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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3: 배를 돌려라!(신 26:4-15; 약 2:14-26; 마 25:31-46)추수감사주일/창조절 열둘째 주일(11.17)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11.15 19:44

1.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전반기 감사절이 7월 첫 주 ‘맥추감사주일’이라면, 후반기 감사절인 ‘추수감사주일’은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하며 드리는 감사제이기도 하지만, 한해를 마감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고유의 명절인 추석에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것은 토착화 신학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만, 교회력 절기의 차원에서 보면,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감사절기는 창조절기의 마지막 즈음인 11월 셋째 주에 지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말씀은 첫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말씀을 볼까요?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 26:4-9)

하나님께서 소수로 거류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또한 애굽에서 고통 받고 압제 당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어 가나안 땅을 주셨기에 그 땅 모든 소산물의 첫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 앞에 놓으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첫 열매)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신 26:10-11)

첫 열매(맏물)를 하나님께 가져와 경배한 후, 제사를 주관하는 레위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는 나그네와 함께 즐겁게 음식을 나눠 먹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객은 오늘날 이주민, 난민, 혹은 떠돌이를 말하겠죠? 감사의 예물은 이렇게 쓰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십일조에 관한 말씀이 이어지는데, 그 용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최근 십일조에 관해 부정적인 말들이 많은데, 그 사용처가 성경대로라면, 십일조는 드리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구약의 본문 말씀이 십일조의 의미를 잘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 26:12).”

첫 열매와 마찬가지로, 셋째 해에 드리는 십일조도 제사를 주관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에게 주어 먹고 배부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십일조가 그렇게 쓰여 지고 있습니까? 교회당을 바벨탑처럼 높고, 넓게 지으려고 하지, 동네 주민들, 이웃 사람들을 섬기며 대접하는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자, 그럼 이렇게 첫 열매와 십일조를 사회적 약자들에게 온전히 나눔과 섬김으로 사용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하지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보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신 26:13-15)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젖’은 유목지역을 상징하고, ‘꿀’은 농경지역을 상징합니다. 결국 우리가 거주하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드리는 십일조는 3년마다 드리는 구제용 십일조를 말합니다.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는 십일조입니다(신 14:28-29). 이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쓰고, 다른 목적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복을 내려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무엇일까요? 가나안 농경 시대이기에 3년에 한번 그해의 토지 소산물의 십일조를 말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교인들이 봉헌한 십일조 가운데 매 3년째 십일조 전체를 말하는 것이겠죠? 만약에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3년에 한 번씩 그 해의 십일조를 이웃을 위해 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 한국 교회 전체가 그렇게 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이 뒤집어질 것입니다. 어려운 형제 교회를, 개척 교회의 선교 헌금으로, 또한 사회적 기본소득과 복지 예산으로, 구제로! 집 없는 이들에게 집을, 일자리가 없는 이들에게 일자리 창출 기금으로! 그렇게 되면 정부가 복지 예산으로 쓰는 것보다, 더 의미 있게 우리의 헌금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빛의 역할입니다. 이것이 소금의 사명입니다. 말로만 ‘예수 살기’가 아니라, 우리의 예산을 그렇게 쓸 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 있게 써야만,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배를 돌려라

『배를 돌려라: 대한민국 대전환』 (한티재, 2019)에서 저자인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 배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해야 할 일은 배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배의 속도를 늦추는 것은 해법이 될 수 없다. 이 책은 대한민국이라는 배의 방향을 돌릴 방법을 시민들에게 제안하기 위해 쓴 것이다.”

그렇다면 하승수 공동위원장의 제안은 무엇일까요? ‘3공(공생-공유-공정사회를 위한 밑그림)’이라는 큰 틀의 목표를 위해 ‘3기’를 보장하고, ‘7탈’을 이루자고 합니다. 여기서 3기는 ① 자율선택 기본소득, ② 기본주거, ③ 기본농지·농사·먹거리이며, 7탈은 ① 탈성장, ② 탈지대(post-rent), ③ 탈화석연료·탈핵, ④ 탈토건, ⑤ 탈집중, ⑥ 탈경쟁교육 ⑦탈차별·혐오입니다.

