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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에 지쳐갈 때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 탄생이야기 (1)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12.01 16:42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2019년도 마지막 한 달이 남았습니다. 또 이번 주일부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작년 대림절 기간에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살펴보았는데, 올해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따라가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탄생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점 등은 똑같이 나타납니다만, 그 외의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태어났다고 말씀해주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형인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 퍼뜨렸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각각의 교회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반영한 창작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적어놓았다기보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라는 점을 탄생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뭔가 불경함을 느끼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오히려 과거 교회가 자신들의 신앙을 적어놓은 글들을 사실 그대로 믿어야지만 은혜롭다고 여기는 점이 이해가 안됩니다. 사실이라는 점에 집착하게 되면, 오히려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신앙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는 이번 대림절 기간을 통해서 누가복음을 기록한 교회는 어떤 신앙을 전하고자 했는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전하려고 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또 이를 넘어서서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신앙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세례 요한의 집안

누가복음은 예수님에 앞서 세례요한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떤 인물인지를 먼저 적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 당시에 유명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탄생에 대한 어떤 설화가 실제로 있었던 것인지, 누가복음 교회의 창작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것이 실제로 존재했던 설화를 각색한 것이라면, 세례요한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어떤 특별한 인물로 인식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성소에서 천사를 만난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Getty Image

세례요한의 아버지는 아비야 족속의 제사장인 사가랴였습니다. 아비야는 아마도 느헤미야 12장에 나타난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 중의 한 명으로 보입니다. 느헤미야 12장 마지막 47절을 보면, 레위인들은 날마다 쓸 몫을 성별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또 성별 된 몫을 아론의 자손들에게 주었는데, 그 시기에 아론의 자손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레위인들과 구분되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 1장 5절은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그런 레위인 중의 한 명인 성전 제사장이었고, 어머니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이었다고 말합니다. 즉 세례 요한은 정통성을 가진 성전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났음을 이야기합니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아론의 자손이라는 점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녀의 친족이었다는 말씀과 연결되어, 마리아가 아론의 자손 중 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마태복음의 경우는 마리아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동정녀 탄생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반대로 요셉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조금 더 관심을 보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요셉을 다윗을 자손으로 설명하는 점은 똑같습니다만, 누가복음은 여기에 덧붙여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론의 자손이었다는 점을 추가합니다. 예수님은 왕족일 뿐만 아니라 제사장 가문의 정통성도 이어받으셨음을 이야기합니다.

구약성경과의 연결

마태복음의 경우, 빈번하게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마태복음이 구약성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예수님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 역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복음은 구약성경에 관심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같이 직접 인용을 즐겨 사용하지 않지만, 말씀의 내용 속에 구약 전통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의 말씀을 모르면 왜 이런 내용이 있는지 모르고 그냥 넘어가게 될 경우도 많습니다.

먼저 사가랴는 혼자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합니다. 우리가 성전이라고 부르는 공간은 전체적인 외벽을 포함한 전체 공간을 뜻하는데, 사가랴가 들어간 성전은 성전의 중심에 있는 성소를 의미합니다. 성소에는 제사장 밖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가랴 혼자 성소에 들어갔고, 모든 백성은 성소 문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소에서 천사를 만난 사가랴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22절을 보면, 백성들이 말을 할 수 없는 사가랴를 보면서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가랴가 천사를 만난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 쉬운 본문입니다만, 환상을 보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보면 우리는 한 사람을 떠올려야 합니다. 바로 에스겔입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와서 하나님의 환상을 봅니다. 처음 환상을 봤을 때, 그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입을 열 수 있었을 때는 예루살렘 성전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후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가랴가 환상을 보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고 누가복음이 이야기하는 바는 그 시기가 아직 심판의 시기임을 나타냅니다. 그가 말할 수 없는 시기는 하나님에 의해 벌을 받는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게 된 순간부터는 회복이 선포되는 시간이 됩니다. 즉 세례 요한의 탄생과 함께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중 17절의 말씀은 말라기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심판의 날은 구원의 날과도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악인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의인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됩니다. 다만 이스라엘에 악인이 더 많다면, 구원보다는 심판의 때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 사람들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말라기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엘리야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 구원의 날을 준비하며 사람들을 의로운 길로 이끌어줄 사람이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구원을 이끄시는 분, 이 땅을 구원하시는 분이 되십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신 말씀들은 우리를 의로운 길로 이끄시기 위한 말씀들이고 예수님의 삶 자체는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모형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처음 설정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러한 점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의로운 길을 가르치는 이는 예수님이 아닌, 그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이 됩니다.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

어찌보면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설정을 하고 있는 점은 실제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의로운 길로 나아올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말라기가 말하는 엘리야의 역할을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자체를 구원의 시작점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땅은 회복의 길로,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앞으로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계속 보게 되겠지만, 누가복음 1-2장은 구원을 기다리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가끔 신약성경을 읽어나갈 때,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방을 꿈꾸었다는 점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이들이 바라는 구원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그런 역사를 배워서 알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의 한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은 엄청 과격한 표현을 써서 해방의 기쁨을 말합니다. 심훈 자신은 1936년에 죽었기 때문에 해방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만, 그는 시를 통해서 말합니다. 해방의 날이 온다면 내 몸 가죽을 벗겨서 북을 만들어 행렬을 이끌 수 있을 정도로 기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해방을 바라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의 감정으로 보입니다. 이들 역시도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을 구원하실 날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이 오셨다고 로마가 멸망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이후로도 쭉 로마의 속국으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오히려 AD 70년 경에는 로마와의 전쟁이 일어나 헤롯이 만들었던 성전이 파괴되기에 이릅니다.

누가복음은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구원은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통해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누군가를 멸망시키고 누군가를 높은 자리에 앉히는 방식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삶을 따라 살아감으로 마음의 슬픔과 아픔을 서로 위로하고, 서로가 실제적인 삶의 도움을 줌으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어려움을 채워가는 삶이야말로 참된 구원의 세상, 하나님 나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은 여전히 로마의 속국이었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수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된 구원의 시작이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 탄생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사실을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리가 바라는 구원은 무엇인가를 전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지금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누가복음을 기록한 교회처럼, 우리는 구원받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세상의 어려움과 우리 개인의 어려움으로 인해 힘들고 지쳐가고 있진 않습니까? 여전히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우리는 이미 구원의 세상,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일,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동정녀 탄생이니, 세례요한과 사촌지간이었다느니, 이런 글자 그대로를 믿기만 하는 건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글자 아래에서 이들이 전하고자 했던 신앙을 깨달아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자들임을 믿고, 이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고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일이 참된 믿음입니다.

여러분들께서 그 믿음을 가지시길 바라며, 또 이 땅에서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구원받은 분들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가실 분들임을 잊지 마시고, 그 구원의 세상을 이 땅에서 누리시고 만들어 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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