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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자본주의에 종속시키는 번영신학은 타파돼야 한다교회를 기독교 경제윤리 (26)
강원돈 교수(한신대 신학부/사회윤리와 민중신학) | 승인 2019.11.04 17:26

지난 제25회 연재에서 필자는 참여, 생태계 보전, 정의, 인간 존엄성 보장 등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가 설정하는 원칙들에 입각하여 교회는 자본주의를 옹호할 수 없음을 확실하게 선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신을 갖고서 교회는 번영신학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타파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번영신학은 교회를 자본주의에 종속시키는 사이비 신학이기 때문이다.

번영신학은 그 나름대로 탄생과 발전의 내력을 갖고 있고, 오늘 미국과 한국을 위시하여 여러 나라들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신학적 담론이다. 그 신학적 담론은 물질적 성공과 번영을 얻고자 하는 날것의 욕망을 지지하기 때문에 대중적 기반을 손쉽게 확보하고, 그러한 사람들을 대규모로 끌어들여 외형적 확장에 성공한 교회가 교회 안팎에서 힘을 과시할 수 있게 하고, 교파를 넘어서서 성장 강박에 시달리는 개교회 교역자들과 지도자들의 멘탈리티를 속속들이 지배하기에 이른다. 번영신학의 담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가 독차지하는 부와 권력, 그리고 그것들을 포장하는 명예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성하고, 그 결과 개신교인들을 자본주의에 포박하고 교회를 자본주의에 종속시키는 담론적 효과를 달성한다.

필자는 교회가 번영신학의 담론적 효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우리 시대에 기독교 경제윤리가 수행하여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이 글에서 번영신학의 탄생 맥락과 발전 맥락을 간략히 짚고, 그 핵심 주장이 기독교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다.

번영신학적 담론의 탄생 맥락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성공과 번영을 하나님의 현존과 축복의 증거로 선전하는 번영신학은 19세기 중반에 미국 뉴잉글랜드의 상공업 지역에서 기업가와 비즈니스를 축성하는 신학의 형태로 선을 보였다. 번영신학의 가장 오래된 버전은 개신교의 전통적인 직업소명론의 틀에서 비즈니스를 하나님의 소명으로 성격화하고 사업의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하는 비즈니스 신학이었다. 근면하게 일하고, 가능한 한 많이 벌고, 번 것을 가능한 많이 나누라는 존 웨슬리의 가르침은 비즈니스 신학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러한 비즈니스 신학은 1843년에 존 토드 목사가 한 저널에 쓴 짤막한 에세이 “성공의 토대”에 또렷하게 드러났다.(1) 윌리엄 반 도렌 목사는 거의 같은 논조를 유지하면서 1857년 『상인의 도덕』이라는 책을 썼다.(2) 이와 비슷한 에세이들과 책들은 1850년대를 전후하여 봇물이 터진 듯이 출간되었다. 그것은 남북전쟁 이후 미국이 자본화, 공업화,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업을 일으켜 번창시키고 축재를 하는 것이 미국 동북부의 상공업 지역에서 성공적인 삶으로 인정되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 아래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미국의 기독교 비즈니스 문화의 영웅은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Sr., 1839–1937)와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였다. 이 두 사람에 관한 신화는 미국 비즈니스 문화에서 자양분을 얻은 번영신학 담론의 기본적인 얼개와 그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라크펠러는 독실한 신앙 때문에 엄청난 거부가 된 사람이라는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신앙심을 물려받았고, 일평생을 독실한 침례교도로 살았다. 어린 시절에 그는 교회 목사로부터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고,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것을 남에게 주라.”는 웨슬리논조의 설교를 들었고, 그때부터 돈을 버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재능이라고 확신하며 살았다. 그는 소득의 십일조를 반드시 했고, 자선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이 설립한 스탠더드 오일 회사를 은퇴한 뒤에 그는 거금을 희사하여 시카고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하였고, 의학연구, 병원, 학교, 교회 등에 많은 헌금을 하였다. 신앙과 축재와 자선의 원환운동이 록펠러 신화의 핵심이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 비즈니스 문화에서 비롯된 설교의 원형을 이루게 되었다.

▲ 번영신학자들은 태초에 돈이 있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Getty Image

록펠러 신화는 밝은 앞면만 부각될 뿐 그 어두운 뒷면은 가려진다. 록펠러는 1859년에 펜실베이니아에서 발견된 석유광맥을 개발하여 큰돈을 벌었고, 그가 창립한 스탠더드 오일 회사는 카르텔을 형성하여 미국에서 석유 공급의 90%를 차지하는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그가 다른 기업체를 인수·합병하여 카르텔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무자비함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록펠러 신화의 광택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에게 금기시된다.

