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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4: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왕하 17:6-23; 롬 2:1-11; 막 12:1-12)창조절 열셋째 주일(11월24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11.22 17:28

1. 마지막 때에: 고맙다, 고생많았다!

삼위일체 교회력 셋째 해 마지막 절기인 창조절 마지막 주입니다. 오늘을 끝으로 창조절이 끝나고, 다음 주 부터는 아기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대림절기입니다. 따라서 창조와 종말로 연결이 되는 창조절기 마지막 네 번째 시간에,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우리의 마음가짐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우리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립니다. 거리의 낙엽들도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일까요? 하나하나 낡아가며 그동안 함께 지낸 나무에 이별을 고하며 바람 따라, 시간을 따라 땅에 떨어집니다. 마지막 날은 이렇게 쓸쓸한 것일까요?

아래 사진은 평화교회 임대식 목사님이 찍은 낙엽사진인데, 제목이 <고맙다. 고생 많았다>입니다. 낡아버린 낙엽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겉 사람은 세월과 시간에 따라 낙엽처럼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지기를(엡 3:16) 기도합니다.

▲ <고맙다 고생 많았다> ⓒ임대식

그렇다면 왜 마지막이 있을까요? 왜 창조주 하나님은 마지막 날, 우리를 심판하실까요? 무엇이 영원한 형벌과 영생이라는 심판의 근거인가요?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너무도 분명히 의로우신 심판에 관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은 우리의 목이 곧기 때문이며, 서신서의 말씀은 남을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리석은 건축자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여,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듯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버림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를 마지막 날, 의로우신 심판대 앞에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과 더불어 살며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어 세상의 거짓된 무리가 우리를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할 할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그것을 순서대로 보여줍니다.

2. 목을 곧게 하기 때문에!

먼저 구약의 말씀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제 19대 왕인 호세아의 집권행적과 북왕국의 멸망에 관한 기록입니다. 호세아는 앗수르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애굽과 동맹을 체결하였으나, 결국 앗수르에 함락되었습니다. 그 결과 북왕국 이스라엘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호세아 제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왕하 17:6)

조선 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끌려간 우리 선조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아무튼 열왕기 저자는 이 일에 관하여 신학적인 해석을 덧붙입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왕하 17:7-8)

심판의 이유를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 자손들의 구체적인 죄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자손이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 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 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며,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이라.”(왕하 17:9-12)

산당을 세우고, 목상과 같은 우상을 섬겼으며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의 죄는 그들의 조상들과 같이 목이 곧은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왕하 17:13-17)

따라서 이렇게 목이 곧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왕하 17:18). 그런데 형제의 나라인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지켜본 남쪽 나라 유다는 어떨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유다도 심판을 받습니다. 본문에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유다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버리사 괴롭게 하시며 노략꾼의 손에 넘기시고 마침내 그의 앞에서 쫓아내시니라.”(왕하 17:19-20)

그리고 열왕기 기자는 다시 한번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멸망에 관해 정리를 해줍니다.

“이스라엘을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나누시매, 그들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더니,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몰아, 여호와를 떠나고 큰 죄를 범하게 하매, 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이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왕하 16:21-23)

남유다도 북이스라엘도 결국 목이 곧아서 멸망, 곧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3. 남을 판단하기 때문에!

이처럼 목이 곧아 심판을 당한 이스라엘과 유다처럼, 신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니 초대 교회는 무엇 때문에 심판을 받을까요? 오늘 로마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목이 곧으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생각대로 남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대로 우리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판단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판단력 비판』이라는 책을 쓴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 Kant)의 말이 떠오릅니다. 이 책에서  칸트는 ‘판단력(Urteilskraft)’을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에 포섭시키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특수한 현상’을 ‘보편적인 기준’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가령, 오늘 나의 일상에서 겪은 나의 작은 일을 인류와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편적으로 거대하게 해석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판단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칸트는 세 가지 판단 과정을 이야기 합니다. 먼저 ‘지각의 인식판단’입니다. 사물, 혹은 사건을 보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칸트의 ‘이론이성 영역’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욕구의 실천판단’입니다. 사물에 대한 나의 욕망이 개입하는 것입니다. ‘실천이성의 영역’입니다. 마지막으로 ‘느낌의 취미판단’입니다. 판단력 비판, 곧 미학적 영역입니다. 가령,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를 인지하고 인식하는 판단, 그리고 먹기 위해 사과를 따는 욕구의 실천판단에 이어, 마지막으로 둥글고 빨간 사과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취미판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름다운 것(美)을 보고 설레고, 숭고한 것(sublime)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의 지각과 욕구의 영역을 넘어서 취미 판단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미와 숭고라는 특수한 현상을 우리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파악 할 수 없기 때문인 설레고 숭고를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미와 숭고는 절대적 기준이 없겠죠? 특히 숭고는 ‘그것과 비교하면 다른 모든 것이 작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와 다른 타자를 숭고의 대상과 미의 발현으로 볼 때 시작됩니다. 나의 인식과 욕구의 대상이 아닌, 단지 취미판단의 영역인 타자! 이 타자는 이웃인 타인에서 절대 타자인 신에게까지 고양되겠죠? 물론 타자(인 이웃과 신)에게 있어서 나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배려의 상호성!’,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주민등록증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의 말을 들어 볼까요? 판단하는 사람들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2-5)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의 날에 목이 곧아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 고집불통인 사람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영생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롬 2:6-10)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때, 유대인과 헬라인, 이방인과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의 구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롬 2:11)”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인이나 교인 아닌 사람이나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들이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을,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4.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그렇다면 참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과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구분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 마가복음서의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그 것을 잘 보여줍니다. 비유의 말씀을 들어볼까요?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막 12:1-8)

