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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괘(八卦)를 통해서 본 주역『다석 강의』 12강 풀이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9.11.05 18:28

지난 장에서 뭔가 미진한 것이 있었든지 다석은 재차 『주역』을 설명했다. 앞서처럼 팔괘를 갖고서 『주역』의 뜻풀이를 시도한 것이다. 앞장의 글이 1956년 11월  19일에 쓰여 졌고 이 글은 같은 달 30일에 『다석 일지』에 수록되었으니 10여일 편차를 둔 셈이다. 지난 11강보다는 좀 더 간결하게 문왕팔괘를 도식화했다. 이 글에서 표를 그릴 수 없어 많이 아쉬우나 글로써 표가 함축하는 바를 설명하겠다. 다석은 여기에 ‘文王八卦 任次表’라 이름 붙였다.

< 1 >

언제나 그랬듯이 다석은 ‘세상에 믿을 것은 말씀뿐’이라 했다. 세상을 옳고 바르게 보려면 말씀을 통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이 바로 계시란 말이다. 이 계시를 담은 것이 바로 동서양의 경전(經典)이다. 이를 선생은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아니 될 ‘정신 줄’이라 했다.

본래 경(經)자는 ‘줄기 경’을 뜻한다. 선생에게 『주역』은 『성경』만큼이나 인류를 위한 정신 줄이었다. 그럴수록 『주역』을 점치는 미신으로 만든 오독의 역사를 비판했다. 본래 경전은 읽는 사람을 힘 있게 하여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도록 한다. 괘사를 부린다는 것이 그 뜻이다.

하지만 중심, 본뜻에서 이탈했으니 『주역』이 홀대를 받는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 『성경』만이 절대적 계시로 여겨지는 탓에 『주역』은 점차 옛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럼에도 다석은 『주역』을 복음이라 여겼다. 이 책 역시 인생에서 ‘참’을 말하는 까닭이다. 인류전체를 평등과 자유로 이끄는 궁신지화(窮神知化)하는 길이 이 속에 있다. 서구가 범주화 시킨 유신론 혹은 무신론이란 것도 그에겐 우상으로 보였다.

< 2 >

지난 장에서도 언급했듯이 만물의 이치는 불역(不易), 변역(變易) 그리고 교역(交易)의 세 모습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이 변하나 ‘참’(진리)은 변할 수 없다. 그래서 불역이다. 여기서의 참은 정(正)의 ‘참’을 말한다. 하늘과 땅이 바로 잡히는 것, 그것을 참이자 절대라 여기는 것이다. 우리들 정신이 이것을 붙잡지 못하면 결코 ‘본디’를 알 수 없다. 정신 줄을 붙잡고 가다보면 바로 잡히는 것이 있다.

기독교가 말하는 의(義)의 최후 승리란 말도 이 뜻이다. 어느 경우든 정신 줄을 놓지 않겠다는 말이다. ‘귀신이 사람을 먹고 산다’는 좋지 않은 옛말이 있다. 사람이 무엇의 먹이가 되는 경우가 흔치 않다. 하지만 종종 정신 줄 놓고 사는 사람을 귀신이 제물 삼는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그를 귀신에게 잡아먹혀도 좋을 사람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귀신의 밥이 될 수 없는 존재다. 향(香)이 타오르듯 생각을 키워 위(上)로 올라야 할 존재인 탓이다. 이것이 하느님께 바치는 산제사, 예배의 본뜻이다. 과거에는 소나 양을 잡아 희생 제물로 바쳤으나 이제는 자신을 바쳐야 할 때가 되었다. 자기 몸(욕망)을 줄여 마음을 키우는 것이 바로 하늘에 드리는 예배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줄이는 것이 십자가라면 늘려 키우는 것이 그에게 부활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자주 변역(變易)을 시도했다. 바뀔 수 없는 것을 바꿔 보겠다고 꾀를 부린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이로써 변할 수 없는 정(正), 참이 변질되었다. 변역의 도상에서 정(正)이 실종된 탓이다. 이처럼 변역은 우리의 목표, 목적을 어긋나게 만들어 왔다.

이보다 더 일상적인 것은 교역(交易)이다.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준만큼 받고 받은 만큼 주는 일상적 행위가 교역에 해당된다. 장사의 원리라 말해도 좋다. 하지만 남의 것 탐내고 더 큰 이익 얻고자 하니 교역의 본뜻도 사라져 버렸다.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자신 것을 남주고 남의 것을 자기 것 삼는 호혜(互惠)의 정신이 교역의 본질이니 말이다.

이런 호혜의 정신은 사실 정(正)에 가깝다. 이익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으면 교역은 참과 다름없다. 유무상통의 삶을 만들 수 있는 까닭이다. 이를 어기고 이익에 마음을 빼앗기면 변역이 된다. 그러다가도 다시 정신 줄을 잡으면 교역의 길을 찾게 되고 그로써 참(正)을 얻을 수 있다. 불역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겠다.