카네기의 신화도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는 철강왕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고, 재산의 상당 부분을 출연하여 카네기재단을 만든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카네기는 사업을 무자비하게 추진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1892년 홈스테드 노동자 파업에 대한 무자비한 유혈진압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카네기의 경영방식에서 비롯된 미국 기업사와 노동사의 어두운 한 페이지이다. 그는 또한 록펠러가 보여준 모델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경쟁 기업들에 대한 무자비한 인수·합병을 통하여 미국 철강산업 분야에서 독점적인 카르텔을 형성하였다. 그가 1901년에 창설한 유나이티트 스테이츠 스틸은 엄청난 규모의 기업군이었다. 그는 이 트러스트를 창설한 뒤에 곧바로 은퇴하였는데, 그가 은퇴하면서 트러스트와 맺은 계약은 향후 50년 동안 트러스트 이익의 5%를 배당받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카네기는 자신의 사업 방식에 대한 세간의 비난이 집중될 때마다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많이 벌고, 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많이 베풀라.”는 존 웨슬리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웨슬리의 권면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생애를 둘로 나누었다. 전반부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자수성가의 사업가로서 살아가며 돈을 버는 삶이고, 후반부는 그렇게 번 돈을 푸는 책임 있는 자선 사업가의 삶이다. 이러한 카네기의 생각은 그의 책 『부의 복음』(1889)에 잘 드러난다. 카네기 역시 신앙, 사업적 성공과 축재, 자선 등이 원환운동을 하는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 신화는 성공과 번영을 칭송하는 설교의 기본 프레임을 이룬다. 그 신화에서 카네기의 냉혹하고 계급적 적의에 가득 찬 경영방식은 가려진다.

번영신학의 발전과 오늘의 모습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하고 사업의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번영신학의 메시지는 미국 주류 문화의 프레임을 이루는 프론티어 정신과 낙관주의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자기 힘으로 삶을 개척하여야 한다는 자조 의식이 강한 편이고, 20세기 초 이래로 미국은 급속한 성장 국면에서 졸부가 속속 탄생하고 소득이 크게 증가하는 등 낙관주의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번영신학은 미국 주류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공과 번영을 인정해 주는 환영할 만한 신학이 되었다.

번영신학은 주류 사회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호소력을 가졌다. 이미 제25회 연재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미국은 주류 사회에서 배제되고 착취당하는 ‘쓰레기들’(Nancy Isenberg)을 양산하는 차가운 사회이기도 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공업화와 도시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쓰레기’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자수성가를 시도하여야 하는 개개인들은 불안에 휩쓸리고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번영신학의 메시지는 그들을 사로잡았다. 하나님을 믿으면 성공과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에 그치지 않고 그럴싸한 성공 지침들까지 제공하는 번영신학 설교자들은 성공과 번영을 꿈꾸는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그들에게 록펠러와 카네기는 쉽게 넘볼 수 없는 신화의 주인공들이었지만, 그들은 록펠러와 카네기가 신화 속에서 걸어간 성공과 번영의 길을 기꺼이 따라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1929년의 대공황으로 치달아가는 미국 사회에서 번영신학은 ‘쓰레기’로 전락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정작 어떤 짓을 한 것일까? 가장 자본주의적인 미국 사회에서 번영신학 설교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 속한 개인의 성공과 번영이 구현될 수 있는 가능성 조건들에 대해서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그러한 고려를 한 적이 없는 번영신학은 1929년 대공황과 그 이후에 뉴딜 정책에 따라 진행된 사회적 미국의 건설 과정에서 존재감을 잃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적 패권 국가가 된 미국이 전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1960년대에 로버트 슐러 목사(Rev. Robert Harold Schuller)의 『적극적 사고방식』(Go ahead with Possibility Thinking, 1967)과 더불어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슐러는 개개인이 자존감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역설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써 속량받은 사람은 존귀한 존재라고 선언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서 적극적으로 삶과 일에 임하면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했다. 슐러는 이 단순한 메시지로 세속적 성공과 번영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로 막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타파하여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고, 공연히 죄의식을 앞세워 인간을 위축시키는 신학이 있다면 그 신학도 버려야 한다고 외쳤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광범위하게 유포시키기 위해 텔레비전 설교를 시도하였고,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메시지를 듣고 구름떼처럼 몰려든 사람들을 중심으로 슐러는 크리스탈 대성전(Crystal Cathedral)을 건립하여 메가처치(mega-church)의 시대를 열었다. 슐러의 뒤를 이어 번영신학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텔레비전 선교와 메가처치 운동에 나선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것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국의 전성기에 새로운 버전을 갖춘 번영신학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성공과 번영을 구가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의 증거를 받았다고 공언했다. 실패와 몰락은 번영신학에서 하나님의 부재와 저주를 시사하는 극히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번영신학은 그러한 메시지를 갖고서 자본주의 사회의 운영원리로 인해 성공과 번영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힘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과 번영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만들었다.

