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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브(טוֹב)’와 ‘라아(רַע)’고통을 주는 하나님(욥 2:8-10)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11.03 16:34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오늘 저희가 읽은 욥기의 말씀은 욥기 서론인 산문의 에필로그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욥기 서론은 욥이 당하는 고통에 따라 이야기의 절정에 달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아내와의 대화, 다음에 이어지는 친구들과의 침묵은 서론을 맺는 역할을 합니다.

욥기 서론 마지막인 2장 11-13절에 나타난 네 사람의 침묵은 뒤이어지는 기나긴 토론을 암시하는 듯 합니다. 혹은 이어질 토론과의 극단적인 대조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들이 7일간 침묵했다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론의 마지막 에필로그는 11-13절만으로 보아도 될 듯 합니다.

하지만 욥과 아내의 대화를 함께 묶어야 하는 이유는, 아내의 제안이 이어지는 욥의 말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희는 욥과 아내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욥기가 전하고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저주하고 죽어라

사실 많은 분들이 욥의 아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저 남편에게 죽으라고 말한 여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고, 욥이 당하는 시험 중 하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과거의 많은 주석가들은 욥의 아내를 ‘사탄의 하수인’으로 설명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녀를 ‘악마 지지자’라고 표현했고, 칼뱅은 그녀를 ‘사탄의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탄이 욥의 아내를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합니다.

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요구하는 점이 사탄이 하나님께 제안했던 내기의 주제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욥의 아내를 남편을 유혹하는 하와에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욥기에 나타난 창조의 이미지와 연결시켜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먼저 욥의 아내가 욥에게 뭐라고 말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욥의 아내는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9절 앞부분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온전함 속에 굳게 놓여있는가?” 욥이 피부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중에도 하나님을 향한 온전함을 지키고 있는 이유를 묻습니다.

▲ 욥의 아내와 욥 ⓒWikipedia

다음으로 건낸 말이 9절 뒷부분의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입니다. 여기에서 ‘욕하다’라는 말은 저희의 예상과는 다르게 ‘축복하다’라는 뜻의 ‘바라크(בּרך)’가 사용되었습니다. ‘바라크’는 본래 ‘축복하다’라는 의미이고, 사람이 하나님을 축복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상, 목적어가 될 경우에는 ‘찬미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바라크’가 강조형으로 쓰였을 경우에 가끔 완곡어법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완곡어법은 직설적으로 말하기에 너무 부정적이거나, 성경의 저자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불경을 범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부드러운 말로 바꿔 말하거나 쓰는 경우를 뜻합니다. 예컨대, 흔한 영어 욕설인 ‘fuck’을 말하지 않기 위해 ‘F-word’라고 부르는 경우를 완곡어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1장 10절과 13절에서 아합이 나봇에 대한 거짓 증언을 꾸밀 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증언하도록 시키는데, 이때 ‘바라크’의 강조형을 사용합니다.

즉 아내의 말을 직역하면 ‘하나님을 찬미하고 죽어라’가 되는데, 이를 완곡어법으로 해석하여 번역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가 됩니다. 저는 욥의 아내가 선하다·악하다를 따질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이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서 약간 의미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이를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고 죽는 경우는 욥에게 마지막으로 그 온전함을 지키면서 죽으라고 말하는 뜻이 됩니다. 반면 저주하고 죽으라는 말은 레위기 24장 10-16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던지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하라는 뜻이 됩니다.

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녀는 욥에게 죽음을 제안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살을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면 반드시 죽기 때문에 그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라고 제안합니다. 우리 말에도 ‘접시물에 코 박고 죽으라’는 말이 있는데, 이와 유사한 의미로 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저런 표현이 욥기가 기록되던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던 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꼭 같은 의미라고 단정 짓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70인역 성경은 욥기 2장 9절에 다섯 절을 더 추가로 붙여놓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70인역 성경의 본문은 나중에 덧붙여진 이야기라고 보고, 욥의 아내를 동정적으로 바라보던 유대 랍비 전통에 의한 첨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봐야할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70인역 성경은 분명 지금 저희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보다 먼저 성경으로 묶였고, 초대교회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70인역 성경이 전하는 욥의 아내의 말은 이렇습니다. 데이비드 클라인스의 WBC 주석에서 번역해 놓은 것을 옮깁니다.

