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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이 속과 같아지고, 속이 겉과 같아질 때하나님 나라의 대헌장 (7)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19.10.30 02:03

문: 그렇다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어떻게 예수께서는 하찮은 인물들인 그의 제자들에게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었을까? 먼저는 땅의 소금이라 하고 이제는 세상의 빛이라고까지 하시는 것은 너무 거창하지 않는가?

답: 거창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세상적인 정신적 명예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빛이라고 하지 않고 세상에 늘 있는 그 빛이라고 한다. 이것은 순수하게 인간적인 위대함이나 왜소함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세상의 빛은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자들은 인간적으로 보아서 비천하고 하잖은 사람들인지 모르나 그들이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는 위대한 것이다. 그들이 인간적으로 보아서 작고 하찮다는 것이 더 나은지도 모른다. 그들이 너무 강하게 그들 자신의 빛을 발할 때 그와 똑같은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리스도야말로 세상의 빛이다. 다른 빛은 없다.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취하는 자는 빛을 발산하고 다른 사람도 밝게 비춘다. 그는 밝은 빛을 내보내고 눈에 띠게 된다.

자연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혀 하찮은 사람들일 수 있는 그들이 빛으로 광채를 내고 멀리까지 빛을 비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어느 시대나 세상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전하는 위대한 일꾼들을 살펴보면 그들 대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리스도의 빛이 그들 위에 비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그들에 대해서 몰랐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만이 세상의 모든 빛을 훨씬 능가한다. 전에는 위대한 자라는 뜻인 사울이 그리스도께 전향한 후에는 작은 자라는 뜻으로 바울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이러한 시살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정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적다. 누군가 그를 알고 있다해도 바울이 작은 자가 된 후에 큰 빛으로서 시대를 뚫고 빛을 비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적다.

그리스도를 올바로 섬기는 자는 큰 빛을 비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겐 중요한 문제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산 위에 있는 하나의 마을이다.

문: 그것이 무슨 뜻인가?

답: 이것은 다시금 뭔가 중요한 것을 뜻한다. 새롭고 위대한 진리가 출현한다면 사람들은 거기에 주위를 집중한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그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특별히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주목한다. 그들의 실제적인 본성과 행동, 그들의 전반적인 품행과 그들이 전하는 말이 실제로 보증할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주목한다. 그들이 행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를 힘을 잃는다.

반면에 그들이 행한다면 그 진리의 힘은 놀라울 정도로 증가될 것이다. 이런 사실은 특히 그리스도의 일과 관계된다. 그리스도의 일이 활발하게 일어난 곳에서는 다른 곳에서 있을 수 없는 큰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그 주목은 다름 아닌 이 사람들의 개인적인 품행이 이들이 전하는 말과 일치하는 지에 관한 주목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진리를 몸으로 보여주기만을 관심 있게 기다릴 뿐이다. 이것 외에 어떠한 것도 그들을 깊이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맨 처음 제자들과의 공동체는 그들이 전하는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서 인심을 얻는 것이다.

“저 놀라운 사람들 좀 보게 얼마나 새롭게 사나!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을 보게! 저들이 어떤 부인과 사는가를 보게!”

사람들은 이런 특성의 원천을 더듬어 올라가서 그리스도에게 갔으며 아버지께로 간 것이었다. 그리스도 자신도 이와 같이 아버지께로 나아간 것이 아닐까? 그의 선포에 세상을 이기는 힘을 준 것은 그의 업적이 아니라 그의 삶이지 않는가? 인간에게 주님시이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계시한 것은 그의 순결함과 그의 사랑과 믿음과 순종과 그의 십자가이지 않은가? 그리스도는 “내 말을 듣는 자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 자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다”고 하지 않았는가?(요한복음 14장 8-9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일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써 즉시, 비록 은밀하게 일지라도 대단한 주목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가 과연 빛을 비추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일에 합치하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한 위대한 증인인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의 일을 실존적으로 대신 해야 한다는 것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두었으며, 그 자신이 그렇게 그리스도의 일을 함으로써 세상을 넘어서는 모든 시대를 비추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되었다.

문: 그렇지만 그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이고, 우리는 작은 자들인데 우리가 그럴 수 있을까?

답: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작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멀리 비췰 수 있으며, 숨겨져 있을 수는 없다. 그와 같이 당신도 타고난 자질이나 지위가 비록 작고 별 것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에게서 비추어지는 그 빛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런 빛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로부터 당신에게 주어진 빛이 됫박 속에서가 아니라, 등경 위에서 당신의 인품과 행위가 빛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반경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고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당신은 사도다. 그것을 상상해 보라! 당신은 어떤 비범한 것을 대표한다. 이것을 비범한 특성으로 나타내도록 하라. 세상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곳에서 유래하고 그곳을 지시하는 그런 어떤 것으로 그것을 나타내라.

문: 그러나 그것은 위험하지 않은가? 즉 전시적인 효과만을 강조하는 위험이 있지 않을까? 만약 사람들에게 아주 거룩하게만 보여지고자 한다면 예수께서 매우 꾸짖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지 않겠는가? 또한 위선에 빠지지 않을까? 하나의 본보기나 모범이 되고자 하거나 꼭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영적인 면에서 위험한 일이 아닐까?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함으로써 견디지 못하게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가게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너희들의 빛을 비추도록 하라”는 말은 조소의 말로 되지 않았는가?

