은 소득을 절약해서 저축할 수 있는 절제의 능력을 전제했다. ‘자본주의 정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근면과 절제의 능력을 발휘하는 에토스가 미리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가진 것을 남김없이 소비하며 즐기는 향락적 에토스나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영적인 순수성을 금욕적으로 추구하는 수도원적 에토스와 유형적으로 구별되는 에토스여야 한다. 베버는 향락적 에토스나 수도원적 에토스와 이념형적으로 구별되는 세계 내적 금욕의 에토스를 상정했다. 그 에토스는 근면하게 일해서 얻은 소득을 쾌락을 위해 탕진하지 않고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소득의 일부만을 지출하고 나머지를 저축하는 절제의 에토스이다. 근면과 절제를 결합하는 에토스는 세계 내적 금욕을 실천하는 에토스이고, 오직 그 에토스만이 ‘자본주의 정신’에 부합한다. 베버는 세계 내적 금욕을 실천하는 에토스가 개신교에서, 그것도 특히 칼빈주의적 개신교에서 발전하였다고 생각했고, 그 에토스를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명명했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의미체계와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의미체계가 높은 인과적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베버의 오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이념형 수준에서 구성하고, 이 두 가지 관념적 구성물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설명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적 정신’과 같은 관념적 추상에서 싹텄다고 주장하고 그 ‘자본주의 정신’을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의해 미화하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이다. 자본주의가 자본의 본원적 축적 과정을 거쳐서 노동에 대한 지배와 착취의 체제로 자리를 잡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분석을 생략하고,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행위자에게서 결합되는 정신적 과정이 자본주의 태동의 핵심인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 인과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왜곡이다. 화폐지대의 확산, 매점매석과 고리대, 선대제의 틀에서 이루어진 노동 수탈, 엔클로우저 운동, 농민의 유민화, 도시 슬럼의 형성, 구빈법의 틀에서 자행된 가혹한 노동 규율 등등을 거론하지 않고 ‘모든 구멍들에서 피와 고름을 뿜어내는’(K. Marx) 자본주의라는 괴물의 탄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 다음에 지적해야 할 것은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세계 내 금욕의 윤리로 축소시키고 나서, 이 세계 내 금욕의 윤리를 도출하기 위해 칼빈의 신학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베버는 세계 내 금욕의 에토스가 예정론의 효과라고 분석했다. 칼빈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구원을 받을 사람들과 버림을 받을 사람들을 예정하였다고 가르쳤다.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버림을 받기로 예정되었는지 아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신도들은 자신이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었는지, 버림을 받도록 예정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 무지의 상태는 신도들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하고 깊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교회의 훈계를 열심히 따른다고 해도 그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연옥과 지옥이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로 표상되었던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의 결여가 가져다주는 것은 끝 갈 데 없는 불안이었다. 이 불안은 해소되어야 했다.

베버는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근대 초기의 개신교인들이 물질적 성공과 경제적 번영에 기댔다고 주장했다. 물질적 성공과 경제적 번영은 하나님이 그 성공을 거둔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하나님이 끝내 버릴 리 없다는 확신을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물질적 성공을 임마누엘의 증거로 간주하고, 그 증거를 갖고서 예정의 확신을 얻고자 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근대 초기에 경제적 성공은 의식주의 자주적 해결과 저축을 의미했다. 그것은 오직 근면하게 일하고 절제 있게 생활함으로써 얻는 성과라고 여겨졌다. 베버는 예정론의 효과 아래서 임마누엘의 증거를 강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개신교인들이 결국 근면과 절제의 에토스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 세계 내적 금욕의 에토스가 ‘자본주의 정신’을 촉진시켰다고 분석했다. 개신교인들에게 현저하게 나타나는 세계 내적 금욕의 에토스가 예정론의 효과라는 베버의 분석은 예정론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베버는 엄격한 칼빈교도였던 어머니를 통하여 통속적 예정론의 효과와 칼빈교도 특유의 에토스를 숙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칼빈의 예정론으로부터 세계 내적 금욕의 에토스를 도출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칼빈의 예정론은 은혜론의 틀에서 기획되었다. 예정론의 근본 취지는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은 사람이 세상에서 유혹과 시련을 받아 실족하고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인내하라는 목회적 권면에 있다. 그 핵심은 영원 전부터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이 세상에서 유혹과 시련을 받는다고 해서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이 예정론의 근본적인 가르침이 칼빈주의 교회의 교역자들이나 신도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예정론이 불안과 강박을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교리로 여겨졌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은혜의 교리를 불안과 강박의 교리로 왜곡시키는 것은 신학적 무지의 소산이다.

