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예수, 바울 그리고 니체도덕의 혁명 (2)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19.11.13 22:08

문: 그렇다면 예수께서 의도하셨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넘어서는 “보다 나은 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답: 그것은 대담성과 영향력을 무한히 넓힌 혁명이다. 그것들의 의미는 간단하다. 즉 새로운 정의는 율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의는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거룩하시며 선하신 분으로부터 나오는 삶이며 그의 명령은 한계가 없다. 그것은 끝이 없고 무조건적인 것이다. 그의 명령은 하나님의 완전함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과 양심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모든 교만과 모든 자기 의를 내어 쫓지만 자포자기에까지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은 아버지의 은혜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 계속 주어지는 은혜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 한 분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전체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며, 율법처럼 자잘한 함정에 빠져서 소실되지 않는다. 이와 함께 위선의 원천도 허물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율법적으로는 결코 완수할 수 없는 선행의 무한성이 오히려 우리의 영혼 속에서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명령들을 수행한 후 우리는 무익한 종들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참고, 누가복음 17장 10절). 이런 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유래한 율법은 짐이 아니라 기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하신 분이요, 선하신 분인 하나님의 생명의 샘에서 자유롭게 위한 것이요, 하나님 나라의 선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 이상 부자유한 강제적 의무가 아니라 자유로운 의무(freies Mssen)요, 허락이며 가능성이다. 그것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직접 속해 있는 것이다(reichsunmittelbar). 그것은 종교적, 도덕적 법전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통해서 순간적으로 요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처럼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 선한 것으로 작용하며 또 그 원천을 지시한다. 그것은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단지 하나님과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획일적인 것을 돌파한다.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가복음 2장 27-28절). 인자는 어떤 전통에도 그 전통이 아무리 거룩하다 할지라도 예속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지금 계시며 과거에도 계셨고, 또 오시는 하나님이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오고 계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도그마나 신학체계는 말할 것도 없고 성서 자귀에도 얽매이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성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교과서이다. 종교는 얽어매고 압제하지만 하나님은 자유롭게 하신다.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고린도후서 3장 17절). 요약하면 새로운 정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유와 영광 속에 살아가는 삶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삶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지향한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율법의 냉혹함에 깨고 들어가는 것은 뜻하며 인간이 율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인간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방향 설정은 폭력과 일제 국가나 절대 국가에 대항한다. 하나님은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돌봐준다.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진리, 자유, 평등 그리고 형제애가 퍼져나가게 하신다. 자유주의(Liberalismus).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이 모든 것들을 올바로 이해한다며-는 바로 그러한 빛을 반사하는 것들이다. 인간상호 간에 교제의 의미와 목적도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와 영광에 있는 것이다. 율법으로서의 종교는 자주 압제의 도구로 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자유를 가져온다. 이것은 부족한 설명이겠지만, 새로운 더 나온 의이다.

문: 그것과 더불어 이제 율법은 해체되었는가?

답: 아니다. 그것은 완성되었다.

문: 그렇지만 해체된 것이 또한 사실 아닌가?

답: 율법은 해체됨으로써 완성되었고, 완성됨으로써 해체된 것이다. 예수는 중요한 규준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하는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율법의 가장 적은 것도 그저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폐지하는 사람은 정의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될 것이다. 단지 완성을 통해서 해체시킨 그러한 성취자들만이 큰 자가 될 것이다. 모든 혁명과 혁명가들은 이 척도로써 그들의 가치에 따라 평가되어져야만 한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진지한 선의 추구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거의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추구는 더욱 끝없이 있고, 또 그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훨씬 능가하는 다른 형태의 열심이다. 옛 것을 성취하기 원하고 또 성취할 수 있는 사람만이 새로운 것을 하고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옛 것도 그 나름의 정당성이 있기 때문이다. 전통은 경외심을 요구할 이유가 있다. 이점을 깊이 느낀 사람만이 낡아버린 옛 것의 필연적인 연속인 새 것을 요구할 수 있다. 단지 영혼의 두려움과 곤경에서 전통과 싸웠던 사람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바로 그와 같이 하셨고, 바울도, 루터도, 쯔빙글리, 칼빈 그밖에 다른 사람들도 바로 그와 같이 한 것이었다. 가장 보수적인 사람만이 가장 급진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가장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 사람은 가장 뒤로 와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본 질서이다.

문: 그렇다면 새로운 정의는 주로 보수적인 것이란 말인가?

답; 새로운 정의는 아무튼 매우 혁명적인 것이다. “옛 사람에게 말해졌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이 문구가 그러한 특성을 표현한다. 이것은 전대미문의 혁명적인 말씀이다. 누가 “옛 사람”들인지 생각해 보라!

문: 도대체 누군가?

