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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에서 나가 농사로 수련하라”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떠나게 된 이야기
김정택 목사 | 승인 2019.11.23 02:46

나의 월급생활과 감리교 제도권 진입을 위한 1년여의 복지관 복지부장생활, 만수감리교회의 선교·부목사 생활은 어설프게는 예견되었던 한경수 감독이라는 암초를 만나 좌초되었다. 제도권 진입 1년의 실패 기간을 빼니 다시 처음 연수구 주민생활이 시작되는 기분이다. 내가 연수구는 왜? 왔었지? 길지는 않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사는 곳도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인천에서의 도시산업선교와 민중교회 활동을 그만두고 1993년에 나는 연수구로 이사왔다. 주거지의 주민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1972년부터 1979년까지는 빈민운동에 몸 담았던 나는 81년부터 노동운동에 동참한다고 인천에 와서 인천도시산업선교의 일원이 되었을 때부터도 주거지운동의 필요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공장이라는 노동현장은 주거지에 포함된 일부 현장이라 생각하였다. 나에게 주거지는 민중들의 모든 삶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장이었다. 거기에 정치투쟁의 전선체운동에 동참하면서 운동에도 수련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더해졌다.

“운동권 내에서도 왜? 쓸데없는 대립을 하지? 생각이 같으면 그때는 같이 하고 다르면 서로 존중하며 따로 활동하든지 하면 되지. 그래야 다시 만날 수도 있고 동지감도 유지되지. 우리가 관념의 노예가 되기도 하는 건가? 그렇지않고서야 어찌 그토록 자기입장만을 관철시킬려고 악착같을 수 있나? 건강은 또 왜? 중요시 안 여기지? 몸이 건강해야 오래 활기차게 활동할 수 있을 텐데”하는 질문까지도 얻었다. 그러니 주민대상으로 요가를 지도한다는 것은 건강에의 접근이기도 하지만 운동에 포함된 하나의 수련이기도 하고 운동의 토대 구축이기도 한 것이었다.

위파사나 요가를 만들다

또한 이 때는 나의 수련도 제2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건강뿐만 아니라 관념에서 자유롭기라는 정신적 측면의 수련에 대한 관심이 나를 끌고 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참선훈련에도 기웃거리고 책방에 가면 수련과 관련된 도서들을 구입했다.

▲ 위파사나 수련의 한 장면 ⓒGetty Image

그러다가 위파사나(*내면을 보다는 뜻)를 접하게 되었다. 위파사나를 파고 들다보니 남방불교에 접근하게 되었고 소승이 무언지를 조금은 알게도 되었다. “아하! 소승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 전 깨달음에 이르는 수련에 집중하는 것이기에 대승은 부처가 이미 깨달은 바를 사회에 실천하는 것이기에 대승이 수련을 미진한 것으로 보고 얕잡아서 소승이라 했구나!” 느껴졌다.

오히려 남방불교라고 해야 하는 것을 위파사나도 파고들다보니 “참으로 수련법이 많구나!” 알게 되었고 그러다 어느 날 책방에서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라는 제목의 고엔카 책이 눈에 확 들어왔다.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 나에게 그냥 다가왔다.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책이겠구나!” 하는 직감이 왔다.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책이 가르치는 수행방법을 그대로 해보았다. 모든 주문, 기도, 언어, 소리는 다 던져버리고 오직 의식이 깨어 사람이 살아있다는 유일한 확증인 호흡에 집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후로는 요가도 고엔카 식의 의식의 집중을 결합시킨 나만의 위파사나 요가를 만들었다.

두 가지 깨달음

내가 다시 연수동 생활을 시작했을 때 마침 정성헌 선배가 시작한 우리밀 살리기운동이 농촌과 천주교를 넘어 도시까지 전체 시민운동으로 솟아 올라왔다. 당시 나의 사회과학적 지식은 도시는 진보적이고 농촌은 보수적이다는 관념을 심어주었다. 그 관념은 나로하여금 도시주도로 농촌과 결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하면서 우리밀살리기운동에 동참하였다.

생활까지도 해결하겠다는 욕심으로 새벽에 우리밀빵을 배달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2가지의 깨달음이 왔다. 하나는“내가 건강을 위한 식이요법의 식재료라고 제시하는 농산물이 건강한 농산물이라는 것을 너가 생산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감히 확신할 수 있어?” 하는 내적 공격에 직면하였다. 또 하나는 도시에서의 활동은 마치도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공허하다는 느낌이 왔다.

그러니 아무런 실천도 할 수 없었다. 어디를 가야 할 지 모르는데 어떻게 걸음을 뗄 수 있겠는가? 정말 하늘에서든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든 나의 새로운 길을 비추어주는 무언가가 있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가평 산골짜기에 들어갔다.

이때만 하더라도 가평은 아주 나에게 친숙한 산좋고 물좋은 동네가 되어 있었다. 이티아저씨 채기철 선생도 연수원을 운영하고 있어 자주 들르기도 했지만 나에게 요가를 배운 이경달·김명혜 부부도 인천도시를 벗어나 휴양을 하고 있었다. 이경달은 인천의 5공단 공장에서 잘나가는 임원이었지만 마누라 명혜 씨는 남편이 여기 더 있다가는 죽을 것 같이 여겨졌다, 그래서 나에게 요가를 배우고서는 곧바로 인천을 벗어나서 가평의 재래식집을 얻었다.

소리를 듣다

내가 다시금 가평골짜기를 찾았을 때는 이경달 부부는 경상북도 봉화에 땅과 집을 구입하고 떠나 있었다. 단식을 하면서 성서읽기와 위파사나에 열중하였다.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 맑은 상태가 되어야만 무슨 결과가 임할 것 같았다. 15일쯤 지나자 정말 어디서 소리가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골방에서 나가 농사로 수련하라”는 소리, 깨달음이 닥아왔다. 그래서 인천의 친한 선후배들이 오기 힘든 오지인 이경달 부부가 자리잡은 봉화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제 극도시파인 아내와 딸을 설득하는 것이 걱정이다. 농사수련!이니, 귀농!이니, 하면 100% 극한 반대에 부닥칠 것은 뻔하고 정말 한번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것이라는 각오가 얼굴에 묻어나도록 표정을 지으면서 “임정숙씨, 내가 봉화에 효소만들러 가야겠오.”했다.

효소는 마누라가 익히 잘 알고있는 단식용 식품이다. 내가 단식을 지도할 때는 보통은 효소단식을 권했다. 단식을 할 때 며칠지나 자기 살을 먹기 시작할 때는 피가 극히 산성화되면서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여기에 알칼리성인 효소물을 마시게 되면 중화되어 편하게 단식을 마칠 수가 있다.

후배가 생산한 효소를 사용하는데 3만원에 구입해서 3만원에 그대로 구입하도록 한다. 그럴 때면 마누라가 얘기한다. “1만원 더해서 4만원 받아요. 그래야 우리도 생활을 하지요.” 어떤 때는 막 보채기도 한다. 그랬으니 임정숙의 머리가 비상하게 굴르기 시작했을 거다. “음, 효소를 직접 만들면 우리한테 한병에 3만원씩 그대로 떨어지겠네.”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가세요. 나래와 함께 가볼께요,” 그냥 쉽게 예스한다.

나는 농사수련하러 봉화로 떠났다.

김정택 목사  kjt94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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