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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에 대한 의무와 정의가 예배에 앞선다”도덕의 혁명 (3)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19.11.20 18:24

문: 우리는 지금까지 그릇된 의와 참된 의, 하나님 나라의 의와 서기관 및 바리새인의 의의 일반적인 본질을 상세하게 논해왔다. 아제 몇 가지 예를 들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답: 예수께서는 주요한 도덕적 삶의 기초와 관련해서 몇 가지 예를 들었다. 우선 문제가 생기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정의가 사실상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옛 사람에서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복음 5장 21-22절)

문: 여기에 나오는 세 번의 심판은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가?

답: 심판을 세 번 반복한 것은 성서의 표현방식으로 볼 때, 예수의 선언의 무게를 더하는 것이다. 세 개의 심판은 지방법원 – 고등법원 –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비유이다. 예수의 구체적인 예를 계속 들어보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장 23-26절)

문: 이 부가문은 무엇을 뜻하는가?

답: 우리는 이 구절 전체에서 율법이 지닌 진리의 특성이 처음으로 적용된 것을 본다. 율법은 일종의 울타리를 세운다. 율법은 삶의 신성함을 보호하고자 하고 그 까닭에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율법은 그와 동시에 한계를 긋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신성함은 보다 깊이 이해되어야만 하고 느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성함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증오를 통해서도 역시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증오는 이미 살인이다. 우리는 온갖 방법으로 칼이나 총으로 죽이는 것보다 더 나쁜 방법으로 인간을 죽일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형제와 깊고 무조건적인 결합과 형제에 대한 의미를 가지고 살아야만 한다. 형제에 대한 이 의무, 형제와 함께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의에 대한 느낌, 형제와 우리의 이 결합감, 이러한 결합감으로부터 성정한 형제에 대한 책임감이 우리가 바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것의 본질이다. 이러한 결속과 의무의 위력이 예물과 제단이라는 비유를 통해 인상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문: 이것이 일종의 비유(Bild)인가?

답: 그렇다. 이것은 정말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생각해 보라. 희생예물을 드리는 것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그 당시에 있었던 가장 거룩한 행위였다. 어떤 의미에서 희생제물은 그에게 있어선 경건한 개신교들의 성찬식이나 경건한 가톨릭 교인의 미사보다도 훨씬 더 거룩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단에서 – 거기서 비로소 생각났든지 아니면 전에도 생각은 났었지만 그제서야 분명하게 느껴졌든지 간에 – 네 형제가 너에게 무언가 심각한 짓을 한 생각이 났다면 제단 앞에 희생제물을 놓아두라. 이미 목사가 너에게 빵과 포도주를 혹은 사제가 성채를 건네주더라도 성찬이나 미사를 그만두고 네 형제와의 일을 해결하라.” 여기에는 정의가 우선이고 예식은 나중이라는(Zuerst die Gerechtigkeit, dann der Kultus!) 아주 근본적인 원칙이 비유적으로 언명되어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인간을 섬기는 것이며 진정한 희생제물을 드리는 일이란 곧 형제에 대해서 의무를 완수하는 일이다. 이러한 원리는 모세에게서는 그의 율법의 전체적인 정신을 통해서, 예언자들에게서는 불을 토하듯 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미 구약성서에서 말해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특별히 사랑으로 첨예화했다.

이러한 의무와 의무의 완수는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의 모든 관계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이것을 깨닫지 않고 완수하지 않는다면 화가 있을 것이다. 사랑에 거스르는 죄를 범한다면 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 대한 엄한 심판이 될 것이다. 그대의 영혼은 그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너는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아야 한다.” 너는 –너 늦게 깨닫는다면 – 특별히 무덤 앞에서나 크게 너의 잘못을 뉘우칠 것이다. 이미 늦은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네 형제와 같이 길을 가고 있을 때 네 형제와의 관계를 해결하라. 네가 실제로 옳든지, 겉보기에만 네가 옳은 걳이든지 간에 너의 의를 포기하고 화해할 준비를 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너의 책임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정당한 것인 만큼 그렇게 하라. 그때 비로소 너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웃에게 부당한 짓을 저질렀다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형제에 대한 의무를 인정하지도 않고 실행하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아버지 앞에 나갈 수 없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적용되는 것은 민족들 간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민족들이 상호간의 의무를 경시해서 연대성이 있어야 할 곳에 이기심이 자립잡고, 봉사하기보다는 지배하려 하고 인간과 형제의 신성한 권리를 경외하는 대신에 폭력과 착취를 섬기고, 영혼 대신에 기계를 섬기고, 하나님 대신에 재물을 섬기는 곳에는 심판이 따르고 그 심판은 최후의 심판으로 될 것이다.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민족들에게도 최후 심판의 비유가 적용된다. 중요한 것은 예식이 아니라 정의이다!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나라이다! 제단이 아니라 형제이다!

