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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등한 피조물이자 인격체순결 (1)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19.11.27 18:24

두 번째 예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이다. 이 예는 원래 예수에게서 유래한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내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태복음 5장 27-32절)

문: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이런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답: 우리는 새로운 의의 혁명적 원리를 두 번째로 적용한 것을 보고 있다. 십계명 중에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본 질서이다. 하지만 (무엇이 간음인지) 율법적으로만 해석할 때 이 계명은 실질적으로 효력을 상실한다. 이 계명은 계명으로써의 영구성과 무조건성을 상실한 것이다. 도덕적 기본 질서 주위에 또 다시 울타리가 쳐진 것이다. 그래서 울타리 안에서만 그것은 계명으로서 유효한 것이다. 그 울타리 밖에 있는 것은 자유지역으로 간주된다. 간음을 해서는 형식상 안 된다. 그러나 다른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괜찮다. 결혼은 그것이 지속하는 한 형식상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쉽게 이혼해도 괜찮다. 그러기 위해서는 율법적인 형식을 따라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말로 하면 만약에 율법적인 형식만 갖추어진다면 이혼은 허락된 것이다. 이것은 율법적 형식이 바로 이혼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문: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답: 여기서도 첫 번째 예에서와 마찬가지이다. 율법이란 것은 인간의 작품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삶,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지향하는 삶이 율법을 대신해야 한다.

문: 그것이 이 경우에는 무엇을 뜻하는가?

답: 그것은 많은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선 하나님께서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 그러므로 여자는 범할 수 없는 신성한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며,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이 창조를 계승하며 여기서 가정이 생기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최소 조직이며 기본 형태를 이룬다는 것을 뜻한다. 단지 이런 전제 하에서 결혼이 이루어져야 하며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될 수 있고, 결혼은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아버지이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수태와 출산도 신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존경과 사랑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으로만 올바르게 인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일종의 성례전이요, 단지 그런 성례전일 때만 참된 결혼인 것이다. 그러기에 결혼이란 또한 배타적인 어떤 것이다(etwas Ausschließlichehs). 일부일처제는 한 분이신 하나님의 요구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9장에서 그와 같이 말씀하셨다.

▲ 여자와 남자는 동등한 피조물이고 인격체이다. ⓒGetty Image

문: 그러면 간음이란 어디서 생기는 것이다?

답: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데서 간음도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최초의 죽음의 씨앗은 바로 탐욕이다. 하나님을 모신 사람에게는 충족함이 있다. 영생에 대한 그의 굶주림과 갈증은 이제 해소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을 갈망한다. 그는 하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추구한다. 그는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는 행복, 명예, 권력, 쾌락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특히 돈을 얻고자 하고 여자를 얻고자 한다. 그는 존경과 사랑을 전제하지 않고 단순한 욕망으로 여자를 탐한다. 여자는 인격체에서 물건으로 된다. 그래서 일부다처제가 생긴다. 이것은 이교들에게는 여러 신들이 있는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아가다 보면 간음을 하게 된다. 우상숭배와 간음은 항상 서로 관련이 있다. 우상숭배는 간음이다. 왜냐하면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이기 때문이다. 간음은 우상숭배이다. 왜냐하면 간음은 비너스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그것은 ‘아스다롯’이었다.) 반면에 결혼이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한 분이신 하나님에게서 단 하나의 결혼이 나온다. 여자는 신성하며 인격체이다. 남자 역시 그렇다. 여자는 다만 일부일처제에서만 신성할 수 있고 인격체일 수 있으며 남자 역시 그러하다. 혼외관계에 있는 남녀의 모든 성적 결합은 남녀 안에 있는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결혼이란 성례전이며 또한 단지 성례전일 때만 결혼은 결혼다운 것이다. 결혼 전에, 결혼한 사이에 (이런 음란도 있다!) 결혼한 관계가 아닌 사이에, 결혼 이후에 음란은 간음이다.

문: 이 성례전이란 가톨릭적인 의미에서도 이해될 수 있는가?

답: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통한 피조물의 신성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문: 결혼예식(Trauung)이 결혼을 성례전으로 만드는가?

답: 그것이 결혼을 성례전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혼예식은 결혼이 성례전임을 증명한다.

문: 성례전으로써의 결혼에 어떤 필수불가결한 형식이 있는가?

답: 없어서는 안 될 형식이란 하나님과 그의 나라이다. 인간적인 형식으로 발생하는 것은 그 점에서부터 제대로 방향설정이 되어 있어야만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정도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특별히 깊고 섞고 변질된 삶의 모든 영역은, 다만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능력이 그와 같이 타락한 삶의 전영역에 어느 정도 흘러 들어가느냐에 따라 건강해질 수 있다.

문: 그것은 남녀관계 및 결혼관계 대한 엄격한 이해가 아닌가?

답: 하나님 나라의 의는 시민도덕을 넘어서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 니라의 의는 율법에 맞추어져서는 안 되며 단지 아버지요, 주님이신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또한 세상의 정욕과 경박함에 마음을 두어서도 물론 안 될 것이다. 여성을 주님이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아버지 안에서 자매로 느끼는 사람은 크게 봐서 그 여성과 간음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다. 그는 여성에게 음욕을 품어선 안 되며 그럼으러써 물건처럼 그녀를 천하게 보아선 안 되며 그녀를 욕보이는 상상을 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이미 그녀를 간음한 것이다. 여자와 남자는 결혼을 했거나 안 했거나 서로 달라야만 한다.

문: 그러나 그것은 힘들지 않는가? 어떻게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가?

답: 그 대답은 원칙적으로 간단하다. 그것은 명령이 유래하는 곳, 즉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는 유지될 수 있다. 탐욕이 하나님에게서 이탈하는 데서 유래하듯이 탐욕의 극복도 그를 향하는 것, 참으로 그를 두려워하는 것, 그에 대한 사랑과 복종, 그에게서 나오는 생명으로 가능한 것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다른 신들, 음란한 신들을 압도한다. 또한 모든 것이 풍부한 하나님은 욕망을 없앤다. 왜냐하면 그는 영혼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가라앉히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결혼을 신성하게 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참된 울타리이다. 참된 사랑,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모든 거짓 사랑을 몰아낸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섬기는 것은 영혼을 충족시키고 우상과 그들의 유혹이 발붙일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참된 순결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노력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빛 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그들이 당연히 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되는 것이다. 율법의 울타리가 뱀의 유혹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이 그것을 저지하신다. 그리스도만이 악령을 추방하시고 하나님 나라만이 남녀와 그들의 결혼을 죄에서 구해내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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