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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 없는 선택”블라디미르 쿠쉬 조각 「찬반양론 Pros and Cons」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11.15 19:46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이 질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재미도, 감동도 없는, 무의미한 물음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낡음이 무르익으면 운치를 낳고, 낡음을 새롭게 보여주면 예술이 되던가. 먼지만 쌓인 이 물음을 예술로 새겨 넣은 작품이 있다. Vladimir Kush의 조각 「찬반양론 Pros and Cons」이다. Kush는 조각과 회화로 이 질문을 새로이 한다.

▲ Vladimir Kush, 「찬반양론 Pros and Cons」19.5x8x27 inches ⓒU.H.M. Gallery 단해기념관
▲ Vladimir Kush 「찬반양론 Pros and Cons」13x17 inches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칼도, 저울도 없다. 저울질을 통해 한쪽을 택하고 다른 쪽을 단죄하려는 심판의 칼날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양팔이, 온몸이 저울이다. 아니 양팔을 힘껏 들어 올려 수평을 유지한다. 그리고 한쪽 저울에는 달걀이, 다른 저울에는 병아리가 놓여 있다. 서있는 단의 앞과 뒤에는 글귀가 있다. 앞에는 “causa prima”(제1원인), 뒤에는 “quid est veritas”(진리란 무엇인가?) 껍질을 깨고 질문이 태어나고 있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이 낡은 물음은 이 구성 안에서 어떤 의미로 거듭날까?

초등학생들이 방문하면, 이 조각상 앞에서 물어본다.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닭이라고 답하면, 그 닭이 어디에서 오는지 물어본다. 그러면 잠시 생각하고는 달걀이 먼저라고 수정한다. 그러나 다시 달걀이 어디에서 오냐고 물어보면, 갸우뚱하며 “달걀이 먼저인가요?” 대답이라기보다는 자문하는 어투로 답한다.

답 없는 순환 속에 빠져 혼란스러워 할 때쯤, 슬쩍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럼,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러면 닭과 달걀처럼 오락가락하지 않는 편이다. 엄마라고, 아빠라고 단호하게 선택하고 그 선택을 잘 바꾸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부모가 함께 있는 경우, 선택받지 못한 쪽보다 물어보는 사람이 더 어색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면 드디어 마지막 질문을 한다. “그렇구나. 그럼 엄마, 아빠는 너와 동생, 혹은 다른 형제 중에 누구를 더 좋아할까?” 이 질문에는 대부분 대답을 하지 못한다.

선택과 배제의 맥락 속에서 입장이 바뀌면 태도가 바뀐다. 선택하는 자리와 선택당하는 자리, 두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선택하고 배제하는 쪽에서는 상대적으로 결정이 쉬운 편이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과 배제의 대상이 되면 쉬울 수가 없다. 선택과 배제의 대상이 자신과 긴밀하게 연결 돼도 쉬 선택할 수가 없다. 선택의 대상이 익명으로 사물화 되면, 부담은 현저히 감소한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며 함께 지내던 생명이라면, 어찌 한쪽을 택하고 한쪽을 버리기가 쉬울까.

세상에서 없어지면 낫겠다 싶은 질문 중 하나가 그래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다. 아이에게 짓궂은 장난으로 던지는 농담 같은 질문이다. 그러나 이 농담은 은연중에 사랑을 저울질하는 선택의 대상으로 보게 한다. ‘누가 더 잘해주던가, 누구랑 놀아야 더 재미있나….’ 사랑을 어떤 조건에 의해 선택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틀이다. 더 잘해주지 않아도, 더 재미가 없어도 사랑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관점을 가려버리기 쉽다. 둘 다 사랑의 대상이라면,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라, 다만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은 어느 한 쪽도 버릴 수 없다. 비록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한쪽을 택해도 한쪽을 더 사랑해서가 아니다. 다른 쪽에 무심해서, 증오해서가 아니다.

가인과 아벨, 성경에서 처음 등장한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은 아벨을 택하셨고, 가인을 배제하신 상황으로 보인다.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그 상황을 선택과 배제로 해석하기 쉽다. 누구보다 당사자인 가인에게 그렇게 보였다. 버림받았다고 믿은 가인은 결국 인류의 첫 살인, 그것도 형제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물론 형제 살인이라는 구분은 다시 살펴볼 여지가 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이어진 모든 살해가 ‘타인 살인’이던가, 인류의 모든 살인은 ‘형제 살인’이 아닌가.

가인이 하나님의 선택을 다르게 봤다면 어땠을까? 선택의 짝을 배제로 보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선택에는 배제가 없다는 신비를 믿을 수만 있었다면….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서는 분이다. 한 마리를 택하고 나머지를 배제했던가? 아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를 통해 나머지 모든 양을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서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셨다. 그러나 한 사람을 선택함이 모두를 향한 선택이 아니었던가. 그 한 사람을 선택해 모두를 사랑하지 않으셨던가. 십자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르짖는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하신 듯한 냉혹한 침묵, 하나님은 그 침묵 속에서 모두를 택하신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인류를 함께 끌어안으신다. 십자가에서 선택은 배제가 없는 신비다.