예수께서 묻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막 12:9).” 물론 이 농부들은 본문의 맥락으로 보아,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시고, 함께 논쟁하였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입니다(막 11:27). 결국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같이 잘 믿는다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다시 말하자면, 목사와 장로와 권사, 집사들이 포도원 주인의 종을 죽이고,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마저 죽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며, 예수를 잡아 죽인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G. Freud)는 사실 종교비판가입니다. 자신들의 욕망의 최대치를 추구하는 세속적 가치에 종교라는 이름의 깃대를 꽂아, ‘선교 사업’이라 호명하고, ‘구원 사역’이라 외치며, ‘하나님의 거룩한 일’로 치장해 버리는 종교는 프로이트 앞에서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종교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는 프로이트야 말로 한국 개신교회가 아니라, 구약의 우상타파 정신의 유일한 계승자입니다.

따라서 종교가 프로이트로 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우상파괴’의 개념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능한 신이나 권위적 지도자에 대한 믿음의 뒤에는 인간 존재의 무력감이 작동하고 있고, 그 뿌리를 따라가 보면 유아 시절의 무력감과 전능한 부모에 대한 믿음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개인의 ‘무의식적 욕구’나 ‘집단적 나르시시즘’을 충족시키기 위해 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상을 만들고 섬겼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우리 앞에 다시 오시면, 우리는 예수를 죽이고, 헛된 우상을 예수로 믿고 따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막 12:10-11)”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며 예수를 잡아 죽여도 예수님은 불의한 우리들에 의해 버림받으시나, 건축물의 머릿돌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나요? 문제는 예수 안 믿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예수 믿는다고 하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목이 곧고, 선을 행하지 않고, 남을 판단하고, 패를 지어 불의를 행하는 우리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기를 기도하며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마지막 구절을 볼까요?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막 12:12)

옳은 말을, 생명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며 오히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놀랍지 않나요?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잘 믿습니다.” 끝까지 회개할 줄 모르고, 목이 곧은 사람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종교는 그 품안으로 들어온 모든 사람에게는 사랑의 종교이다. 그러나 그 종교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와 편협이야말로 모든 종교의 본연의 모습이다.” 최근에 종교는 그 품안으로 들어온 사람에게도 무자비하고 편협하고 혐오합니다. 목이 곧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죽는데 있습니다.

5. 옹벤져스: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될 수 있을까?

다시 마가복음 12장 12절 말씀을 볼까요? 놀랍게도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예수님 주변에 있는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두고 가버립니다. 그렇습니다. 불의한 세력들이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고 따랐던 이들을 두려워하여 가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목이 곧고 남을 판단하며 예수를 죽이려는 불의한 자리에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곁에 있습니까?

KBS2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끝이 났습니다. 주인공 동백이(공효진 분)가 이사 간 충청도 옹산의 게장골목 상인 번영회 아줌니들이 처음에는 동백이를 외지인이라고 텃새를 부리며 핍박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동백이의 진심을 알고, 이제는 동백이를 연쇄살인마로부터 지키려고 뭉쳤습니다. 그 이름이 ‘옹벤져스’입니다. 옹벤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석으로 6년을 안면 트고 살았으면 식구지!” “아무래도 말여! 동백이는 그냥 죽게 냅두면 안 되것어.” “아주 같잖은 놈 하나가 옹산을 깐히 보고 까부리는데, 쭉정이 하나 뽑아 버리고 말자고!” 이들이 살인마로부터 동백이를 지킵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우리는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는 <동백꽃 필 무렵>에서 큰 교훈을 하나 깨달았습니다. 동백이의 독백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될 수 있을까?” 목이 곧은 사람이 아니라,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그 사람이 있음으로 내가 안심이 되고 의지가 되는 사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사람,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되는 세상! 아침저녁으로 6년을 안면 트고 살았으면 식구입니다. 50년을 함께 신앙생활 했으면 이제 나의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식구인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되는 세상, 그것이 바로 우리가 소망하며 기다리는 아기 예수께서 오셔서 이룰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가요? 그래야 동백이도 이렇게 말하겠죠? “저요, 옹산에서 100살까지 살래요.” 많은 사람들이 여기 용호동에서, 남부산용호교회에서 백년만년 살겠다고 고백하는 그런 동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기적과 같은 선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동백꽃 필 무렵>의 옹벤져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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