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는 구세주그러나 화해와 평화의 도구가 되셨다(렘 23:5-6; 골 1:11-20; 눅 23:33-43)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19.11.27 18:20

< 1 >

예수께서 ‘해골’ 모양의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유다의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나,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라며 비웃었다고 합니다(눅 23,35). 누가는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반면, 마가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라고 밝힙니다(막 15,31). 이들은 예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구원하신 것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이라는 조건절로 말한 것입니다. 화려한 권세자로 다윗 왕국을 다시 일으킬 메시야가 저주받은 자의 한 사람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니,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은 구원했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구원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 분 안에서 ‘전적으로 타자를 위한 존재’를 보지만, 이들 권위를 위협당한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는 단지 무능하거나, 실패한 메시야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병정들도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눅 23, 37). 예수님의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써 붙인 죄패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로마 병정들은 지금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죄 패 자체도 예수님을 비웃기 위한 것이지만, 한 나라의 왕이 이토록 무력하게 다른 죄인들과 함께 혹독한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는 것은 로마 병정들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의 왕이라면, 비록 로마 제국의 식민지이지만, 그래도 왕이 이런 죽음을 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왕은 그가 구할 백성과 지켜야 할 나라가 있는 법인데, 지금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나사렛 예수에게는 자기 백성도, 자기 군대도, 자기 나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유대 지도자들마저 그를 비웃었기 때문입니다.

비웃음과 조롱은 마침내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 가운데 한 사람의 모독에 의해서 절정에 달합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눅 23,39). 누가는 이 죄수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가와 마태는 이들이 ‘강도’라고 정체를 밝힘으로써, 그리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있다는 것으로, 사실상 이들이 로마 제국에 무력으로 저항한 ‘젤롯파’였으리라고 추정합니다.

테러와 폭력으로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끝장내려는 ‘젤롯파’에게 예수님은 ‘구세주’일리 없지요.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 26,52)고 하면서,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친 제자를 꾸짖은 사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한 사람이(마 5,44) 어찌 폭압적인 로마 제국, 유대 민족의 원수로부터 자기 나라를 구원할 수 있단 말일까요. 예수님을 모독한 그 죄수에게 예수님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비현실적인 혁명가였을 뿐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수행될 때, 더 객관적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친구보다는 적대자들의 평가가 그럴 수 있습니다. 물론 적대자들의 평가는 악의적으로 왜곡될 수 있고 일방적으로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이 아는 자기보다, 친구가 아는 자기보다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친구였고(막 2,16),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심으로써 정결예법을 지키지 않은 불순분자, 그래서 그들은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했습니다(막 3,6).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모함했습니다(막 3,22). 적대자들에게 예수님은 정규교육도 못 받은 목수, 죄인과 세리의 친구, 당돌한 페미니스트, 전통 파괴자(막 7,5), 성전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였습니다.(막 11,15).

그러나 적대자들의 그 모든 비난과 조롱 가운데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십자가 주변에서 그 분이 들으신 야유가 아니었을까요?

‘다른 사람은 구원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구세주!’ 십자가 주변에 있던 적대자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로마 병정들, 폭력으로 나라의 독립을 추구했던 첼롯파에게 예수님은 자기 백성도 나라도 없는 구세주, 군대도 권력도 없는 왕, 혁명의지도 없는 이상주의자, 간단히 말해, ‘제 머리도 못 깎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 예수는 자신도 구원할 수 없는 구세주가 되었다. ⓒGetty Image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같은 젤롯파 동료를 꾸짖는 또 다른 첼롯파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눅 23,41)고 꾸짖으면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한 사람입니다.