새로운 버전의 번영신학이 태동한 시기에 미국 경제는 구조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경기침체 속의 인플레이션(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극히 해결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1971년 달러 태환제가 폐지된 상황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이 날로 악화되자 미국은 금융 자유화와 지구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 경제는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근본적인 변화의 길을 걸었다. 미국 사회는 극도로 양극화되고, 승자독식의 사회가 되었다. ‘20 대 80의 사회’는 벌써 옛말이고, 이제는 ‘1 대 99의 사회’가 도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누구든 자존감을 갖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살면 성공과 번영에 이를 수 있다는 번영신학의 약속이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상식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번영신학의 사회경제적 근거가 사라졌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번영신학은 오늘의 미국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것은 번영신학이 사회적 패자로 전락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성공 강박을 숙주로 해서 연명하는 기생적인 신학이기 때문이다.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금융공황이 터졌을 때 번영신학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교회들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실업에 대한 공포와 재취업에 대한 근심이 번영신학의 오래된 신화를 불러냈기 때문이다. 그 신화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분의 현존과 능력 가운데서 실패하지 않고 성공할 것이라는 주문이 효과를 발휘하리라는 기대 때문에 유지된다. 오늘의 미국 사회에서 번영신학이 여전히 담론적 효과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번영신학 담론의 폐기

우리나라 교계에서는 번영신학에 관련된 책들과 미디어 자료들이 차고 넘치지만, 번영신학의 성서학적 문제들과 신학적 문제들을 지적하는 글들은 별로 없다. 드물기는 하지만, 성서학자들은 번영신학이 성공과 번영이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의 증거라고 주장하려고 특정한 성서 구절들을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그 구절들을 맥락에 상관없이 견강부회로 해석한다고 비판한다.(3) 번영신학의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는 사람들이 문자주의적 해석을 고집하고, 그들이 미리 설정한 성공과 번영의 담론 프레임에 성서 구절들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기에 성서학자들은 그러한 성서 해석의 문제를 지적해 보았자 번영신학자들의 편향을 시정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교의학자들은 번영신학이 중세의 영광의 신학의 연장선상에 있고,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십자가의 신학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창조, 타락, 죄와 속죄, 성령의 역사, 구원, 종말 등에 관한 교리적 해석과 이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하기도 한다.(4) 번영신학에 대한 교의학적 비판이 드문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과 번영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담론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의 천박성이 너무 두드러져서 번영신학자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성서학자들과 교의학자들이 번영신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지적한 사항들을 일단 염두에 두고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번영신학에 대해 네 가지를 말하고 싶다. 그것은 앞에서 필자가 번영신학의 탄생 맥락과 발전 과정을 분석하면서 비판적으로 언급한 내용들을 더 확대하고 심화시킨 것이고, 논리적으로 더 첨예화한 것이다.

첫째, 번영신학은 성공과 번영의 핵심을 이루는 부와 권력과 명예를 별개의 가치로 독립시켜 그 가치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절대화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번영신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와 가난, 권력을 가진 자들과 그들의 자의적 지배에 희생당하는 사람들, 명예 프레임의 안과 밖을 서로 연관시켜서 전체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한 번영신학은 소수가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독차지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득권 구조를 정당화하고 이를 공고하게 구축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성공과 번영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취한 사람들이 착취와 수탈, 배제와 차별, 주변화가 일상화되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들을 바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든다. 기독교 경제윤리는 사물들과 사람들의 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왜곡되고 깨뜨려진 관계들을 바로 펴는 데 관심을 갖지 않는 번영신학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관계를 사유하고 일그러지고 깨어진 관계를 바른 관계로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 경제윤리가 추구하는 정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둘째, 번영신학이 개인을 성공과 번영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개인이 권리와 의무의 주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개인의 성공과 번영은 그 개인이 속한 사회 전체의 업적이다. 사회는 역사적으로 이룩한 업적을 계승하고 사회경제적 인프라, 문화적 인프라, 정치적 인프라 등등에 바탕을 두고 사회적 분업과 협력을 조직한다. 개인의 성취는 오직 그러한 사회적 업적을 매개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번영신학은 논리적으로 개인을 원자화하고, 그 원자화된 개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 아래서 성공과 번영을 누릴 수 있기나 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러한 청맹과니 신학은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사회를 정상적인 사회로 옹호하고, 사회적 패자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결과를 빚는다.

