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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되어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의 상관성 (3)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19.11.02 17:55

칼빈은 3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자연적인 지식의 예는 3가지 관점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3장과 4장에서 말할 것입니다.

인간의 심성에 심겨져 있는 씨앗

먼저 3장에서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종교의 보편성이며, 두 번째는 양심의 불안이 그 증거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노예적인 두려움이 그 증거입니다. 먼저 자연적 지식의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핑계하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이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된다. … 저 유명한 이교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확신을 갖지 못할 만큼 미개한 국민이나 야만적인 종족은 없다(I.iii.1).

칼빈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종교 없는 민족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칼빈은 역설적으로 우상숭배를 이 관념에 대한 풍부한 증거로 제시합니다. 두 번째로, 칼빈은 불안한 양심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칼 마르크스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는 말을 했습니까? 그런데 그보다 먼저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피큐로스 파 사람들은 종교를 소수의 지배층이 순박한 민중을 속박하기 위해 교묘한 술책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칼빈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결코 종교는 그런 민중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레위기 말씀을 인용합니다. 가장 대담하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일수록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심하게 놀라는 것은(레26:36) 그들이 피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강한 힘으로 그들의 양심을 때리는 하나님의 복수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양심의 불안” 때문에 고통당하는, 불경자 그 자신이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항상 실재한다는 사실을 예증해준다고 말합니다(I.iii.2).

▲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사변적 지식이 아니라 예배라고 강조했다. ⓒGetty Image

칼빈에 의하면,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속에는 결코 지울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에 관한 일체의 지식을 내던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더럽히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쓸지라도, 그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에 대한 의식은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무성해져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하나님에 대한 공포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많은 형태의 죄악에 붙잡혀 끊임없는 혼란과 불안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I.iii.3). 어째서, 이들의 삶이 그렇게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의 법칙을 벗어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여기에 도달하지 못할 때 그것을 불안정하고 허망한 것이라고 본다면, 자신의 모든 사상과 행동을 저 목적 에 맞추지 않는 사람은 창조의 법칙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I.iii.3).

그러므로 칼빈은 저 창조의 법칙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와 주로서 인식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더 뛰어나게 하며, 이 예배를 통해서만 인간은 불멸을 동경하게 된다.”(I.iii.3)고 역설합니다. 칼빈은 그의 두 번째 「제네바 신앙문답서」(1542)에서 인간의 삶의 목적에 대해 보다 쉽고, 자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1)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알고 관계맺음

칼빈은 「제네바 신앙문답서」 §1에서 “인생의 주된 목적인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고, 그 질문에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하여서만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영광, 이것은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원리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만 영광을 받는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 정면에 크게 “프랑스에게 영광을”이란 말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인간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을 드러내는데 모든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만한 인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이고, 최상의 행복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질문 2의 관심입니다.

§2 “어떤 이유로 당신은 그렇게 말하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에 살게 하셨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근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칼빈의 기본적인 신앙, 그리고 경건 때문에, 다시 말해서 그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주셨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는데, 우리가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는데, 우리의 모든 것이 그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의 목적과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타락하고 하나님과 겨루려고 했고, 그래서 이 창조의 오케스트라에서 인간만이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합창에서 빠져있다는 것이 신앙문답에서 설명하려는 내용입니다.

§3은 인간의 최상의 행복이 그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삶에 있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최상의 행복은 무엇인가? 그것도 같은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 삶이 인간의 최상의 행복이 될 수 있는가?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까닭은,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상태는 짐승들보다 더 불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못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칼빈에 의하면 짐승들은(그리고 모든 창조세계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으면서 바라셨던 것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갖고 있고,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만약 인간이 그의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그를 제외한 창조세계의 모든 것들에 비해서 열등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짐승들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에 응답하는 이 임무에서 우리를 앞서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영속적인 찬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5장에서(우리가 확인할 것입니다)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 “눈부신 극장”(I.v.8)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드러나는 무대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삼라만상 모든 것이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응답하려고 함께 모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합창, 창조세계의 이 모든 오케스트라의 한 가운데 있는 인간, 그는 여전히 거기에 속해 있지만 그가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칼빈은 바로 이렇게 그의 창조의 의미를 성취􏰀지 않는 것이 인간의 비참함이라고 말합니다. §5는 거듭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이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칼빈은 §6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 진정한 지식”에 대하여 재차 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목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이라는 대답을 합니다. 이것은 칼빈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지식이 결코 추상적인 지식, 사변적인 지식,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이 지식은 단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가치를 갖는 지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항상 함께 갑니다.

§7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제네바 신앙문답서」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세세한 내용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앙문답서에 질문이 373개 항목이 있는데,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 네 부분의 순서가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거룩한 뜻에 복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의 일체의 궁핍 가운데서 구원과 모든 선한 것을 하나님 안에서 찾고 구하고 기도하며, 모든 행복은 다만 하나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마음속에서 또 입으로 표현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네 가지 방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둘째, 그의 거룩한 뜻에 복종하며 그를 섬기고; 셋째, 우리의 일체의 궁핍 가운데서 구원과 모든 선한 것을 하나님 안에서 찾고 구하고; 넷째, 모든 행복은 다만 하나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마음속에서 또 입으로 표현하고 인정하는 일이다.

이 네 가지 방식은 신앙문답의 네 부분과  일치하고 실제로 그것의 기초를 구성합니다. 1. 신앙의 조항들에 대하여(사도신경). 사도신경의 세부적인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가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확신,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 그의 ‘신뢰’라는 인간의 응답을 불러냅니다. 2. 법에 대하여(십계명).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 하는 인간의 응답을 불러냅니다. 3. 기도에 대하여(주의 기도).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일체의 궁핍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4. 성례전에 대하여. 여기서 칼빈은 어떻게 성례전이 우리의 신앙과 섬김에 대한 진실하고 가시적인 증거를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수단이 되는가를 제시합니다.

미주

(미주 1) 칼 바르트, 최 영 옮김, 『칼 바르트가 읽은 주의기도/사도신조』(서울: 다산, 2000), 91-97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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