▲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일상적인 도덕을 넘어서는 혁명적인 삶을 요구하신다. ⓒGetty Image

문: 형제란 누구인가?

답: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형제이다. 이웃이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다.

문: 우리는 으레 그렇게 번역하듯이 형제에게 정말로 ‘화내면’(zürnen) 안 되는 것일까? 아니면 당신이 번역한 것처럼 ‘앙심을 품으면’(erbitter) 안 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형제가 나쁜 길에 들어서 있기 때문에 그에게 당연히 화낼 수 있는 것이다.

답: 그러한 ‘화’는 물론 허용된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화를 내시며 예수께서도 화를 내신다. 그러나 ‘앙심을 품는 것’은 정말 훨씬 위험한 것이다. 아무튼 화를 내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 인해 불편해진 관계를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이고, 또 자신이 불의와 잘못에 휩쓸려 들어간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자신이 잘못한 탓도 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아버지시인 하나님 앞에서 모든 ‘앙심’은 눈 녹듯 사라지고 모든 부당한 ‘화’도 가라 앉는다.

문: 허용된 ‘증오’, 아니 거룩한 증오라고도 할 수 있는 증오도 있지 않을까?

답: 몰론 그런 증오도 있다. 허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증오도 있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신다. 또 예수께서도 악을 미워하신다. 거룩한 증오가 있는 것읻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증오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것인지 유의해야 한다. 죽음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악인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단지 악에 대한 증오만이 필요한 것이다.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시 하나님께서는 그 외에 다른 모든 증오는 금지하셨다. 그대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 이것을 분명히 인식할 것이다.

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서형제도도 금지되어 있을까?

답: 물론이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제자는 살인을 해서는 안 되며 할 수도 없다. 소위 적도 죽여선 안 되고 이른바 범죄자도 죽여선 안 된다.

문: 이런 금지는 단순히 시민적인 삶에만 적용되지 않고 정치적인 삶에도 적용되는가?

답: 산상설교는 사적인 삶의 대헌장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이기도 하다.

문: 하지만 산상설교는 늘 매우 개인주의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답;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제하고 늘 하나님 나라라는 배경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후에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광범위한 질서이다. 산상설교에서 말하는 “너”는 십계명에서와 마찬가지로 항상 하나님의 공동체를 뜻한다.

문: 그러나 구약에서는 전쟁과 사형이 허용되고 있지 않은가?

답: 단지 부분적으로만 허용되고 있다. 구약은 그것들을 폐지할 것을 요구한다. 특히 전쟁을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사야서 2장, 9장, 11장과 미가서 4장에 있는 평화의 예언을 생각해 보자.

또한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오히려 그가 그의 나쁜 성향에서 돌아서서 사는 것을 원하신다”(에스겔 18장 23절)고 한다. 아무튼 신약성서는 완성을 통해서 구약을 지양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전쟁과 사형제도의 정당성을 위해서 동원되는 통상적인 논증에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의 전형적인 예를 보는데 그들의 의는 하나님의 의를 어둡게 하고 인간을 미혹에 빠뜨리며 악의 나라를 섬기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문: 하지만 산상설교는 단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그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산상설교의 실행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산상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이지 정치의 대헌장은 아니지 않는가?

답: 정치도 하나님 나라에 종속되어야 한다. 산상설교는 처음에는 분명히 다만 제자들과 그리스도 공동체에 의해서 이해되고 인정되었겠으나 그리스도 공동체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획득해야 한다.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질서가 세상의 질서가 되어야만 한다. 제자들과 공동체는 이것을 위해서는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어야 하는 것이다.

문: 그것은 그들을 세상과 대립하게끔 만들지 않는가?

답: 바로 그래야만 한다. 그들은 설탕이나 버터가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다. 그것이 그들을 투쟁과 고난과 순교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그들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그들의 상징은 칼이 아니라 십자가이다.

문: 예수의 이 말씀의 정치적 의의는 전쟁과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투쟁에 한정되어 있는가?

답: 전혀 그렇지 않고, 그럴리도 결코 없을 것이다. 증오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죄와 용서, 책임과 협력을 통한 영적 교제의 무한한 연대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형제의 신성한 권리에 근거한 새로운 민족관계를 언급하고 있고, 단지 거기서만 모든 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가 깃들일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이신 하나님 안에서의 민족들의 형제애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살인금지는 생명에 대한 모든 형제의 육체적, 정신적 생명에 대한 보호라는 포괄적인 의무로 확장된다. 이것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실현인 것이다.

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인간을 섬기는 것이다”는 표어나 “정의가 예식에 앞선다”는 표어들은 예식을 폐지하는가?

답: 결코 그렇지 않다. 단지 정의가 먼저라는 것이다. 그러나 산상설교가 뜻하는 예식이란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봉사하고 완전히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지향하는 예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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