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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만 알아주실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믿음의 행함(약 2:14-17)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11.24 17:00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애니메이션이나 라이트노벨에서 캐릭터의 성격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인 ‘츤데레(ツンデレ)’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퉁명스럽다는 뜻의 ‘츤츤(つんつん)’에 헤롱헤롱거린다는 의미를 가진 ‘데레데레(でれでれ)’가 붙어서 만들어진 신조어입니다.

겉으로는 퉁명스럽게 대하지만 속으로는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식으로 예를 들자면, ‘이 반지 오다가 주웠다. 너 가져라’ 라고 말하는 사람의 성격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합니다. 캐릭터에게 사용되는 또 다른 표현으로는 병들었다는 의미의 ‘얀데루(病んでる)’에 ‘데레데레(でれでれ)’가 붙어서 ‘얀데레(ヤンデレ)’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 스토커적인 사람을 표현할 때 붙는 표현입니다. 츤데레나 얀데레 같은 명칭들은 캐릭터가 자신의 ‘좋아하는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 중에 ‘사랑한다면 표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표현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나의 사랑을 알 수 없다는 의미이고, 알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의미까지 나아갑니다. 감정적인 어떠한 개념은 우리의 삶 속에서 눈에 보이는 어떠한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믿음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이 개념이 우리의 삶, 현실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믿음이 있음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전해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야고보서 본문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아닙니다. 오늘 읽은 야고보서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특별한 해석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때로 이 본문은 행함이냐 믿음이냐의 주제를 놓고 신학적인 토론을 할 때 사용되기는 합니다만, 행함이냐 믿음이냐를 가지고 토론한다는 점 자체가 성경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줍니다. 또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추상적 개념은 현실 표현으로만 증명될 수 있기에 의미가 없는 토론입니다.

물론 유대교와 분리되는 가운데 율법과 믿음의 구분이 생겨났고, 이에 따라 행함의 강조는 율법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해지면서 행함을 더욱 배척하는 현상이 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이후 시대에 있어서 ‘행함’이란 ‘율법을 준수한다’는 의미로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과 행함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둘은 그냥 하나의 개념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믿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실천하고 행동한다는 개념이 되어야 합니다.

▲ 믿음이 죽은 것은 아닐까. ⓒGetty Image

예를 들자면, 제가 제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시켰을 때, “네”하고 대답은 했는데 실제로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만 있으면 제 아이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입니까? 물론 대답을 했으니까 말을 듣기는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행함이 없이 믿음만 있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제 아이가 대답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상태와 똑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이를 향해서 ‘말을 잘 들었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대답만 잘한다’고 표현합니다. 대답했다면, 자신의 몸을 움직여서 그 일을 실천해야만 ‘말 잘 듣는 일’이 됩니다.

믿음은 분명히 행함을 동반해야만 합니다.

실제적인 도움

오늘 야고보서는 ‘대답만 잘 하지 말자’는 맥락으로 읽어도 괜찮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15절을 보면,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서 16절처럼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이런 말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표현하는 방식으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평안이 함께 하길 바란다”,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자라”, 혹은 “잘 때 보일러 켜고 자라”, “밥 좀 든든하게 먹고 다녀라” 이런 표현이 됩니다.

입을 것도 없는 사람에게 따뜻하게 입으라는 말, 난방비 낼 돈이 없어서 보일러를 켜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밤에는 보일러 꼭 켜고 자야 한다는 말, 식비가 없어서 굶는 사람에게 든든히 먹고 다니라는 말, 이를 다 합쳐서 힘들어 죽겠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리라고 전하는 말은 그 사람을 오히려 더 괴롭고 힘들게 만듭니다.

말만 하고 실제적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상대방의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 좋은 말을 전해봤자, 그 말은 좋은 말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되고 상처가 됩니다.

사실 야고보서가 이런 의미까지 생각하면서 기록되었는가를 따져본다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저 행동이 없다면 상대방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고, 이는 믿음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전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또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야고보서는 율법 준수를 강조합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도 마찬가지로 유대교적인 사상을 가진 기독교 집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편지의 저자를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던 야고보로 지정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실제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가 쓴 편지일지도 모릅니다.

교회의 시대에 율법 준수를 강조하기 위해 기록된 말일지 몰라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이 시대, 상대방의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 와서 말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합니다.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는 ‘행함’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 됩니다.

얼마 전에 사촌 누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있었습니다. 사촌 누나의 어머니, 저에게는 고모와 통화하면서 나눴던 대화 내용이었는데, 고모가 그런 질문을 하셨답니다.

“비를 맞고 걸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일과 같이 비를 맞아주는 일 중에 어떤게 공감하는 거겠니?”

