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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1: 서로 사랑하라!(삼하 1:17-27; 계 14:13-15:4; 요 15:12-17)창조절 열째 주일(11월3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11.01 17:10

1.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지금 우리는 교회력으로 창조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환경위기에 직면하여 신음하고 있는 지구 생태계를 바라보며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창조절기는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가을 하늘이 높고 푸릅니다. 바람도 이제 제법 쌀쌀해 봄에 넣어 두었던 겨울옷을 찾게 만듭니다. 이제 11월 마지막 주까지 네 번의 창조절기를 지나면 12월 첫 주부터 대림절기가 시작됩니다.

절기는 1년 동안 지속되는 계절의 변화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해마다 그 주기는 끝을 맺고 새롭게 시작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자연의 주기는 교회력의 틀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절기의 내용은 자연의 주기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절기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된 사건들을 기념합니다. 따라서 반복되는 1년의 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주신 역사의 전환점을 회상하게 합니다.

우리 교단이 지키는 ‘삼위일체 교회력’에 따르면 창조절기가 시작되는 9월부터가 한 해의 시작이지만, ‘그리스도 중심 교회력’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오시는 대림절이 한해의 시작이 됩니다. 따라서 비록 설교에서는 삼위일체 교회력을 따르지만, 교회의 모든 시스템이 11월을 마감으로 하고 있고, 또 12월부터 새 회기가 시작되니, 어쩌면 11월은 교회 절기상 한해를 마감하는 절기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11월 4주간의 말씀이 모두 마지막 날에 관한 말씀이네요. 한해를 정리하는 말씀,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시는 말씀, 마지막 때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1월 첫째 주는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죽음과 마지막 때를 생각하게 만들며, 둘째 주는 마지막 날에 공적(功績)을 계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셋째 주는 의인들을 영생에, 그렇지 않은 자들은 영벌에 처하시는 말씀, 그리고 창조절 마지막 주인 11월 넷째 주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으로 창조절기가, 아니 한해의 마지막이 마무리 됩니다. 이렇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가 마지막 심판으로 끝나는 것을 통해 우리는 한 해의 흐름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죽음과 종말의 때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구약의 본문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 관한 말씀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복음서 본문은 뜬금없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계명인 사랑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종말이 어떻게 사랑과 관계가 있을까? 궁금증을 주는 세 본문 말씀의 연결입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을 통해, 죽음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2.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오늘 본문 말씀인 사무엘하는 사실 다윗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1장에서 우리는 다윗의 선한 인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말렉 사람이 사울왕의 전사 소식을 갖고 다윗에게 찾아왔을 때, 다윗은 슬픈 노래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특히 그를 사랑했던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는 큰 슬픔으로 애통해 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노래를 지어 유다 족속들에게 가르칩니다.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죠?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삼하 1:17-18)

여기 『야살의 책』은 성경이 언급하는 고대 역사서 가운데 하나로, 여호수아서(수 10:13)와 사무엘서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책이 분실되거나 발견되지 않았는데, 대략 창세기부터 사사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성경에 짧게 나오거나, 혹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사건들 사이의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의 내용은 성경보다 약 두 배 정도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튼 야살의 책에 기록된 노래는 사울과 요나단을 위한 다윗의 슬픈노래(애가)로 사무엘하 본문에 이렇게 나옵니다. 노래이기에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너, 이스라엘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었구나. 아, 용사들은 쓰러졌구나. 이 소문을 갓에 알리지 말라. 아스클론 거리에 퍼뜨리지 말라. 블레셋 계집들이 좋아하고, 오랑캐 계집들이 좋아 날뛸라. 길보아 산악에는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아니하고, 소나기도 쏟아지지 아니하리라. 거기서 용사들의 방패는 더러워졌고, 사울의 방패는 기름칠도 않은 채 버려졌구나. 요나단이 한번 활을 쏘면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그 살에는 적군 용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는데. 사울이 한번 칼을 휘두르면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그 칼에는 적군 용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는데. 사울과 요나단은 살았을 때 그렇게도 정이 두텁더니, 죽을 때도 갈라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날쌔고, 사자보다도 힘이 세더니. 이스라엘의 딸들아, 주홍색 옷을 입혀주고 그 옷에 금장식을 달아주던 사울을 생각하고 통곡하여라. 아, 용사들이 싸움터에 쓰러졌구나. 요나단이 산 위에서 죽었구나.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오. 형은 나를 즐겁게 해주더니. 형의 그 남다른 사랑,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었는데. 아, 용사들은 쓰러지고, 무기는 사라졌구나.”(삼하 1:19-27)