이 과정을 일컬어 다석은 정반합(正反合)으로 풀었다. 일상적 삶의 상태인 교역(正)이 변역(反)으로 변질되다가 다시 불역(合)의 길로 들어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변증법을 다석은 진리라 일컬었다. 참을 붙잡는 과정에서 인간은 변역의 길로 빠져들고 그러다가 다시 불역의 길로 마음을 향하는 존재인 까닭이다. 이런 정반합 전체의 과정을 다석은 역(易)이라 했고 이 과정을 다시 팔괘를 통해 설명했다.

< 3 >

10강에서 보았듯이 다석은 팔괘를 ‘ᄆᆞᆷ, 눈, 불, 울, 발, 물, 임, 몸’이라는 순수 우리글로 다시 풀었다. 본래는 건천(乾天, 하늘), 태택(兌澤, 연못), 리화(離火, 불), 진뢰(震雷, 우박), 손풍(巽風, 바람), 감수(坎水, 물), 간산(艮山, 산), 곤지(坤地, 땅)였던 것이다. 여기서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乾坤은 부모이고 陽 셋, 陰 셋은 아들과 딸로서 각기 震(우뢰), 坎(물), 艮(산)과 巽(바람), 離(불), 兌(연못)를 일컫는다.

『주역』의 괘는 보통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간다. 아래 효(爻)가 양인 것이 큰아들 震(우뢰)이고 가운데 효가 양인 것이 坎(물)이며 그리고 맨 윗 효가 양인 것이 艮(바람)이다. 다석은 이를 효의 위치에 따라 진하련(震下連), 감중련(坎中連), 간상련(艮上連)으로 읽었다. 마찬가지로 아래 효가 음인 것이 巽(바람), 중간 효가 음인 것이 離(불), 그리고 맨 윗 효가 음인 것이 兌(연못)이다. 이를 일컬어 손하절(巽下絶), 이허중(離虛中), 태상절(兌上絶)이라 했다. 따라서 ᄆᆞᆷ/몸은 乾/坤, 눈/불/울은 震/坎/艮 그리고 발/물/임은 巽/離/兌와 짝하는 개념이 되었다.

이를 근거로 다석은 정(正), 참을 위해 사는 사람은 효가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듯 위로 올라서야 할 것을 강조했다. 여기서 아래 첫 효가 양인 우레(震)는 큰아들로서 영원한 길로 나서는 인간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성서에서 예수가 제자들 중 몇몇(요한과 야고보)을 ‘우레의 아들’이라 부른 것도 이런 뜻으로 이해했다.

이에 더해 다석은 예수를 하느님의 맏아들, 곧 ‘우레’(震)라 하였다. 하느님의 길로 나선 그의 첫 사람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는 하느님과 예수의 본질일치를 말했던 서구 신학과 크게 변별된다. 예수처럼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그처럼 되기를 원하는 이가 세상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장자(長子)로서 세상의 화평과 안녕을 위해 울부짖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석은 이런 예수를 자신의 스승이라 여겼다. 맏아들이 아버지를 잇는 존재라는 것이 이 땅의 보편적 인식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물(坎)은 중간 효가 양인 것으로서 진리를 찾아 더욱 깊게 파고든다는 의미라 했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 장지를 붙이면 원이 생긴다. 그 원을 가운데 위치한 陽의 효(爻)와 일치시켰다. 이를 뜻 찾는 구도적 행위라 여긴 것이다.

마지막 간(艮)은 맨 위 효가 양인 것으로서 산을 적시한다. 하늘의 막내아들을 산이라 본 것이다. 산은 세상으로부터 보면 끝자락에 있다. 꼭대기 까지 올라가서 자기 삶을 그치는 것이 바로 간상련(艮上連)이다.

손(巽)은 바람을 뜻하며 하단이 음효(陰爻)로 되었다. 이 경우 손은 겸손할 손으로서 맏딸을 의미한다. 손해 본다는 뜻과도 상통하기에 불길하게 여긴다. 이삿날을 정할 때 손 없는 날을 택하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결국 손은 여성을 대표하는 것인바, 이를 불길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 시대에서는 많이 어색하다.

리(離)는 불로서 음효가 가운데 자리했다. 빛남이라는 뜻을 지녔는데 불이 화려한 탓이겠다. 떠날 ‘리’의 의미도 품었다. 가운데 딸이 여기에 해당하는 바, 매우 똑똑하여 출가(出家)할 시, 뒤도 안돌아보고 떠날 수 있는 존재다.

마지막으로 태(兌)는 바다 혹은 연못을 적시하는 것으로 가장 높은 곳에 음효가 있다. 여기서 태는 막내딸로서 가정에 기쁨을 주는 업둥이라 할 것이다. 이상에서처럼 주역은 옛 가족주의 철학에 바탕 했다. 그런 이유로 가부장적 요소가 없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도 본질은 자유와 평등임이 틀림없다. 정반합의 과정에서 누구라도 위로 오를 수 있는 까닭이다.