답: 그것은 바로 모세와 권위 있는 모세 주석가들이다. 예수는 자신을 거리낌 없이 그들과 비교한다. 즉 “옛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것을 말했으나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통과 맞선다. 모세나 성서나 교회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모든 굴레의 영원한 파괴자이시다.

문: 하지만 예수는 바로 그리스도로서 그런 권위를 갖고 있지 않았는가? 우리도 그런 권위가 있는가?

답: 우리는 그 분과 하나인 한에서 우리도 그런 권위를 가지고 있다. 즉 내가 뜻하는 바는 우리가 그의 참된 제자요, 하나님 나라의 참된 자녀들인 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문: 이것은 율법을 해체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답: 그렇다. 하지만 율법의 성취로서 해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질서가 자유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유이며 단지 그 분의 자유가 주어진 것뿐이지 악마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취로써의 해체이다. 어디서나 그렇다.

문: 모든 율법은 성취된 것으로써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가?

답: 언제 율법이 완전히 성취되었는가? 모든 율법은 언제나 우리 눈앞에서 완성을 재촉하는 독촉자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율법은 하나님의 기본 질서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사로서의 자기의미를 지닌다. 율법은 우리가 이 질서를 위반했을 때 심판관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율법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제시된 최소한의 요구를 지시하는 말하자면 지침으로써 늘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요구의 상한선이 아니라 하한선이다. 즉 율법은 출발점이지 종착점이 아니다. 이것을 잇고자 하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다! 다만 위에 계신 하나님과 아래에 있는 악마만이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악마는 그가 바로 율법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율법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문: 모든 율법이 율법의 개별조항들과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결국은 최소한의 지침인가? 이것이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도 지니라는 일점일획도 지키라는 예수의 말씀의 의미인가?

답: 물론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분명히 율법의 거룩한 기본 뜻을 의미하신 것뿐이고 이것을 일점일획이라는 그분 자신의 역설적인 표현법으로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한 의미란 작은 것 안에 있는 것이므로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율법을 해체함으로써 성취하고, 성취함으로써 해체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문: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즉 율법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한편으로는 바울의 율법관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니체의 율법관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유사성이나 그 외에 어떤 차이점은 없는가?

답: 니체부터 이야기해 보자. 니체와 관련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예수께서 율법에 대해서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을 니체는 크게 오해했다는 것이다. 예수 역시 도덕과 대항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도덕에 대항했으나 니체는 자연을 중시하는 견지에서 도덕에 대항한 것이다. 예수는 율법의 완성자인 반면에 니체는 어쨌든 두드러진 율법의 파괴자이다. 예수는 선의 완전한 승리를 뜻하는 산악의 피안으로 인도하는 반면 니체는 선악의 차이를 폐지하는 선악의 피안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니체는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회상케 하는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남아있다.

바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의 율법에 대한 투쟁은 예수의 투쟁의 연속이며 예수와 같은 의미에서 행해진 것이다. 바울도 율법과 도덕을 넘어섰지만 율법의 기초 위에서, 율법의 완성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여기에 바울과 니체의 차이가 있다.

문: 바울과 예수는 차이가 없는가?

답: 천만에, 바울은 예수와도 차이가 있다. 두 가지 본질적인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로 바울은 일방적이며 신학적이고 조직적인 것에 깊이 빠져 있어 인위적이고 꾸며진 것에 근접해 있는 반면, 예수는 더할 나위 없는 단순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율법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서 흘러나오는 단순하고 불가항력적인 삶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투장에 있어서 바울 역시 예수를 지시하는 사람이 될 수는 있어도 예수를 대신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예수의 투쟁은 이점에서 스승이 제자보다 나은 것처럼 바울의 투쟁보다 더 중요하고 강력한 것이다. 아무튼 산상설교를 로마서보다 하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이런 경쟁이 생기게 된다면 로마서는 산상설교에 종속되어야 한다.

문: 우리는 어디에선가 총괄적으로 율법의 거룩한 근본취지를 알 수 있을까?

답: 물론이다. 만약에 우리가 십계명을 깊이, 포괄적으로 충분히 이해한다면-당연히 그래야 하지만-십계명에서, 율법학자들을 통한 십계명의 해설이 아니라 십계명 자체에서, 율법의 근본 취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다.

문: 십계명도 역시 율법인가?

답: 십계명은 참된 의미에서 율법이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인간의 명령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예수께서 투쟁한 그런 의미에서의 율법이 아니라 살아있는 의미에서의 율법이다. 예수는 율법이 인간의 규정으로 머무를 때 그것과 싸운 것이지 하나님의 명령으로써의 율법이라는 점에서 싸우지 않으셨다. (이것에 대해서는 저자, 레온하르트 라가츠의 저서 “하나님의 법”에서 십계명에 대한 짧은 해설을 참조하기 바란다.)

문: 십계명과 산상설교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답: 산상설교는 십계명의 성취요, 단지 십계명의 성취라는 점에서 그것의 해체이다.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