답: 유감스럽게도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희미하고 약하게–역주) 빛을 비추라는 말(leuchten) 대신에 (보다 강하게–역주) “너희의 빛을 비추게 하라”고 하기보다는, 본문에 더 가깝게 (보다 적극적으로-역주) “너희의 빛을 비추게 하라”고 번역했다. 또한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언급해야겠다. 남에게 우리를 보이려고 하거나 그렇지 않거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을 대신한다면 결국 남이 우리를 보게 될 것이요, 또 그들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보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고려해야만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보도록 내놓아진 존재다.

문: 우리가 우리의 순수성(Unmittelbarkeit)을 지키고 위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런 것을 잊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답: 우리는 세상의 판단을 항상 곧바로 고려할 필요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판정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의 일을 이러니저러니 판단할 것이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세상의 해석은 일종의 왜곡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께서 의도하신 것을 위조한 것이다. 예수께선 우리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얻기 위해 이런 착한 행실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여기서 그저 단순히 ‘좋은’(gut) 일이 아니라, 착한(schön) 행실을 해야 한다고 한 것도 의미가 있다. (Gut는 어떤 일이 본질적으로 좋은 일에 속하므로 단순히 ‘좋은’이라는 의미가 있고, Schön은 어떤 일의 결과나 혹은 어떤 모습이 완전하거나 특별한 모습을 띠르모 해서 ‘아름다움’이라는 의미가 있다. - 성서본문에는 ‘착한’으로 표현되어 한다. - 역자 주)

예수께서 우리의 전존재와 행동으로 우리의 일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하며, 단순히 세상일을 사람들과는 모든 점에서 달라야만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안에서만 거룩한 것을 품고 있어선 안 된다. 바깥에서도 그 거룩한 것에 대한 증언이 행해져야 한다. 겉을 통해서만 속도 알려질 수 있다.

신약성서에는 없는 예수의 한 말씀이 전해지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물음에 “겉이 속과 같아지고, 속이 겉과 같아질 때”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속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차차 스스로 소멸한다. 됫박으로 덮어둔 등불은 어떻게 되겠는가? 차차 희미해져 마침내 꺼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반대로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나오면 그 속에 있던 것은 강해지고 증대될 것이다.

불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산소로 환한 빛을 발할 것이다. 확신과 품은 뜻은 말(바른말)과 행위로 나타날 때 강한 힘을 얻을 것이며, 불길은 점차 왕성해 질 것이다. 믿음, 사랑, 소망, 이 모든 것들은 밖으로 표출됨에 따라 더욱더 왕성해 질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것들을 밖으로 알리는 가장 좋은 표현방법은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위가 짠맛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 행위는 그만큼 더 강하게 빛을 비췰 것이다. 소금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불길을 번지게 하는 힘이 있다. 진리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은 이런 소금의 가장 강한 모습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랑과 용기의 행위인 것이다.

문: 그러나 우리가 도대체 그런 “착한 행실”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그런 업적에 뜻을 두는 것과 싸웠고, 그 대신 신앙을 가조하지 않았던가?

답: 그리스도는 바울이나 종교개혁자들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시다. 바울이나 종교개혁자들은 업적을 단순히 무시하고 억압하려고 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은 더욱 더 그렇다.) 오히려 단지 맹목적인 율법의 업적만을 저지하고 바른 업적의 원천은 열어 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일방적으로 되어 버렸고 심각한 해악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신 “착한 행실”이란 율법을 행함으로써 오는 업적이 아니라 올바른 원천에서 나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런 일들을 우리는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고 요구하신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그것을 할 수 있도 또 해야만 한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건 일을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예수의) 일을 제대로 대신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을 알고 계신다. 즉 사람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사람들 앞에서 너희의 빛을 비취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개된 비밀이다. 즉 사람들이 그런 착한 행실을 보잘 것 없는 사람 가운데서든지, 훌륭한 위인에게서든지 어디서든 보게 되는 곳에서 그들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로 인도된다.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 보다도 사람들은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것이다.

세상의 능력으로 설명될 수 없는 특이한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 하나님이 알려진다. 말씀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고 일컬어지는) 설교나 교회운영(Betrieb)이나 단순한 성서읽기와 성서해설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넘쳐 나오는 신앙의 행위, 사랑의 행위, 선하고 순결한 빛, 고상하고 자유한 인격과 세상의 본질과는 현저하게 상반되는 것, 이런 것들이 올바른 복음선포이다. 실제로 행해지는 것들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행위로 말씀하심으로 우리도 행위를 통해 그 분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세상은 세상의 불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세상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믿음을 가지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은 거룩한 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곳에서는 그 거룩한 것에 쉽게 저항할 수가 없다. 세상이 비록 저항한다고 할지라도, 세상은 그 점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백작이요, 백만장자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인 톨스토이와 같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해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했을 때 얼마나 세인의 주목을 끌었던가! 또한 과거에 그와 유사한 일을 한 프란체스코와 같은 사람이나 간디 같은 사람, 가가바(Kagava) 같은 사람도 이에 속한다(이는 Kagawa, Toyohiko 1888-1960의 오기인 듯하다. 가가와는 일본의 사회개혁자요, 복음전도자였다. - 역자 주).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서는 세계를 만들라.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것이다. 그것이 제자들과 공동체에 맡겨진 일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이다.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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