블라디미르 쿠쉬의 「찬반양론」 역시 선택의 신비를 보여준다. 서 있는 단 앞쪽에는 “causa prima”(제1원인)가 있고, 뒤에는 “quid est veritas”(진리란 무엇인가?)가 있다. 둘 다 달걀 껍데기가 깨지고 그 속에서 태어나는 생명으로 표현한다. 장난삼아 만지작거리는 지적 유희의 물음이 아니다. 한 세계의 껍질을 깨고 태어난 제1원인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껍질을 깨며 던지는 물음이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진리 위에 굳게 선다. 가장 중요한 원인 위에 선다. 가장 근본적인 물음 위에 선다. 그 궁극적 기준 위에서 온 몸으로 저울질 한다. 그때, 저울이 된 양 팔은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달걀이 더 많다고, 병아리가 더 무겁다고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어느 쪽도 배제하지 않는다. 굳건히 수평을 유지한다.

수평을 유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딛고 서있는 지평을 그 이유이자 근거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수평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이자 이유는 제1원인과 진리물음이다. 제1원인과 진리물음이 흔들리면 서있을 수 없다. 수평을 잡을 수 없다. 제1원인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는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제1원인이, 진리물음이 어느 쪽도 버리지 않는 몸짓의 토대이자 근원임은 분명하다.

‘궁극적 진리를 묻고 그 진리를 의지해 살아갈 때, 어느 쪽도 버리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 모순과 역설을 끌어안는 사랑이 가능하다.’ 쿠쉬가 이 조각상을 통해 말하는 듯하다. 열매를 통해 나무를 알 듯, 수평을 유지하는 결과를 통해 진리를 보여준다. 닭과 달걀을 다 끌어안는 몸짓으로, 수평을 유지하는 온몸으로 말한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닭과 달걀은 둘이 아니(不二)라고, 사랑에게는 결코 둘일 수 없다고. 한쪽을 택하고 한쪽을 버릴 수 없다고.

하나님의 선택에 배제가 없다는 신비와 그대로 공명한다. 제1원인, 모든 존재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신 하나님, 그 궁극적 사랑의 선택에 배제가 어찌 가능한가. 그 사랑이 삶의 뿌리일 때, 어찌 모든 존재를 끌어안는 몸짓이 아닐 수 있는가. 문제는 아벨을 바라보는 가인의 시선이고, 마리아를 바라보는 마르다의 시선이다. ‘선택해! 아벨이야, 나 가인이야? 선택해! 주님 앞에 앉은 마리아야,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나 마르다야?’ 선택과 배제를 전제한 양자택일의 시선에 갇힐 때가 문제다.

가인은 제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제물을 받지 않으심을 자신을 거부하심으로 봤다. 물론 히브리서11장도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나은 제물을 드렸다고 본다. 그래서 아벨의 제물은 수용되고 가인의 제물은 거부되었다고. 잘하면 받아주고 못하면 거부하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거부하셨다고. 거부는 징벌이고 수용은 축복이라는 분별지를 낳을 소지가 있다. 그러나 창세기 4장 본문 어디에도 그런 표현이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고 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침묵 속에 열려있다. 열린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으로만 바라보면,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심으로 가인을 사랑하시는 신비가.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는 어떤가?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한 마르다, 손님 접대 준비로 분주한 마르다는 주님 앞에 앉아만 있는 마리아가 언짢다. 그래서 주님께 볼멘소리를 한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누가 10:40/새번역)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마르다의 기대를 벗어난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누가 10:41,42/새번역)

대비되는 상징으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풀이하곤 한다. 오리게네스는 이를 활동과 관상으로 해석했다. 오늘날도 봉사와 말씀, 행위와 기도 등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리고는 활동보다는 관상이, 봉사보다는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풀어가는 편이다. 관상이 없는 활동, 말씀이 없는 봉사의 위험성을 경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주님께서 정말 한쪽만을 편드셨던가? 주님의 대답은 마르다를 버리고 마리아만을 인정한 선택이 아니다. 마리아가 주님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쪽을 선택했듯이, 마르다가 접대준비를 선택하는 것을 인정해주신다. 그것이 무엇이든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자신만의 중심을 선택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길이 달라도 상관이 없다. 아니 그 사랑 안에서 두 길은 함께 간다.

어려움은 마르다를 지배하던 시선에서 일어난다. 당시 문화에서 여자는 남자의 지배 아래 종속되었고 남자를 섬기는 종에 가깝다.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존엄성을 부여받지 못했다. 당연히 랍비는 여자 제자를 두지 않았다. 마르다는 바로 이런 시대적 가치관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 남자를 헌신적으로 섬기는 여종의 가치를 충실히 이행한다. 그러니 마리아가 곱게 보이겠는가. 어디 여자가 남자처럼, 제자처럼 주님 앞에 앉는가 싶었으리라. 마르다 안에 내재화한 남성중심의 시선에 갇혀 마리아를 정죄하기 쉬웠다.

