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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삶의 즐거움을 누리라평범한 삶을 위하여(전 12:13-14)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11.17 17:06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는 룻기, 아가, 예레미야애가, 에스더와 함께 ‘다섯 두루마리’에 속하는 책입니다. 다섯 두루마리는 유대교 절기 때에 낭독되는 책들입니다. 그런 전도서는 구약성경의 여러 책 중에서도 특이한 책 중 하나로 꼽히는 책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걸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입니다.

전도서 1장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익숙한 이름을 보게 됩니다. ‘다윗’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전도서를 쓰고 있는 전도자는 바로 ‘다윗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말하면서 전도서는 시작됩니다. ‘아들’을 ‘자손’이라고 해석한다면 전도자가 누구일지 여러 후보를 거론할 수 있겠지만, 전도자가 경험했다고 말하는 내용으로 보았을 때,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전도자로 보는 편이 맞을 듯 합니다.

전도서 1장 1절에서 우리는 ‘솔로몬이 쓴 책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읽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2절에서 우리는 첫 번째 충격을 받게 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다’는 말이 네 번이나 연속해서 나옵니다.

전도서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헛되다고 말합니다.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전도서를 ‘허무주의’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삶조차도 헛되다고 말하기 때문에 ‘염세주의’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헛되다고 말하는 전도서,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삶을 헛되다고 말하는 이런 책이 어떻게 성경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오늘은 전도서가 어떤 삶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헛된 것들

우선 전도자는 1장에서 지혜가 많으면 번뇌와 근심도 많아진다고 말합니다. 2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지혜자는 분명 우매한 사람보다 뛰어나지만, 지혜자나 우매한 사람이나 죽음은 똑같다고 말합니다.

2장은 웃음이 헛되다고 말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는 단순한 웃음이라기보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 쾌락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내용이 수많은 재물을 축적해 보았지만, 이 모든 것이 헛되다는 이야기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 전도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Getty Image

2장 18절 이후로는 지혜를 사용하여 이 땅에서 수고하였어도, 결국 그 수고의 결과물을 수고하지 않은 자들에게 넘겨주고 이 땅을 떠나가기에 지혜와 수고는 모두 헛되다고 말합니다.

3장은 조금 애매한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일에 때가 있다고 이야기하다가 그렇기에 일하는 자의 수고는 아무 이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아름다운 것들을 허락하시고 선을 행하는 이들에게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더니 결국 마지막에는 우리는 다 죽기 때문에 모두 헛되다고 말합니다.

1-3장은 결국 우리는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기에 이 땅에서의 모든 일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죽으면 가져갈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 땅에서 지식을 쌓건, 재물을 쌓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4장부터는 약간 느낌이 바뀝니다. 4장은 세상의 악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학대당하는 사람의 눈물’로 시작된 이야기는, 세상에서 자행되는 이런 악을 볼 수 없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더 복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 뒤로는 부유함에 대한 헛됨을 이야기합니다. 두 손 가득 부유함을 쌓으려는 사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부유함을 쌓는 사람은 그 수고를 충분히 즐길 수 없기 때문에 헛되고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또 홀로 부를 쌓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함께 일으켜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화를 당한다고 말합니다.

전도서가 12장으로 짧은 편이기 때문에 본문을 더 살펴봐도 말씀이 그렇게 길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이후로도 비슷한 내용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헛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이후의 본문을 더 요약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전도서의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헛되다’라는 말에 집중하다 보면, 삶은 다 허무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헛되다’는 말 속에서 전도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봅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구약에서 죽음이란 결국 우리 삶의 끝을 의미합니다. 죽으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수고하며 모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집니다. 그렇기에 수고도, 재물도 모두 헛된 것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수고합니까? 무엇을 위해서 재물을 모읍니까?

예전에 유병재 씨가 TV 프로그램에서 했던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는 ‘왜 공부를 해야 하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습니까? 공부를 해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 이유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이유는 돈이 많아야 더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그 많은 돈을 벌기까지의 과정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행복했습니까?

어쩌면 우리의 인생은 ‘돈을 번다’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서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번다는 우리의 행위는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계유지 이상의 무엇인가를 누리길 원하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생계유지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된 욕구, 과도한 욕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그런 요구는 과욕이었지만, 지금 시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저울질하는 마음은 바르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삶에서 누리는 일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내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누리는 일이 됩니다. 여러 사람과 모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모임을 자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고,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운동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누렸을 때,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우리가 정말 그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출판되기 최소 2000년도 전에 전도서는 말합니다. 혹시 우리는 본래 목적을 잊고 소유하는 데에만, 자본을 축적하는 데에만 연연하고 있지 않냐고 묻습니다.

어쩌면 전도서에 언급되고 있는 악의 문제도 예언서들에 나타난 악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소유함을 위해 자행되던 악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전도자는 그런 헛된 일을 왜 하는가 질문합니다. 그저 자신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적당한 양을 소유하면 되는데, 왜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악을 행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보통의 삶

전도자는 우리에게 한 가지 삶의 형태를 제시합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보통의 삶’입니다. 전도서는 거의 매 장마다 즐거움을 누리라고 말합니다. 무엇인가 헛된 것을 쫓지 말고 즐거움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제 이야기보다 전도서의 구절을 보시는 편이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3:22)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6:6)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7:14)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8:15)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9: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11:9)

그런데 7장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또 나타납니다. 15절에서 17절의 말씀입니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너무 의로운 사람인데 망하는 사람이 있고, 악인인데도 장수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지혜자가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우매자가 되지도 말라고 말합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을 보면, 전도서가 말하고 있는 지혜자는, 일반적인 지혜문학에서 이야기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과 조금 다른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악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지혜로워서 패망에 이른다는 말에 내포된 의미는 진리에 도달하는 지혜라기보다 더 많은 소유를 얻기 위해 얻은 지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혜문학에 나타나는 지혜와는 전혀 다른 지혜입니다. 물론 다른 구절에 나타난 지혜는 일반적인 지혜를 뜻하기 때문에 7장 16절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도자는 평범하게 즐겁고 행복한 삶을 누리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도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저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누군들 그런 삶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평범한 즐거움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 대답은 전도서 마지막인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일,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일, 그것이 평범한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고 전도서는 말합니다.

전도서는 복잡한 책 같지만, 결국 우리에게 평범한 삶, 평범함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제안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이를 얻는 길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심으로 그런 삶을 얻게 되시길 바랍니다.

목적을 잃고 가진 것을 더욱 키우는 일에만 열중하기보다, 내 삶을 즐겁게 만드는 일을 바라보며, 지금 내 삶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즐거움을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그 즐거움을 누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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