지난 2019년 10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의 모친 강한옥 여사께서 소천하셨습니다. 대통령께서 페이스북에 이렇게 쓰셨더군요. “마지막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믿으신 대로 하늘나라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 영원한 안식과 행복을 누리시길 기도할 뿐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막을 수 없는 진실입니다. 따라서 대통령은 물론, 구약의 다윗도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겪습니다. 비록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원수지만, 그의 죽음 앞에 이렇게 다윗은 고귀한 품격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과 행복을 누릴 것을 믿습니다. 대통령께서도 기독교(가톨릭) 교인이라,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안식과 행복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또 다른 삶, 영생의 축복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3.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주 안에서 죽는 자들(the dead who die in the Lord from now on)’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죽는 자들’이라고 현재형(from now on)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로마제국으로부터,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핍박받고 죽어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지상에서 수고한 ‘알곡 된 신자들’은 구원을 받지만, ‘포도송이로 비유된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먼저 알곡 된 신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계 14:14-16)

땅의 익은 곡식을 거두어, 그들에게 영원한 하늘 창고에서 안식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포도송이로 비유된,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과 멸망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stadiōn)에 퍼졌더라.”(계 14:17-20)

익은 포도송이를 거두어 진노의 틀에 던져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진노의  포도주 틀에서 나오는 이들의 피가 높이는 말굴레, 곧 말 머리까지이며 길이는 대략 300km(1 스다디온은 185m)까지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들판에 익은 곡식의 풍요로운 모습과 포도주 틀에서 나오는 포도의 붉은 핏빛 모습을 상상해 보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비유가 눈에 훤하게 들어옵니다.

그런데, 오늘 계시록 본문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5장 4절까지 이어집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날에 펼쳐질 재앙에 관한 말씀들이 핵심인데, 그것은 ‘일곱 인 재앙’, ‘일곱 나팔 재앙’, ‘일곱 대접 재앙’입니다. (주현절 다섯째 주일 말씀의 표 1, 2 참조) 오늘 15장 본문 말씀은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 전에, ‘어린양의 노래’ 곧 어린양의 승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계 5:1-3a)

이 땅에서 짐승과 우상과 그 이름을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모세의 노래, 곧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노래는 이렇습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 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계 15:3b-4)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주께 천하만국이 경배 찬양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마지막 날의 모습입니다.

4. 어린양과 어린양의 신학

최근 종말론 때문에, 이단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단들은 대부분 성서의 문자를 폭력적으로 해석하며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처럼 기독교 근본주의도 위험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이단들의 사상에 따르면, 지진과 같은 자연 재앙과 테러 등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우주적 종말인, 피비린내 나는 ‘아마겟돈 전쟁(Armageddon)’ 속으로 이 세상이 이미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성서 말씀 가운데,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만을 중요시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이단들의 사상은 성서의 참 뜻을 왜곡하며 꾸며낸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마겟돈이라는 말은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단 한번 등장합니다(계 16:16). ‘므깃도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요시야 왕이 전사한 곳입니다(왕하 23:28-30). 이곳에서 전쟁이 많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황산벌이나 백마고지쯤 되겠지요? 아무튼 이러한 전쟁을 상징하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의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단들은 자신들이 아마겟돈 전쟁을 갈망하는 이유가 그 전쟁 이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폭력과 전쟁을 일삼으면서 재림하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전쟁을 평화로 만드셨던 분이 아니었나요? 사자가 어린양과 함께 있는 그런 평화 말입니다. 