하승수 공동위원장의 말입니다. “소수가 불로소득을 누리는 공멸의 사회가 아닌 공생사회(함께 사는 사회)로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방향을 바꾸자는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살 수가 없으니, 근본적으로 경제·사회·정치시스템을 바꿔보자는 것이다. 소수에게 집중된 부와 권력을 재분배하자는 것이다.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또한 이러한 대전환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사회의 모습은 상식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곧, 모두가 함께 살고(공생), 공동의 것은 공동의 것으로 하며(공유), 남의 것을 빼앗거나 공동의 것을 독식하지 않는(공정)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타락 전 에덴동산, 신약성서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헌금만 제대로 하고 교회 예산을 제대로, 말씀대로 쓰기 만해도 가능합니다.

사실 우리 사회는 ‘계층상승 사다리’가 아니라, ‘든든한 마룻바닥’이 급합니다. 따라서 하승수 공동위원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계층상승의 사다리’를 복원하겠다거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은 진정한 해법이 될 수 없다. ‘계층상승의 사다리’는 이미 끊어질 대로 끊어진 상황이다. 일자리는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끊어진 ‘계층상승의 사다리’가 아니라, ‘든든한 마룻바닥’이다. 지금 필요한 ‘마룻바닥’은 기본소득, 기본주거 같은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에 관해 큰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포스트모던 시대로 접어들며 빅 스토리, 곧 큰 이야기는 무너졌습니다. 작은 이야기, 스몰 스토리만 논의됩니다. 도대체 누가 공정과 정의, 민주와 평화, 자유와 통일, 민족과 민중을 이야기 합니까?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작은 변화나 아이디어의 나열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불평등과 기후위기를 동시에 해결할 큰 그림(빅픽처)이 필요합니다.

하승수 공동위원장의 제안은 구체적이며 현실적입니다. 들어볼까요? “월 150만 원 기본소득, 3주택 이상 소유금지, 제2의 농지개혁, 200조 원으로 공공임대주택 대량공급, 규제개혁위원회 대신 지대철폐위원회 설치, 기획재정부 대신 전환부, 모든 가용재원을 기후위기 예산으로 투입!”

자, 이제 이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가장 단순하고 쉬운 방법은 법을 바꾸고, 경제 체계를 바꾸고, 정치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입법기구인 국회의원들을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상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함이 있어야겠죠? 그저 기도만 하고,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함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 경고 합니다.

3.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4-17)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따라서 야고보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듯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말씀하시고, 친히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아고보도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된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볼까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따라서 야고보 사도는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예를 들어, 행함의 믿음을 이야기 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19-25)

결국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6)”입니다. 그렇다면 그 행함은 어떤 것입니까? 마태복음 본문 말씀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너희 가운데 ‘거류하는 객(신 26:11)’과 고아와 과부(26:12)들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행함의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곧 마지막 날에 영생의 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4.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따라서 마태복음 25장 말씀은 천국 비유입니다. 세 가지 비유가 나오죠? ‘슬기로운 5처녀 비유(25:1-13)’,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비유(25:14-30)’와 오늘 본문 말씀인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마지막 날에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어 모든 민족을 심판하십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그리고 오른쪽에 둔 무리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시고, 왼쪽에 둔 무리들에게는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여보내십니다. 그 이유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실천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에 따라 갈립니다. 함께 말씀을 볼까요?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그러자 의인들이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7-40)

또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마 25:41-43)

그러자 그들도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4-46)

5.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기도 하지만, 창조절기의 마지막입니다. 물론 다음주 한 주가 더 남았지만, 이렇게 우리는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매 순간이 마지막 순간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차별과 혐오로, 그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경제적인 고통으로 사는 것 자체가 투쟁인 사람, 질병과 가슴의 상처로 매일 매일,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열심히 살아야, 겨우 살아진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조금 덜 열심히 살아도, 적어도 인간이 인간답게 존중받는 세상이 아닐까요? 생명이 생명답게 존귀히 여김을 받는 세상이 아닐까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임금은?” “최저임금” 최고임금 받는 분들이 조금만 욕심을 내려놓으면, 다른 세상이 될 것인데,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한 표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늘 당하고만 삽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법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만 눈을 뜨고,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 때에 대한민국의 배를 돌려야 합니다. 배의 속도를 늦추는 것은 해법이 될 수 없습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공생의 길로, 함께 사용하는 공유 경제로, 그리고 공정한 사회로 나갈 수 있도록 교회가 앞장 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리의 감사 예물을 교회 자체의 유익을 위해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섬기는데, 이 지역을 섬기는 데 사용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한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 남부산용호 교회라는 배의 방향을 바꾸는데 우리 모두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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