물질적 성공과 경제적 번영을 임마누엘의 증거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은 칼빈에게서는 전혀 낯선 관념이다. 칼빈에게서 임마누엘은 성령의 인도를 뜻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은 사람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물질적 성공과 경제적 번영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의 필요조건도 아니고 충분조건도 아니다. 물질적 성공과 경제적 번영을 임마누엘의 증거로 삼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증거를 갖고서 예정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속설이 신학적 근거를 갖지 못하고, 그런 식의 억지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도 전혀 없다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없다.

맺음말

칼빈주의적 개신교가 자본주의 정신을 태동시키고 자본주의 발전을 이끌어왔다는 베버의 주장은 속설일 뿐 엄격한 학문적 견해라고 보기 어렵다. 리처드 헨리 토니(Richard Henry Tawney)가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한 이래로 ‘막스 베버의 질문’ 자체가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다. 토니는 자본주의가 잉여의 축적을 위하여 자본가와 임노동자의 관계에 바탕을 둔 경제활동을 가리킨다고 정의하고 나서 그러한 자본주의는 종교개혁 이전에 이탈리아 북부,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의 가톨릭 지역에서 널리 관찰된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이끌어간 ‘자본주의 정신’이 따로 있고, 그 정신이 프로테스탄트의 에토스를 품고 있다는 속설은 미국 동북부의 청교도 식민지역에서 발전한 이른바 청교도 자본주의 때문에 더 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버도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상관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례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경제활동을 들었다. 그러나 베버의 예증은 별 설득력이 없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뉴잉글랜드에서 청교도 공화국과 청교도 윤리에 따라 규율된 자본주의적 경영이 성립되었다는 주장은 미합중국 건국 신화의 내용일 뿐 실제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 모리스 버먼(Morris Berman)은 『미국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저작에서 청교도들이 정착한 지역에서는 애초부터 공화주의는커녕 공공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맹목적인 사익을 추구하는 태도(hustling)가 지배했다고 지적한다. 낸시 아이젠버그(Nancy Isenberg)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아이젠버그는 『알려지지 않은 미국 400년 계급사』라는 방대한 저술에서 미국의 역사가 초기부터 지금까지 착취와 배제로 점철되어 왔고, 착취당하고 배제당하는 무수한 쓰레기 인간들을 양산하였다고 분석한다. 그 쓰레기 인간들은 유색인종들만이 아니라 미국의 주류 인종인 수많은 백인들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베버가 이러한 최근 연구 성과들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뉴잉글랜드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체화한 ‘자본주의 정신’에 따라 탄생하고 발전하였다고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본의 노동 포섭에 근거한 자본주의는 근면, 성실, 절제 같은 프로테스탄트 덕목들을 계급 지배와 착취의 도구로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오늘의 사회와 세계에서 공고하게 자리를 잡은 자본주의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감성을 속속들이 지배하고 조작할 힘을 갖추었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덕목들 따위는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함양했다는 속설에 취하여 교회가 자본주의를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짓일 것이다.

미주

(미주 1) 만일 이러한 질문이 객관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근대 서구에서 탄생한 자본주의는 ‘더 (the) 자본주의’가 되고, 세계 여러 지역에서 발전한 자본주의들은 서구 자본주의를 모범으로 한 파생 자본주의들의 위상을 갖게 될 것이다. 경제적 잉여를 생산하기 위한 경제활동으로서의 자본주의가 다양한 문맥에서 각기 다른 조건들 아래서 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무수한 실례들은 ‘막스 베버의 질문’이 부질없다는 것을 웅변한다.

강원돈 교수(한신대 신학부/사회윤리와 민중신학)  wdkang55@h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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