<사자와 어린 양>

그럼 무엇 때문에 이토록 이단들은 종말론에 혹해서, 주님의 재림에 열광할까요? 무슨 이유로 피와 죽음을 강조할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믿는 자들은 땅에서 하늘로 ‘휴거(携擧, rapture)’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하늘로 휴거 된 이후,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땅에 남겨진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세상의 종말을 구경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이웃이 고통 받을 때, 자신들은 폭력의 고통에서 탈출하여 휴거 된다는 아주 이기적인 신학입니다. 마치 영화관 앞자리에서 총격전을 관람하듯 휴거된 이들은 하늘이라는 2층 특별석에서 지구에 남아 있는 자들의 종말을 구경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근본주의자들, 혹은 이단들이 생각하듯, 선한 서구(미국과 이스라엘)가 악한 중동(구체적으로 아랍 이슬람)을 쳐부수는 아마겟돈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평화를 외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의 폭력과 힘의 구조를 성찰하도록 가르칩니다. 또한 동시에 억압의 구조에 도전하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도록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땅임을 이야기 합니다.

따라서 아마겟돈이 아니라, 예수님이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시작도,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1:1)’ 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가장 원초적인 목적은 ‘예수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지, 중동이나 유럽의 마지막 시대를 예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예수는 누구인가? 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이미지는 처음에는 검을 가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처럼, 나중에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대체됩니다. 그리고 어린양은 요한계시록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는 요소로, 144,000명의 거룩한 시온 산 전사를 소집하고(14:1), 악한 적과 싸우며(17:14), 전쟁이 끝난 후에, 결혼을 하며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19:7 ; 22:3). 여기서 144,00명은 계시록 7장 9절에 나오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는 뜻으로, 상징적으로 구약의 12지파×신약의 12사도×무한대를 상징하는 1,000의 제곱을 말합니다.

또한 실제로 요한이 사용한 헬라어 ‘양’은 단순히 어린양이 아니라, 정말 작다는 것을 뜻하는 단어로 ‘어린 양’, ‘작은 양’, 곧 아르니온(arn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오직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들을 파송 할 때만 사용합니다. 가령,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10:3).” 그 어떤 묵시문학도 신적인 존재에 대해 어린양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유대교의 관점에서는 결코 어린양이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가장 연약한 모습의 예수님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면서, 또한 동시에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이미지의 표현이 됩니다. 곧, “예수는 십자가에 죽었지만 다시 살아 나셨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어린양 이미지는 로마제국의 폭력을 무효화시키는 하나의 대안으로, 1세기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군사적 승전 이데올로기(팍스 로마나)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에 쓰여 졌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용감하게도 로마가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선포합니다. 세상은 그 어떤 제국이나 강대국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나 노예들이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이 있었던 에베소는 노예무역의 중심적인 도시로서,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 도시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약 30% 이상이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은 노예들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아주 획기적인 선언을 한 것입니다. 가장 힘없는 노예들에게 요한의 이러한 약속은 그들의 삶에 얼마나 큰 힘과 용기를 주었을까요? 따라서 어린양의 이미지는 식민지 노예들에게 제국주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며, 폭력과 욕심, 두려움과 불의에 중독된 그들을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출애굽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오늘날 가장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요한계시록은 진정한 힘이 과연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곧, 우주의 가장 중심에 서 계시는 예수님의 힘은 하나님의 희생양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이사야 53장의 내용(유대교가 인정하지 않는)을 기억에 떠올리면, 예수님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 침묵하는 어린양과 같은 이미지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은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어린양의 노래가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그 승리는 군사와 전쟁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자신을 죽이고 희생함으로써 승리를 장식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이러한 ‘십자가의 신학’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힘은 약함에서 드러난다는 놀라운 아이러니의 신학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은 바울의 서신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처럼 어린양 신학은 요한계시록의 전체 메시지를 대변합니다. 악은 폭력과 군사적인 힘에 의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린양의 사랑의 희생으로 정복된다는 놀라운 신학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학은 희생자가 승리자(NIKE)가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가지고 있는 신학의 핵심입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의 많은 부분들은 폭력적인 장면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폭력의 이면에 있는 신학적 의미들을 파악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승리자와 정복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바로 어린양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싸움이나 전쟁을 통해 얻어지는 승리를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대안적인 면을 가진 ‘어린양 신학’은 이단들의 종말론이나 파괴주의 종말론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귀중한 메시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어린양의 비전이 바로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비전이자, 동시에 적개심을 없애는 위대한 비전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의 승리 이데올로기에 비하면, 요한계시록의 어린양 이미지는 너무나 나약하고 보잘 것 없기 때문입니다. 군사적 힘을 의지하는 관점에서 보면 어린양의 이미지는 비폭력을 상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잔인한 살육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은 자기 자신을 살육의 희생 제물로 바치는 어린양의 이야기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어린양과 같은 힘을 가지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어린양과 같은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가르칩니다. 즉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어린양과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린양의 힘은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힘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힘입니다. 어린양의 힘은 비폭력적인 힘이자, 불의에 저항하는 용기입니다.