누가가 전승하고 있는 십자가 사건의 이 장면에서 주인공은 제 생각에는 바로 이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젤롯파 사람입니다. 그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누가복음서의 저자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어쩌면 테러리스트였을지 모릅니다. 로마 군인 혹은 로마 제국에 부역하는 유대인을 죽인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받는 것 아니었을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추구하는 나라, 그 나라를 구현하려는 방법이 비록 젤롯파와는 달랐지만, 무언가 전적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다는 점에서 자기와 같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리고 민족해방을 위해 나섰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신세가 된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데서 오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일까요?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그 분이 추구했던 나라, 그 분이 선포했던 나라는 그가 찾고자 했던 나라는 자기가 추구했던 나라와는 무언가 달랐는데, 왜 그 분이 십자가형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폭력과 테러로 다윗 왕국을 회복하겠다고 평생을 살아온 그가,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멘’(진정으로의 뜻)으로 화답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눅 4,24; 눅 23,43).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예수님은 자기 옆에서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폭력과 테러로 로마제국의 식민지배로부터 유대 민족을 해방하여, 새로운 다윗 왕국을 세우려고 살인도 불사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꿈꾸었던 나라와 그가 꿈꾸었던 나라가 사뭇 달랐지만,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에게 낙원에서 자신과 친교를 가지게 되리라고 약속하신 것이지요.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추구하고 살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를 자기와의 사귐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34)로 불린 사람다운 최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생을 죄인들의 친구로 사시던 분이, 마침내 최후에도 죄인들 한 가운데 계셨으니 말입니다.

< 2 >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사람 구한다고, 정작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자신의 형상으로 삼으셨다고(골 1,15) 사도 바울은 증언합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무관(無冠)의 왕, 아니 가시면류관을 쓰신 고난 받는 종을 평화의 왕,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 세우셨다는 것이지요: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 1,16)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제국의 병정들, 젤롯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무력한 이상주의자, 다른 사람은 구원하면서 정작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무능한 혁명가를 보았지만, 사도 바울은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을(골 1,16),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평화의 왕을 보았습니다(골 1,20).

화해는 십자가의 피, 곧 하나님의 자기희생에서 가능한 사건입니다. 힘의 균형, 전략적 후퇴, 적당한 타협은 진정한 화해가 아닙니다. 진정한 화해는 일방적입니다. 조건과 전제는 화해를 지연시킬 뿐입니다. 왜냐하면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키고, 원수를 제거하면 또 다른 원수가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화해는 원수의 제거가 아니라, 적대관계의 청산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 혹은 집단적 차원에서는 물론, 우주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골 1,20).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사건은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이의 사건만이 아니라, ‘우주적 사건’입니다.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고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입니다.

< 3 >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고, 하나님과의 불화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조국 유다가 바빌론의 침략 앞에 멸망직전의 풍전등화 같은 운명에 처해 있건만, 유다 지도자들은 자기 양 떼를 죽이고 흩어서 몰아내는 악한 행실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은 비록 그 말씀이 듣는 이들에게 ‘부담이 될지라도’(렘 23,33)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해야 했지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고 말하고,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희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고 거짓말을 하면서(렘 23,17),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습니다(렘 23,36).

옛 세대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을까요? 예레미야는 다윗 가문에서 돋아날 새로운 가지 하나를 예언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새로운 왕입니다(렘 23,5). 그 왕이 올 때에, 남 왕국 유다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고, 이미 수 세대 전에 앞서 망한 북 왕국 이스라엘도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렘 23,6).

< 4 >

그런데 다윗 가문에서 돋아날 새로운 가지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복음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공평과 정의가 실천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구원받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가 괴롭힘을 당하거나 학대받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지 않는 세상(렘 22,3)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적대자들로부터 다른 사람은 구원하면서, 정작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구세주라고 조롱받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통하여,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다른 사람 머리는 깎아주면서 정작 자기 머리는 스스로 못 깎는 이들의 소망이 되신 것이지요.

죄인들 가운데서, 죄인의 한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 자기를 못 박는 이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고 말씀하신 분, 다른 사람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다고 비웃음 받고, 조롱받고, 모독을 당한 예수님을 하나님은 우주적 화해와 평화의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