기독교 경제윤리는 참여의 원칙에 입각하여 이러한 번영신학을 단호하게 거부하여야 한다. 원자화된 개인의 성공과 번영이 문제가 아니고, 한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고 공동체가 그 권리의 실현을 보장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사회적 패자에 대해 사회가 나서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개인의 발전과 공동체의 발전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은 사회가 개개인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도록 사회를 제도적으로 규율하는 과정에 참여해서 함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개인의 발전과 공동체의 발전이 함께 간다.

셋째, 번영신학이 성공과 번영의 목적인 양 강조하는 자선은 성공과 번영을 구가하는 사람들에게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효과를 빚어낸다. 자선을 미화하는 번영신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축재를 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부패와 투기, 성공과 번영에 이르는 과정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계급적, 인종적, 젠더적 적대와 치별을 자선의 이름으로 덮으려고 하고, 심지어 그것을 소명에 따르는 정상적인 행위인 양 두둔하려고 한다. 자선의 아주 고약한 측면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비루하게 만들고, 사회적 패자를 위한 공동체의 책임을 제도화하는 일을 지체시킨다는 데서 엿볼 수 있다. 번영신학과 자선문화가 발달한 미국이 사회국가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참여와 연대를 중시하는 기독교 경제윤리는 신앙과 성공과 자선의 원환운동에 빠져 있는 번영신학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에 이를 거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넷째, 번영신학의 담론에는 지극히 작은 자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무신적인 세력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는 고백이 설 자리가 없다. 십자가를 승리와 기쁨의 축제로 소비하고자 하는 번영신학은 하나님이 지극히 작은 자들 편에 서고 그들을 억압과 수탈과 배제와 차별로부터 건져냄으로써 그분의 정의를 드러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고, 하나님의 정의를 파괴하는 세력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정의로운 하나님이 부와 권력의 화신이었던 파라오의 축적 체제를 거부하고,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되 재화의 축적을 허락하지 않는 만나의 경제로 히브리인들을 훈련시켜서 마침내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과 히브리인들이 계약을 맺고 자유의 율법에 따라 공동체를 규율하기로 하였다는 것을 번영신학은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이 출애굽 공동체에 허락한 복의 핵심이었는데 말이다. 예수가 로마 제국 한복판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강제노동과 세금과 지대로부터 해방된 안식을 약속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했다는 것도 번영신학은 외면한다. 그렇기에 기독교 경제윤리는 정의의 원칙에 따라 번영신학을 수용할 수 없는 신학이라고 단정해야 한다.

맺음말

앞에서 분석하고 평가한 바와 같이, 번영신학은 기독교인들을 자본주의적 성공과 번영의 환상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교회가 자본주의의 논리에 동조하게 만든다. 이러한 번영신학은,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수용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마땅히 거부되고 타기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번영신학은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성공과 번영에 이르는 사람들이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 패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번영신학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과 번영을 이룬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여서 그렇게 되었다고 교만하게 행세하도록 하기 때문이고, 성공과 번영의 경계 바깥에서 성공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적 성공과 번영의 환상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만과 강박이 빚어지는 사회 구조를 타파하지 않는 한, 번영신학은 사멸하지 않을 것이다. 번영신학자들에게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들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신학을 수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 문제들을 해결하여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지탱될 수 없는 번영신학이 더 이상 발호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미주

(미주 1) John Todd, “The Foundations of Success,” Boston Guide to Health, and Journal of Arts and Sciences 22/1(1843), 342.
(미주 2) William Howard Van Doren, Mercantile morals(New York: Scribner, 1857)
(미주 3) 1995년에 ‘번영신학과 고통의 신학’을 주제로 열린 한국복음주의신학회와 세계복음주의협의회 신학위원회가 개최한 컨퍼런스에서 이 점이 명확하게 지적된 것은 의미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W. W. 개스끄, “번영신학과 신약성경,” 『성경과신학』 17(1995), 56. 개스끄는 번영신학이 “기껏해야 아주 편파적인 복음이고, 최악의 상황에서는 바울이 ‘다른 복음’이라고 불렀던 것”이라고 혹평했다.
(미주 4) 필자는 다음의 두 편의 논문에 주목한다. 김영한, “영광신학의 설교와 십자가 신학의 설교: 오늘날 번영주의 설교비판,” 『한국개혁신학』 26(2009), 8-38; 류장현, “번영신학에 대한 신학적 비판,” 『신학논단』 61(2010), 7-30.

강원돈 교수(한신대 신학부/사회윤리와 민중신학)  wdkang55@h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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