“보세요. 나는 나의 구원의 소망을 기다리며 조금 더 기다릴텐데, 당신은 얼마나 오랫동안 견딜 것인가요? 보세요 당신에 대한 기억, [즉] 내 자궁의 산고와 진통이며 내가 헛되이 수고하며 기른 아들들과 딸들이 땅에서 사라졌어요. 그리고 당신 자신은 벌레들이 썩는 곳에 앉아 열린 하늘 아래서 밤을 지새우고 있고, 나는 태양이 저물어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노역과 고통으로부터 쉼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며, 이곳저곳, 이 집 저 집을 떠도는 방랑자요 하녀라. 이제 주님을 대항하는 말을 하고 죽으세요.”

욥이 아닌 욥의 아내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70인역은 그녀가 ‘사탄의 하수인’이 아니라, 너무도 큰 고통으로 인해 욥에게 자살을 요구하고 있다고 본다는 점입니다. 70인역의 마지막 번역은 약간의 의역 같습니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하나님에 대해 뭐라도 말하고 죽어라” 입니다.

죽음의 방법 – 하나님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욥의 아내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했건 욥의 자살을 요구하고 있는데, 완곡어법으로 번역된 대부분의 성경을 따른다면, 그 방법으로 ‘하나님’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분명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그녀의 요구에 대한 욥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복도 주시고 화도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섭리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을 보았을 때,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욥이 한 말을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한 것 또한 취할 것인데, 악한 것을 취하지 않겠는가?”

우리 성경에 ‘복’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토브(טוֹב)’이고 ‘화’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라아(רַע)’입니다. ‘토브’와 ‘라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선악과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토브와 라아의 열매’, 선함과 악함의 열매가 선악과입니다.

욥기는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을 떠올리도록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의 아내를 하와와 비교한 학자들의 의견도 일리는 있어 보입니다. 뱀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사람을 유혹했지만,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선함’만이 아닙니다. 선악은 함께 붙어 있기 때문에 ‘악함’도 함께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선함만을 취하고 싶었지만 악함까지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욥기가 말하는 선악과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든 고통, 악이 사람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3장 이후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선함과 동시에 악함도 취하게 되었지만, 그 결과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됩니다. 욥기가 말하는 바는 이 사건을 통해 사람은 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욥기 3장부터 욥은 아내의 조언에 따라 열심히 하나님에게 대항합니다. 70인역의 본문과 같이 하나님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말합니다. 이때 욥과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의 중심에는 ‘하나님은 벌주는 분’이라는 개념이 깔려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준다고 말하는 욥의 세 친구나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하고 싶은대로 벌도 주고 복도 준다는 욥의 말이나 모두 하나님은 사람에게 ‘벌’ 혹은 ‘악한 일’을 행하신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욥의 아내가 죽음의 방법 중 하나로 하나님을 저주하는 방법을 제안했던 것처럼 욥과 세 친구, 이 네 사람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욥의 서문은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욥에게는 분명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3장 이후의 운문에서 욥은 스스로를 지혜로운 자라고 말합니다만, 마지막 42장 3절에 나타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이 회개하며 말한 고백은 스스로가 지혜 없었던 자임을 드러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 욥이 아내에게 던졌던 첫 번째 말,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라는 말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 됩니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어리석은 말이었음을 마지막에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살리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욥이 갖지 못했던 지혜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앞서 욥기 마지막에 나타난 하나님은 왜 고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창조 이야기만 하시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학자는 욥이 결국 듣고 싶은 얘기는 듣지 못하고 3시간짜리 자연과학 수업만 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욥기 전체에 대한 몰이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욥에게 생명에 대한 이야기만 하십니다. 하나님은 혼돈을 의미하는 베헤못과 리워야단까지도 다스리시고 그들에게 삶을 부여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난에 대해서만 열띤 토론을 했던 욥의 시야를 생명이라는 관점으로 돌려놓으시는 부분이 38-41장의 말씀입니다.

욥기는 이미 서문에서부터 이야기의 전반을 보여줍니다. 욥기 서문은 계속해서 선과 악의 문제를 창세기와 연결시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떠올리도록 만듭니다. 선악과를 먹고 선을 얻었지만 동시에 악도 얻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된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는 심판하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욥을 인식을 보여줍니다. 이는 욥의 아내의 말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4장 1-2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논쟁을 말합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욥에게 악함은 없었습니다. 폭력과 포악도 없었습니다. 그는 정직했고, 온전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벌을 주시고 동산에서 내쫓으신 하나님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동산 밖에서도 그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고통이 놓인 순간에 고통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음을 선택한 길을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는 분이시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에 어려움이 있을 때,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사탄의 시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어려움의 원인이 무엇일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분명한 점은 생명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분명 살리시고 이끌어주신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깨닫지 못할 때에 깨닫게 하시고, 고통에 주저앉아 있을 때에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가 모든 희망을 잃었을지라도 새로운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생명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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