사촌 누나는 비를 안 맞도록 우산을 씌워 주는게 배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고모가 하신 말씀이, 그 사람이 비를 맞고 싶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건 배려가 아니라고, 상대를 배려한다는 생각도 사실은 오만한 일일 수 있고 공감하는게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공감과 배려라는 개념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이 이야기 자체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우리는 그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기 전에 먼저 질문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산 씌워 드릴까요?”, “같이 우산 쓰실래요?” 친한 사람이라면, “왜 우산 안 쓰고 비 맞고 있어?” 이런 질문이라도 한 마디 던졌다면, 그 사람이 바라는 바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선함’을 기준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도움’을 기준으로 행동합니다. ‘어떠어떠한 행동이 선행이다’라는 우리의 기준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상태, 감정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어떤 행동을 상대방에게 취한 후에 우리는 스스로 선행을 했다고 자기 만족해버립니다. 이는 자기만족일 뿐, 상대방에 대한 선한 행위, 믿는 사람이 보여주는 행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만족에 그치는 행함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인가를 전할 수 있는 행함을 해야만 합니다. 자기만족적인 행함은 때로 선이 아니라 악이 될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선택적 행함과 우리의 자세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점이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의 이야기라면, 오늘 본문 앞에 나타난 말씀은 우리에게 행함에 대한 또 다른 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2장 1-9절은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읽은 15절 말씀에서도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누군가가 잘 사는 사람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의 내용은 교회에 들어오는 이들을 차별 없이 대하여야 하며, 만약 그들이 가난한 사람이라면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 우리의 행하는 믿음을 보여야 한다는 흐름으로 읽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행함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본심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본심을 억누르거나 혹은 정말로 기쁨에 차서, 교회의 사랑을 전하려고 노력하시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빈부의 격차에 따라서 차별적인 행함을 보이지는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차별적 행위는 사라졌을까요? 저는 아직 차별적 행위는 남아있다고 봅니다. 빈부의 격차에 따른 차별이 아니라 또 다른 기준들에 의해 사람들을 구분하고 그 구분에 따라 선택적으로 행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말씀드리는 행함은 자선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의 전반적인 행동 전체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믿음의 행위는 결코 자선 행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사회복지관 자원봉사자 역할을 행하는 사람들로 한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체적인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전체적인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말은 우리의 행함을 조금 더 구체화 시켜줍니다. 우리의 행함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여러 가지 목록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우리의 ‘태도’로 구체화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동안 연예인들이 ‘에티튜드(attitude)’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 때가 있었는데, 자세, 태도라는 뜻입니다. 예능에 임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면서 TV에서 종종 나왔던 것 같습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의 믿음은 그의 태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평소 그의 태도는 어떤지가 그의 믿음 자체를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영화 킹스맨의 명대사 중에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 makes Man)’는 말이 있었습니다. 매너라는 것이 결국 상대방에 대한 좋은 태도이기 때문에 태도가 좋아야 바른 사람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킹스맨에서 요구한 태도는 영국 신사다운 태도였지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태도입니다.

선택적인 행함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태도에 대해서 말씀드려서 조금 의아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나 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려고 함입니다. 우리는 내가 정한 기준에 맞는 사람에게만, 또는 내게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만 선택적으로 좋은 태도를 취하고, 바른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어쩌면 우리는 직접적인 차별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차별 없이 대하려고 노력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때로 나에게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차별 없는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까? 내 기준에 의해 나눴을 때, 나의 영역 밖에 있는 사람에게도 차별 없이 행동할 수 있습니까?

레위기 19장 18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압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5장 44절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와 적대하는 사람에게 마음으로 사랑을 다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께서 마음속에 미워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분은 손들어 보시라고 말씀하시자 한 원로 장로님께서 손을 드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예전에는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죽어서 없어”라고 하셨답니다. 그 사람이 죽어서 없어지기 전까지 우리 마음에 상대방을 향한 적대감, 악의, 분노 등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을 사랑하기란 더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믿음의 행함은 그런 우리의 감정을 조금은 누르고, 그들 앞에서만큼은 최대한 바른 태도를 취하는데 있습니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들어야 합니다. 내 귀를 막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니라 듣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 상대방을 향한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행함으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믿음은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알아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남몰래 힘들어했고 슬퍼했던 나의 마음을 알아주실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믿음은 아닙니다. 이미 성경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다 적혀있습니다. 그 말씀을 행하지 않았기에 이 세상에서 아무도 몰라줬는데, 훗날 하나님께서만 알아주실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참된 믿음인지, 무엇을 행하며 살아야 할지, 명확하게 이것 한 가지만 하자고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건 선하게 대하려는 태도와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자세와 그를 위한 기도가 있을 때, 우리는 분명 올바른 행동, 참된 믿는 사람의 행동을 하게 될 줄 믿습니다.

행위로 믿음을 보이는 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노력입니다. 세상에서 보여지는 우리의 노력이 결국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여러분의 믿음을 세상에 보이시고, 하나님 앞에 증명하셔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살아있음을 전하시고, 하나님의 참 세상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전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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