< 4 >

이어서 다석은 문왕 팔괘를 순수 우리글로 바꾸어서 다시 그 뜻을 새겼다. 우선 양의 효를 중시하는 4괘, 건(乾), 진(震), 감(坎), 간(艮)을 ᄆᆞᆷ, 울, 물, 임으로 풀었다. 다석은 ᄆᆞᆷ이 울 이유를 비워 놓으라 했다. 여기서 비운다는 말은 ‘참’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운다는 말은 추구한다는 뜻이겠다. 마음이 추구하는 바를 줄 곧 따르라는 말이다. 변역이 지배하는 상대세계에 만족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에 이르기까지 그리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석은 우는 ᄆᆞᆷ, 즉 갈급한 마음, 곧 하늘을 우리들 이마에 이으라고 했다. 이마란 인간 정면에 위치한 것으로서 자신을 대표한다. ᄆᆞᆷ의 울음을 이마에 이고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길이자 정(正)에 합당한 삶이다.

이어서 다석은 음의 효 넷, 곤(坤), 손(巽), 이(離). 태(兌)를 몸, 발, 불, 눈이라 하였다. 내 발로 내가 나가는 것이 땅에서 몸의 하는 일이다. 내가 땅을 발로 밟아야 내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몸의 한 끝인 발이 밟는 것은 자신의 ᄆᆞᆷ이다. 이렇듯 발이 나가는 과정에서 눈(정신)은 일체를 밝혀 옳게 보게 한다. 발로 하여금 밟을 것을 잘 밟아서, 자기 ᄆᆞᆷ까지 밟아서 자신을 밝게 만들라 하였다. 모든 것을 밟되, 자기 몸을 먼저 발로 밟아서 ᄆᆞᆷ에 이르라는 것이다.

그렇고 보면 양의 괘 넷은 인생의 목표를, 음의 괘 넷은 그에 이르는 방법(식)을 말하는 것이겠다. 한마디로 이것은 다석 나름의 괘사라 할 것이다. 팔괘를 갖고 삶을 논하는 다석의 방식인 셈이다. 불역의 정(正)을 찾기 위해 인간은 울어야 하고 자신의 발로 몸을 밟아 그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말했듯이 ‘몸 줄여 마음 늘리는’ 과정이며 이를 기독교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이라 한다.

< 5 >

다석은 이런 역(易)사상의 핵심을 ‘무사야(無思也), 무위야(無爲也)’, 곧 ‘생각하는 것이 없고 하는 것이 없다’는 말로 풀었다. 여기서 생각은 잔꾀 부리는 일을 일컫는다. 남을 속이는 거짓이 없다는 말이겠다. 이런 행위를 하지 않는 것 역시 역의 본질이다. 이를 ‘사무사(思無思), 위무위(爲無爲)’. 즉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 억지로 하지 않고 자연스레 되게 하는 것이라 달리 말할 수 있다. 이는 ‘사무사’(思無邪), 마음에 사특한 것을 품지 말라는 말과 ’무위‘(無爲), 아무 것도 하지 않되 이루지 못함이 없다는 노자의 가르침과도 흡사하다.

그렇기에 다석은 거듭 팔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ᄆᆞᆷ, 울, 물, 임, 몸, 발, 불, 눈’을 갖고서 자신만의 괘사를 역설한 것이다. 그 뜻을 다시 적어본다. ‘우리 ᄆᆞᆷ이 크게 울고 있다. 이 울부짖음을 우리들 이마로 받아내야 한다. 몸을 밟을 눈을 갖고서 몸 세계를 뚫고 하늘로 오를 것’을 권하고 있다.

다석은 양과 음을 ‘븨’(허공)와 ‘몬’(物)이라 불렀고 이를 다시 ‘없음’과 ‘있음’이라 하였다. 없는 것, 허공이 참이고 있는 것은 거짓이란 것이다. 앞의 것은 한량없이 크나 나중 것은 자꾸 쪼개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인간의 오감을 갖고 알 수 있는 것은 적다. 그것으로 정신이 알려질 수 없는 탓이다. 지금 있다(몬)는 것은 자기 홀로 알뿐이다. 모으고 그것에 매이는 삶을 정신활동이라 말할 수 없다.

옛 우리말에 ‘업은 아이 3년 찾는다.’란 말이 있다. 아이를 등에 없고 그를 긴 세월 찾았다는 것이다. 이는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소(마음)를 자기 밖에서 찾았다는 선불교의 ‘십우도(十牛圖)’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뒤쪽에 있어 안보이니 없는 줄 알았던 것이다. 앞에 있었다면 당연히 알았을 아이를 말이다. 그렇기에 없다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안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우리 인간은 불역을 ‘ᄆᆞᆷ’에 받고 변역을 ‘몸’에 받았다. 몸으로 느끼는 변동이 너무 크고 심하기에 변역은 이기는 정신의 힘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한 것이 바로 신앙(信仰)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바, ‘나갈 만큼 나간 말’이다. 이를 갖고서 상대세계를 깨트려야 절대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이 팔괘의 가르침이다. 불역만이 참이나 이를 쉽사리 얻지 못한 인간을 위로 추동하는 하늘의 소리라 믿어도 좋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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