이 험난한 세상에 우리는 언제든지 ‘어린양의 힘’과 ‘짐승의 힘’ 둘 중 그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습니다. 어린양의 힘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 희생의 사랑의 정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정의(혹은 하나님의 의)와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힘은 희망과 저항을 향한 우리들의 노력이며 실천인 것입니다. 또한 어린양의 힘은 짐승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래이며 결속력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하여 비폭력적인 어린양의 힘과 증언으로 이 불의한 세상(짐승들, 즉 바벨론/로마제국)을 정복하였음을 듣습니다. 그들은 신성한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초대하여 생명의 강과 나무를 상속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복된 소식은 이미 우리가 이 하나님의 비전을 맛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어린양이 가신 비폭력의 길과 정의의 길처럼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새 세상으로 어린양은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3-5)

5.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시작하며 종말이 사랑과 어떻게 관계가 있을까를 물었습니다. 그림은 루터가 청소년기에 머물렀던 튀링겐 주의 작은 시골 마을인 아이제나흐의 소박한 2층집 앞에 있는 사과나무와 기념비석입니다. 비석에는 “그리고, 내일 세상이 멸망함을 알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마르틴 루터’(Und wenn ich wte, da morgen die Welt unterginge, sogeht, wurde ich doch heute mein Apfelbaumchen pflanzen.)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도 사랑하며 살리라.”라고 바꾸어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늘 신약 본문 말씀에서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살았던 아이제나흐 집 팡 사과나무와 기념비석>

사실 요한복음 15장 본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도들 간의 인간관계에 관한 교훈입니다. 말씀 자체는 쉬운 내용입니다. 볼까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2-15)

핵심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핵심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요 15:16-17)

그런데 이 말씀으로 세 본문의 결론으로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마지막까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종말의 때에 구원보다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일까요? 앞서 어린양의 신학에서 우리는 보았습니다. 어린양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싸움이나 전쟁을 통해 얻어지는 승리가 아니라, 희생과 사랑으로서 얻어지는 승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의 때가 와도, 지구가 멸망해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숫자 개념으로 나 자신이 144,000명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늘 하루,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마지막 날을 대하는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찾아와도 오늘 최선을 다해서 서로 사랑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4. 어린양과 어린양의 신학’은 바바라 로씽, 김진양 역, 『미국의 중동정책과 묵시 종말론: 요한묵시록의 희망 이야기』 (경성대출판부, 2009)와 최병학, 「어린양: 종말론과 어린양 신학, “미투”」, 『테오-쿨투라, 눈에서 천국까지: 신학과 문화의 만남』 (인간사랑, 2019)을 참고하였습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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