주님의 대답은 마르다의 편견을 허무신다. 마르다 안에 각인된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벗어난다. 주님의 눈으로 보면, 여자인 마리아도 주님 앞에 앉아도 좋다. 하나님 나라의 사랑으로 보면, 여자도 절대 빼앗기지 않을 자신만의 몫을 택하고 누릴 수 있다. 그렇다고 마르다도 주님 앞에 앉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다 역시 자신만의 몫을 택하고 마음껏 누리면 된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가치관에 부합하기 위한 은밀한 강제로서가 아니다. 자신만의 몫을 자유로이 선택하고 그것을 통해 마음껏 사랑하라는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마르다와 마르아의 길은 양자택일의 대립과 모순일 수 없다. 두 길은 함께 갈 수 있는 사랑의 다양성을 향한다.

물론 남녀평등의 가치관 문제가 이 본문의 중심주제가 아닐 수 있다. 많은 일을 걱정하는 산만한 마음보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이 중심이다. 근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자신이 선택한 일의 본질에 몰입하라는 부르심이 중심이다. 그러나 그 중심을 일깨우는 음성은 남성중심주의의 경계를 허물게 하신다.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편견에서 벗어나게 하는 음성, 자유로이 사랑도록 부르시는 음성이 맥락과 행간에 배어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편파적인 맥락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두 길을 다 인정하시는 주님, 그러나 본문에서는 마리아 쪽으로 기우는 모양새다. 양자택일의 대립은 아니지만, 마르다의 요구를 거절하고 마리아를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이 마리아의 길을 열어주면서 당시의 종교 ․ 문화적 흐름도 거스른다. 마리아를 선택하고 마르다를 거절하는 편파성을 부정할 수 없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현실에서 주님의 사랑은 편파적인 선택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이 역시 마리아를 선택하여 마르다도 안으시는 신비다. 마리아만이 아니라 마르다도 자신의 가장 좋은 몫을 선택해 누리도록 부르시기 때문이다. 남성이 부여한 가치에 무조건 복종함으로써 여성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종속에서 벗어나도록 부르시기 때문이다.

여성, 이주민, 난민, 장애인… 사회적 약자를 위해 국가가 인력과 재원을 투입한다. 이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인가? “돕는다”고 본다면, 그것은 일종의 호의다. 힘과 권력을 가진 쪽에서 그렇지 못한 쪽에 베푸는 호의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다수자 차별론’이 움틀 수 있다. 소수자를 돕느라 다수자가 역차별을 당하고 피해를 입는다는 논리다. 소수의 약자를 “돕느라” 다수의 사람이 그만큼 자기 몫의 파이를 빼앗긴다고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능력주의의 관점에서만 보면 능력 없는 사람에게 특혜를 주는 부당한 처사로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은 호의가 아니라 권리다. 헌법 11조에 명시되어 있듯이 차별 금지와 평등은 특혜가 아니라 권리다. 그것이 헌법을 통해 인정하고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다. 국가가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위해 인력과 재원을 투입할 때, 그것은 권리를 지켜주는 일이다. 또한 나머지 모든 사람도 보다 평등한 사회를 함께 누리게 하는 일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떠날 때, 그것이 나머지 양들의 손해인가? 아흔아홉 마리 양이 다함께 잃은 양을 안타까워할 때, 되찾은 한 마리 양은 감격이고 기쁨이 아닌가.

현실은 지금도 분명 가파르게 기울어있다. 성별, 나이, 인종, 학벌, 장애… 수많은 차이는 여전히 차별의 이유가 되고 있다. 게다가 예를 들어 외국인이면서 장애가 있는 여성이라면? 수많은 다름이 중첩되면서 이중, 삼중의 차별을 낳는다. 차별과 불평등이 뒤엉키며 늘어간다. 그 혼돈 속에서 신앙도 선택을 피하기 어렵다.

마르다와 마리아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고 있는가? 지배적 가치관에 맞춰 사느라 근심하며 불평하는 마르다인가, 아니면 마리아 편을 들 듯, 편견을 거슬러 약자를 향하는가? 혹시 마리아 편을 드는 신앙을 가인의 눈으로 흘겨보는 것은 아닌가?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해 마르다까지 자유케 하는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보여주셨다. 여전히 기울어진 사회 속에서 주님께서는 그 배제 없는 선택으로 부르시지 않는가, 약자를 선택해 모두를 사랑하도록. 지금 여기 하나님 나라에서도 그것은 호의로 베푸는 선행이 아니라 사랑이 기꺼이 짊어지는 의무이자 책임이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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